[86화]
“범아.”
다들 흥겨워 하고 있는 그 시각, 술이 들어가니 그 조용하던 일리야마저 춤을 추며 놀고 있었다.
그 가운데 조용히 옆으로 다가온 로사가 열기가 서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를 만나서, 네가 있어서 너무 다행이야.”
갑작스럽게 훅 치고 들어온 말. 방비할 생각조차 못 한 그 시간.
‘뭐, 뭐라는 거야?’
얼굴이 붉어진 것이 술 때문일까. 저 말 때문일까. 다행히 로사가 이어서 말을 한다.
“너라는 목표가 있으니까. 가만히 있을 수가 없네. 그리고 깨달았어.”
그 말 이후 자신을 빤하게 바라보는 로사. 그 열망 어린 눈을 보아하니 자신이 착각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너무 싫지만. 먼저 떠나려고. 개인으로 널 이기는 건 여전한 목표지만.”
그 말과 함께, 주변을 둘러보며 흥겨워 하는 이들을 바라본다.
“우선은 단체전에서 승리하게 만들거야. 반 년. 그 안에 돌아올게.”
왜 그 말을 들으니, 심장이 뛰는 것일까. 로사의 기사단. 그 힘이 상상되고 설렘이 인다.
과거 로사의 기사단 이름은 백합기사단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백합 기사단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무적의 기사단] 그 누구도 막을 수 없고, 그 누구도 멈출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기사단. 심지어 처음으로 전투 마법사와 함께 운용을 하기 시작했지.’
지금까지도 기사단에는 마법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생(前生)에서 그 불문율 아닌 불문율을 깬 것이 바로 로사였다.
50명의 소규모 기사단에 존재하는 5명의 전투 마법사. 그들은 전장의 판도를 바꾸는 전술 무기와도 같았다.
‘심지어 그중에 유명한 사람 둘이 [전투학개론]에 소속된 두 괴짜 마법사였지. 로사가 은근히 인재 보는 눈이 있단 말이지.’
소속된 전투 마법사들이 몇몇 마법사들을 데리고 와서 훈련을 시키며 정복 전쟁 기간에 기사단에 마법사가 포함되는 것이 하나의 정설이 되었다.
‘그런 대장군이. 패러다임을 바꾼 이가 나를 목표로 달린다는 거지.’
그 무적의 기사단을 만들 로사의 모습이 기대가 된다. 그리고 새로이 만들어질 그 기사단도 기대가 된다.
‘그리고 용병단과 기사단의 격돌도 너무 재밌을 거 같은데?’
순 상회의 수호대를 키워서 훗날 로사의 기사단과 맞붙는다는 생각만 해도 설렘과 신남이 올라왔다.
“넌. 잘할 거야. 너한테 따라잡히지 않도록 사력을 다해서 굴려볼게. 자.”
아공간에서 책을 꺼내서 로사에게 건네 주었다. 다른 것이 아닌 데마르 님의 기본 교본 같은 것이었다.
‘다만, 데마르 님의 주석이 직접 달려있다는 게 다르긴 하지만.’
“이건/?”
“난 배운 거니까. 동일한 조건에서 가야지. 그래야 더 할 맛이 나지 않겠어?”
내가 준 책을 소중한 것을 끌어안 듯이 끌어안는 로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자. 가자. 다른 애들한테도 말 해 줘야지. 다들 엄청 섭섭해 하겠다.”
“너는.”
무엇인가 말이 들린 것 같지만, 말을 하다 말기도 했고 이내 시끌시끌한 소리에 묻혔다. 자신의 뒤로 따라오는 로사와 함께 파티에 몸을 맡겼다.
*
로사를 떠나보내고 얼굴에 철판을 깔고 편지를 써서 자신의 수하들도 모두 보냈다.
‘린이랑 럼니가 알아서 잘해 주겠지, 일주일이니까. 가서 회 좀 떠주면 되겠지 뭐.’
그렇게 다들 떠나보내고 자신은 여유롭게 걸으며 프리 존의 중앙을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저 탑도 오랜만에 보는 것 같기도 하면서 또 다르게 보이기도 하네.”
아카데미에 재학하던 시절 아카데미에서 나오면 눈을 사로잡는 두 가지 건물이 있었다.
하나는 거대하고 웅장한 왕궁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로 ‘탑’이었다. 탑은 특이한 곳이었다.
마탑을 제외하고서는 그 어떤 건물에도 탑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못한다. 불문율 아닌 불문율이랄까.
그 불뮨율에 자유로운 탑이 서대륙에 하나 자유섬에 하나가 있었다.
그중 수도에 떡하니 탑이라고 쓰여 있는 건물 하나. 마법사들도 인정한, 아니 즐겨 찾는 탑.
바로 다름 아닌 도박의 탑이었다. 그 안에는 수많은 도박이 일어나고 있었다.
왕실과 마탑이 고르게 지분을 가지고 있는 탑 안에는 수많은 도박이 존재했다.
자신의 물건을 팔러 온 사람도 있었고, 아이디어를 팔러 온 사람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나 아카데미 재학생들을 두고 하는 내기였지만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인정받은 탑. 수도의 탑과 닮은 건물이 자유섬의 서도(西島)에도 하나 존재하고 있었다.
프리 존에 있는 건물로, 속칭 무투의 탑. 각 지역의 지배자들이 자신을 알리기 위한 방편이자, 해적이 자신의 무용을 뽐내는 탑.
특이하게도 이 탑의 지분은 온전히 신전이 가지고 있었다. 수많은 재화를 이를 통해서 버는데도 아무도 불평하지 않는 이유,
“바로 저렇게 신관들이, 그것도 심지어 주교급의 신관도 존재하면서 치유해 주는 것 때문에 일부러 많이 찾아온다고도 하던데, 기대되네.”
자신의 이름이 아닌 가명으로 참가하는 수많은 무가의 기사, 탑의 마법사.
다양한 강자들이 즐비해서 자신의 실력을 알 수 있는 좋은 장소이기에 언제나 사람이 많았다.
“하. 그래도 프라우 덕분에 은패에 효용(效用: 어떤 물건의 사용 방법)을 알게 돼서 다행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단지 등록을 위해서 줄을 서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 자신은 프리 패스가 있었다.
줄 옆으로 나 있는 정문을 통해서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정지! 여긴 패가 없으면 지나갈 수 없습니다.”
‘성기사 수련생 정도 되려나, 꽤나 촉망받는가 보네. 하긴 벌써 유저면 빠르지.’
눈앞에 있는 인물의 경지를 가늠하는 것은 이제 습관을 넘어서 생활이 되었다.
문지기의 말에 은근히 코트를 젖혀 은패를 보여 주었다. 순식간에 바뀌는 얼굴에, 조용히 손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아. 네. 통과하십시오. 영광입니다.”
영광이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자유섬 출신인 듯 싶었다.
‘그러고 보니 자유섬 출신 사람들은 1위가 해적이고 2위가 신전이랬지.’
눈앞의 광경은, 거대한 홀이었다. 중앙에는 접수처로 보이는 원형의 테이블이, 벽에는 수 많은 인물들의 이름과 승/패 그리고 배당이 적혀 있었다.
“생각 이상으로 거대한 것 같기는 한데.”
뭔가 비어 있는 느낌이랄까, 활기찬 느낌이 덜한 느낌이랄까. 왜 고요한 느낌인지 모르겠다.
이상하게 텅 빈 기분을 지닌 채 접수대로 향했다. 6명이나 원형 테이블 안에 존재했다.
‘이렇게까지 필요한가.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
가장 정면에 보이는 접수원에게로 걸어가자 미소로 자신을 맞아 주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말이 나오기 전에 은패를 보여주자, 뛰쳐나오더니 자신의 앞으로 나온다.
“영광입니다. 이리로 따라오세요.”
자신에게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려 조심스럽게 인도하는 접수원. 그를 따라서 접수대 뒤로 나 있는 계단으로 올라간다.
여러 사진들이 걸려있는 홀. 100번 이상의 승리를 거둔 이들이 여기에 자리한다.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도,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사람도 눈에 보인다.
‘헐. 이 인간은 언제 여기를 온 거래?’
익숙하고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현재 수호용병단의 단장을 맡고 계시죠. 정말 빠른 기간에 100승을 달성하시고 훅 떠나셨죠.”
“아. 부발 님이죠? 저분이.”
그렇게 가끔 아는 얼굴도, 풍문으로 들어 보기 만한 얼굴도 눈에 들어온다.
‘와. 생각 이상으로 많은 강자들이 이곳을 다녀갔구나.’
홀을 지나자 문이 보였고, 그 문을 조심스럽게 여는 접수원.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앞으로 자주 뵙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친절로 시작해서 친절로 끝나는 인도였다. 그리고 새삼 은패에 무게를 느끼게 되었다.
‘여기서는, 은패라는 게 그저 높은 패가 아닌가 보네.’
“외지인에게는 조금 낯설지? 아직 섬에 당도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으면 더욱이. 반갑네.”
무투의 탑이라는 명칭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인물. 너른 방에는 몇 명의 사진과, 키(배의 키), 사진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 앉은 초로의 장년인. 세월의 흐름을 알게 해 주는 주름들과 하얗게 샌 머리.
지금까지 봐 왔던 우락부락하고 덩치가 큰 인물들과는 다르게 어딘가 왜소하고 자신보다 작은 이.
그럼에도 그 눈빛은 깊고 깊었다. 마치 바다처럼. 물이 깊고 깊어서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그 바다처럼.
‘신기한 느낌이네, 분명 강자는 아닌데 함부로 대하면 안 될 것 같은 감각이 울린단 말이지.’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욱이 몸가짐을 조심하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무투의 탑]에 처음 들어오게 된 범이라고 합니다.”
심해에 한줄기 강렬한 빛이 내리 쬐는 느낌이라면 이런 느낌일까 싶은 섬광(閃光: 순간적으로 반짝이는 강렬한 빛)이 초로의 눈에 나타났다.
“호오. 감이 좋은 건가. 대부분의 무식이 빽빽 이들은 좀 혼나 봐야 정신을 차리던데.”
기특해 하면서도 한편으로 아쉬워하는 그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역시, 스승님의 말씀을 따르기를 잘했어. 뭔가, 뭔가 달라.’
“와서 앉거라. 차를 준비해 놓았으니. 아! 소개가 늦었구나. 무투의 탑 12대 탑주(塔主)인 오즈안이라고 한다.”
‘탑주(塔主)라고? 저분이? 무투의 탑의 탑주라고?’
무투의 탑. 온갖 강자들의 자신의 무위를 확인하고 뽐내기 위해서 오는 장소.
그런 장소에 탑주가 저 초로의 사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뭔가 있나?’
“이상하지? 아무리 봐도 별것 없어 보이는 노인네가 탑주라니.”
“아. 아닙니다.”
“표정 관리하는 연습을 해야겠어. 아니면 그도 필요 없을 만큼 강해지던가. 얕은 바다의 물처럼 훤하게 드러나는데?”
뭔가 있는 사람들은 왜 도대체 평범하게 나이들 수 없는 건지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하나같이 뭔가 이상하단 말이지. 괴팍하거나 괴랄하거나 이상하거나.’
하지만, 그보다 더 귓가를 강하게 때리는 한마디가 있었다.
‘그도 필요 없을 만큼 강해진다라. 얼마나 강해져야 하는 걸까? 초인? 아니면 그 이상?’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스승님 정도면 되는 건가?’
성하(聖下)께서 말씀하시기로 스승님께서 이 세계에서 최상위의 강자라고 말씀해 주셨다.
다만, 드러내고 있지 않을 뿐이라고. 더욱 스승님을 존경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아니면, 성하?’
감히 불경스러운 생각을 해 본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기로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인물은 단연 성하라고 했다.
‘성하의 상대를 잠시라도 할 수라도 있는 사람은 오로지 둘, 셋 정도 뿐이라고 하셨지.’
하지만,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다. 아직 스승님의 강함도 어렴풋한데 그 이상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만. 그 이상은 아직 네가 갈 필요도 생각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상념(想念: 마음에 그려진 여러 가지 생각)이 일소(一掃: 모조리 쓸어버림)하는 신기한 음성이었다.
‘뭔가 더 있는 사람인가. 방금 그건. 뭐지?’
머리가 개운해지고 맑아지는 기분. 그것은 음성만으로 가능케 한 다는 것은 들어 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는 일이었다.
분명 머리는 개운해졌는데, 의문이 다시 피어나는 기분이었다. 저 존재에 대해서.
“생각이 실로 많은 아이로고. 좋기도 하지만, 조심해야 할 것이다.”
‘진짜 뭐하는 사람이지?’
자신이 아무리 표정에 모든 게 드러난다고 해도, 일별(一瞥: 한 번 흘낏 봄)하는 것만으로 이렇게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 상대편에 앉아 있는 그 사람은 그것이 가능해 보이듯이 말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흠. 안 그래도 네 이야기는 종종들었다. 몬트가 꽤나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더구나.”
“몬트 님이 누구?”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자신이 만난 사람들을 열심히 기억하고 되돌려 보았지만, 들어보지 못한 이름.
“아! 모르는 게 당연한 게, 쯧. 나이를 먹으면 가끔 이러니 이해하거라. 너는 아마 성하(聖下)라고 부르겠지? 그놈아가 성하라니.”
뇌가 정지했다. 전혀 상상하지 못한 사람이 튀어나왔다. 순간 현실 부정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