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중앙 신전에서의 일을 끝내고, 다시 돌아온 블레어 수호성의 풍경은 기묘했다.
‘이제 떠나는 날이라서 그런가 좀 풍경이 새롭네.’
문득문득 지나가며 보이는 풍경들에 새겨진 기억들이 하나하나 떠오르기 시작했다.
‘저기는..’
소대원들과 함께 술을 마셨던 주점, 씨어님과 술래잡기를 했던 거리, 그리고 루키 레이스를 했던 길들.
‘뭐냐… 아예 떠나는 것도 아닌데 괜히 좀 그렇네.’
그래서 괜히 동문으로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북문으로 들어오는 것이 더 빠름에도 자연스럽게 동문으로 들어와 불스 용병단의 전택을 향해서 천천히 걸어갔다. 천천히.
*
모두 입무를 맡아 나갔는지, 평소의 시끌벅적한 저택이 아니었다.
‘저건… 참.’
단장실로 들어가니 외팔로 서류 업무를 보고 있는 부발님이 눈에 들어온다.
외팔은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단장실에서 서류는 보는 그 모습이 더 어색했다.
“막둥이!”
서류를 끝내고 자신을 보며 여전히 막둥이라고 부르는 부발님이다.
“에이, 막둥이는 이제 졸업 아닙니까? 제 밑에도 많고, 이젠 더이상 불스 용병단도 아닌데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여전히 불스 용병단의 옷을 입고 표식만 바꾼 자신의 모습을 보더니 피식 웃는 부발님이었다.
“말은 잘하지. 표식은 왜 바꿨어. 그냥 달고 다니지.”
“에이… 그래도 그 정도 민폐는 끼칠 수 없죠. 괜히 말도 나올 테고.”
한 번 수호 용병이 되면, 은퇴하는 것이 아니라면 수호 용병이라는 직위를 내려놓는 것이 쉽지 않았다.
괜히 ‘한 번 수호 용병은 영원히 수호 용병이다.’ 라는 말이 나온 것이 아니었다.
신전, 그것도 중앙 신전에서 허가를 받아야만 수호 용병직을 내려놓고 자유로이 행동 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괜히 불스 용병단의 표식을 달고 다니다간, 쓸데없는 말만 만들 뿐이었다.
‘이걸 나보다도 잘 아실 텐데도… 은근히 정이 많으시단 말이지.’
“막둥이도 의외로, 가끔은 참 똑똑한 거 같기는 한데 말이지…”
꼬롬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부발님을 불퉁하게 바라보자 웃으며 말을 이으셨다.
“방은 비워둘 테니, 언제고 돌아와라. 빨리 가서 정리나 해.”
은근히 붉게 올라오는 목 주변을 보며 유쾌하게 웃으면서 돌아서 방으로 향했다.
‘근데… 초인도 붉어지는 걸 조절은 못하면 언제쯤 가능한 거지?’
괜히 쓸모없는 생각을 하면서 방으로 향했다.
*
“이제 여기도 마지막이구나.”
방 정리를 마치고 나자, 이곳저곳 빈 곳이 눈에 들어온다. 어색한 기분이다.
성인식이 끝나고 5년. 짧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길지도 않은 그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일이 모두 끝난 뒤에는 항상 자신을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반겨주었던 장소.
이제는 떠나야 한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 새로 시작해야지.’
하나하나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이 다가왔다. 괜스레 한 가지를 손에 집을 때마다 생각나는 기억에, 손이 조금 느려졌다.
그러자 남은 것은 단 하나의 사진. 벽에 걸린 생생한 하나의 사진이었다.
“이건… 놓고 가야겠다.”
자신이 정식으로 소대장이 되었을 때 소대원들이 준 사진이었다.
각자 작은 사진들이 하나씩 있지만, 그래도 소대장이라고 실사 크기로 그려진 큰 사진을 하나 더 선물해 주었다.
몇 년 전이 그대로 생각나는 사진을 뒤로하고 마지막 저녁을 위해 방을 나섰다.
모두가 그 사진 속에서는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
“식당에 사람이 많네?”
마나가 적게 느껴지니, 사용인이라는 뜻인데 이렇게 분주한 것을 보니 거한 만찬이라도 해주나 싶었다.
여전히 쓸데없이 과한 단장님이라고 생각하면서 식당의 문을 열었다.
“막둥이!!”
“배신자!!”
“혼자 도망가니까 좋냐!!”
수많은 말이 들려왔다. 반면에 자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어째서… 어떻게…?”
분명 느껴지는 기운은 일반인 정도의 기운뿐이었다. 기운뿐만 아니라 기세, 기척 모든 것이 일반인과 다르지 않았는데,
“잘난 막둥이는 한 번 놀리기도 힘들구만!”
팔을 들어 올리는 씨어가 눈에 들어오자 그제야 조금 이해가 갔다.
“아니!! 나 하나 속이겠다고 전원이 마나 구속구를 차는 미친놈들이 어디 있습니까!!”
“여기 있다 이 새끼야!”
뒤통수가 아려오는 것을 보니, 단장님이 확실하다.
“단장님! 진짜!! 이거 데마르님은 알고 계십니까!!”
“응 알아. 내가 계획했는데?”
그 옆에 개구쟁이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데마르님의 고개가 드러난다.
[마나구속구]
이 세계에서 3대 발명품으로 뽑히는 것이 있는데, [마나 구속구]는 [마나석 변환기], [계약의 서]를 뒤를 뒤이어 3위에 올라있는 물품이었다.
500년 전, 무명의 마법사가 개발한 [마나 구속구]는 30년 전 계약의 서와 마나석 변환기 이전에 언제나 최고의 발명품으로 손꼽히는 물건이었다.
자세한 원리는 여전히 비밀이지만, 구속구를 착용하면 체내의 마나가 활동을 정지한다.
흐르던 물이 얼음이 된 것처럼 마나가 흐르지 않게 하는 물건으로 철저하게 신전과 왕국의 통제를 받는 물건.
수도 아카데미 시절에서나 볼 수 있는 물건을, 감옥도 아닌 용병단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와 진짜… 미친 인간들이다. 내가 하다 하다 마나 구속수를 제발로 차는 인간들을 보게 될 줄이야.”
말은 그렇게 나오지만, 내심 고마운 마음이 가득했다. 자신을 위해서 마나 구속수를 모두가 차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익스퍼트에만 이르러도 구속구를 차는 것을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싫어한다.
구속구를 차는 순간 마나가 얼어붙는 느낌에 답답함이 전신을 죄어온다.
그런데도 자신을 위해서 구속구를 찬 저 인간들이 미친놈들 같지만 고맙기 그지없다.
“그것뿐만이 아니라고!”
데마르님은 마치 악동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항상 일에 쩔어서 있던 데마르님이 맞나 싶다.
부발님이 단장의 역할을 하기 시작한 이후로 여유가 생긴 것인지 살이 오르기 시작하셨고, 어느새 처음 보는 데마르님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던 부발님은
“저 미친놈… 일에 쩔어 있을 때는 얌전하더니…”
라고 하시고는 고개를 내젖는 것을 보았다. 본래 성정이 일에 눌려있다 폭발하고 있었다.
당당하게 걸어가던 데마르님은 식당의 중앙에 설치된 마정석을 보여주셨다.
“마정석?! 마정석이 왜 여기에서 나옵니까?!!?”
“량이가 급하게 떠나서, 내가 소개를 해주자면… 그때 안개 기억나?”
량이가 떠났다는 사실에 텐션이 내려가는 데마르님의 모습을 보면서 웃음이 나왔다.
“아 그 안개요 네 기억나죠. 어떻게 잊겠어요…”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마스터에 오르고 나서 세상의 모든 것을 이길 것이라 생각한 자신에게 내려진 철퇴이기도 했다.
“그걸 량이한테 말해줬는데 말이다. 진짜 량이는 얼마나 천재인지 감도 안 온다…”
말을 하며 마정석에 다가가 간단한 조작을 하자 주변의 기운이 순식간에 변화했다.
갑자기 기척이 강하게 느껴지는 기분은 어색했다. 방 안의 기척이 순식간에 확대되어 인지 되었다.
“이.. 이게…”
“실험작이라신다. 진짜 량이 걔는… 심지어 범위는 저택 전반까지란다. 방비용으로 쓰라고 쿨하게 주고 가셨다.”
‘하 미친…’
천재, 천재라고 했지만, 이럴 때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아직까지 마법을 담는 것도 간단한 것이 아닌이상 불가능한 지금에, 량이가 만든 저 실험작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량이는 량이고! 자 막둥아! 선물이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사람은 씨어님이었다. 묵직한 오크통을 들고 와 자신의 앞에 내려놓았다.
“어?”
“마셔라! 이별주 겸 축하주다!”
“이 무식한...!”
갑자기 자신을 둘러싸 온몸을 잡는 이들이 느껴진다.
“죄송합니다. 범님… 그래도 저를 두고 가시는 만큼…”
“마르쿠스 너 마저…”
어쩐지 움직일 수조차 없는 힘이 느껴진다 했더니 마르쿠스였다. 온 몸이 결박된 채 오크통이 입에 부어졌다.
그렇게 자신의 환송식이 시작되었다.
*
“으어…으어어어…”
정신을 잃었다. 마스터에 오른 자신인데도 불구하고, 기억이 순간 끊겼다.
어렵사리 눈을 뜨니 난장판이 눈앞에 펼쳐졌다. 도대체 어떤 술을 먹인 것인지 모두 시체처럼 쓰러져 있었다.
“일어났냐?”
초인은 주량도 괴물이 되는 건지, 아니면 저 양반이 그냥 괴물인 건지 분간이 안 간다.
손에는 호박색 액체가 찰랑이는 술이 들려 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잔을 들고 옆에 앉았다.
“새끼 좋은 건 알아가지고.”
말을 하면서도 얌전히 자신의 잔에 따라주는 부발님이다. 잔에 찰랑이며 채워지는 [포이드]는 아름답다.
향부터 감미롭다. 목을 넘어가는 순간 주취(酒臭 : 술 냄새. 여기서는 숙취를 뜻한다.)가 날아가는 것이 느껴진다.
“큭큭 [포이드]가 해장술로는 최고지. 딱 한 잔만 할 수 있다면 이지만.”
그러면서도 냉정하게 병뚜껑을 다시 닫는 저 손길이 왜 그리도 매정한지.
“이제. 자유섬으로 가는 거냐.”
부발님이 말씀하신 자유섬. 속칭 [엘도라도]라고 불리는 섬으로 향한다.
서대륙과 동대륙 사이에 존재하는 군도(群島), 그중 가장 큰 세 개의 섬이 주도(主島)로 삼은 군도를 통칭하는 말이 자유섬이었다.
“네. 중도(中島)로 향할 것 같아요.”
“참… 너도 한 곳에 정착할 운명은 아닌가 보다. 옛다. 가는 길에 짬짬이 읽어봐라”
그러면서 품 안에서 서책을 하나 던져주는 부발님. 받아 보니 [섬 나라 이야기]라는 동화 같은 제목의 책이 손에 잡힌다.
“이게…? 웬 동홥니까? 어울리지도 않게.”
“멍청아. 저자(著者 : 지은이)를 봐라.”
“이 미친..!”
하여간 방심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도대체 이 책은 어떻게 구한 건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뭐… 그냥 그런 게 있다. 나중에 천천히 봐라.”
물어볼 말이 산더미였다. 입을 열려는 찰나에 다들 하나하나 일어나기 시작했다.
“뭐여! 대장만 뭐 준 거여?”
다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고 부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뛰쳐나가고 누군가는 품에 손을 넣는다.
경악스러운 선물은 끝이 아니었다. 시체에서 다시 살아난 이들이 하나하나 주는 선물들은 진귀하기 그지없었다.
새삼 자신이 정말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 다시금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정들었던 곳을 떠나 새로운 곳을 향해서 떠났다. 자신의 무대가 다시금 바뀌기 시작했다.
*
수많은 선물을 받고 향한 곳은 중앙 신전이었다. 자유섬으로, 그것도 중도로 향하는 배는 중앙 신전이 가장 많았다.
그렇기에 중앙 신전으로 향해서,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역시나 신전.
마틴을 마지막으로 보고 난 후에 중앙 신전에서 배를 타고 자유섬으로 향하는 길.
신전의 배려로 가장 좋은 방을 얻을 수 있었다. 처음 대양에 있을 때는 그 광활함에 놀라고 감탄스러웠지만, 얼마 가지 않아 지루해졌다.
그래서 선실로 들어와 단장님께서 선물해 주신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하… 로즈골드의 책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지…”
불과 20년 전의 인물. 자유섬의 인물인데도 서대륙과 동대륙을 울린 위명을 떨친 인물. 바다의 황제라는 이명이 붙은 이였다.
여전히 바다에서는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는 이가 지은 책을 자신이 가지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혹시 만나면 자신의 이름을 대라고 했는데… 죽을 수도 있지만 살 수도 있다면서. 도대체 무슨 관계인 거야. 진짜 우리 단장님은…”
도대체 품에서 어떻게 이렇게 두꺼운 책을 꺼냈을까 생각하면서, 혼잣말하며 책을 조심스럽게 열어 하나하나 읽어보기 시작했다.
“와 씨…”
책에는 수많은 군도의 해도와, 상세한 그림까지 들어가 있었다. 보자마자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해도 공부… 해야겠네 씨…”
그러면서도 어느새 책에 집중하게 되었는지, 방에는 사락사락 책 넘어가는 소리만이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