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폭풍 같은 시간이었다. 분노하고 어이없어하며 허탈해하는, 그야말로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받아내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그동안의 힘든 것에 대한 반동이었을까, 로사의 분노는 꽤나 깊고 대단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
“뭐… 내가 원하는 건 아니지만… 량이 널 위한 계획이 몇몇 있다고 하더라고.”
“넌…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내가 내릴 수 있는 결정도 아니고.”
내 말에 실망은 한 건지 다시 어깨가 힘없이 내려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다만… 내가 아는 로사라면… 널 이렇게 만든 사람들을 가만히 두지는 않겠지.”
이어지는 말에는 다시 어깨가 슬슬 올라오려 하는 것을 보니 얘도 참 특이한 애다 싶었다.
“후아… 근데 내가 진짜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갑자기 또 의기소침 해지는 모습에 왠지 과거의 카인의 모습이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어느 정도는 로사의 미래를 알고 있다는 점. 그렇기에 단호히 말 해 줄 수 있었다.
“응. 몹시.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네 재능은 전장에서, 전투에서 더 큰 힘이 될걸?”
비록 지금은 많이 틀어졌지만, 전생(前生)에서의 로사의 미래는 찬란했다.
상승장군(常勝將軍 : 적과 싸울 때마다 항상 이기는 장군). 존재만으로도 사기를 끝없이 올려주는 장군이었다. 그것도 무려 5년을 넘게 지속한 말도 안 되는 장군.
정복 전쟁을 하는 동안 로사가 맡은 전선은, 작전은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
그때 로사가 한 말이 크게 회자(膾炙 : 사람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다.) 되기도 하였다.
‘내 재능은 전장을 위한 재능이기도 하다.’
그 발언에 로사의 재능이 무엇인지 추측하는 말들이 무수히 많이 나왔지만, 결국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 로사의 미래를 알고 있기에 확고한 마음으로 말을 해 줄 수 있었다.
“너랑 가장 많이 대련해 본 사람이 나잖아. 그래서 네 재능이 어떤 종류인지 알 것 같은데… 그 재능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닐 거야.”
자신의 말에 놀라는 로사였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아도 한없이 부은 눈으로 째려보는 눈길은 웃길 따름이었다.
“웃…웃기지 마! 아무리 나랑 대련을 많이 했다고 해도… 내 재능을 네가 어떻게 알아!”
“아니… 뭐 아는 게 아니라… 대충 느낌이 온다는 거지. 빈 곳을 파악하거나 뭐 약점을 보거나 이런 류 아니야?”
자신의 말이 끝나자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어버버하는 로사의 모습이 보였다.
“뭘… 그렇게까지 놀랄 일이야? 나랑 대련할 때마다 최선을 다하는데, 눈에 보이는 건 없고 가끔가다 나도 모르는 부분을 찔러 들어오는데?”
생각지도 못했다는 표정으로 있다가 이내 넋이 나간 표정으로 바뀌는 로사였다.
“아니… 차라리 표정 관리라도 하면서 아니라고 하지. 그렇게 넋이 나갈 일이야?”
“아니…어떻게… 너!! 절대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돼?! 어?!”
“어… 그렇게 말을 해도…”
“너… 설마…!! 누구야!!”
“어…량이랑…인이랑…스승님이랑… 마틴이랑…”
이름이 하나하나 나올수록 혼이 조금씩 빠져나가더니 결국 털썩 주저앉아버린 로사였다.
‘….그렇게 문제가 되는 일이었나?’
*
“서약서… 서약서가 필요해!!”
한참을 넋이 나가 있던 로사가 진지한 표정으로 이내 자신을 잡아끌고 카인이 있는 곳으로 와서 외친 말이었다.
“서약서…를 써주는 조건으로 온전히 합류하는 건가?”
그 앞에는 자신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던 냉철한 모습을 한 카인과 가만히 있어도 성스러운 분위기의 마틴이 서 있었다.
“라니우스님과 마틴님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하지만, 너랑 량이는 꼭 써줘야겠어. 그리고 혹시 다른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도.”
“흠… 우선 범이가 알려준 사람은 마틴이랑 라니우스님을 제외한다면 나랑 량이 밖에 없어.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도 않았고.”
“그걸 확약하는 내용도 서약서에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찡찡이로만 보였던 두 사람의 냉철한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두 사람의 대치를 보면서 은근히 마틴의 옆으로 갔다.
“와… 쟤네가 원래 저런 모습이었어?”
“응? 아… 유명한데? 로사 자매님은 꽤 냉철하면서도 잘 가르쳐주기로 유명했어. 카인은 서글서글하지만 선이 명확하고.”
“냉철? 선이 명확? 와… 찡찡이들이 그렇게 보여 지고 있다고?”
“찡찡이?!”
“찡찡이라니!?”
자신의 말을 들은 것인지 두 사람이 동시에 자신을 노려보았다.
“음… 아닌가 봐. 그냥 뭐… 내 기억에는 두 사람이 울고불고 한 기억밖에…”
“너!! 너라고 다를 줄 알아?!”
얼굴이 붉다 못해 터질 것 같이 달아올라 고개를 숙인 로사와 다르게 자신을 협박하는 카인이었다.
“음… 아니야. 미안. 계속 이야기해.”
“하…”
“후…”
날카롭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풀려버리고 말았다.
“근데… 선천 재능을 숨기는 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야?”
그 말에 한숨을 내 쉬던 두 사람의 얼굴이 자신을 향해 돌아섰다. 어이없어하는 그 얼굴에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흠… 용병 일을 할 때는 굳이 재능을 숨기거나 하지 않았던 거 같은데… 오히려 재능을 밝히면 더 대우를 받았는데…’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로사의 질문에 마저 대답할 수 없었다. 옆에서 카인 또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더 그랬다.
“넌 네 선천 재능이 뭔지 말 해 준 사람이 있어?”
“응. 마틴이랑 스승님…? 카인도 있고… 마르쿠스도 있고,, 생각해보니… 나도 말해 준 사람이 없기는 하네… 근데 그건 안 물어봐서 그런 건데?”
“하아….”
“후우….”
여전히 한심하게 쳐다보는 이들이었다. 그래도 덕분에 조금 분위기는 풀린 것 같았다.
“카인… 네가 고생이 많았네… 이런 아이일 거라고 생각도 못했어…”
“그치? 다들 엄청 대단하다고 생각만 하지… 내가 진짜…”
그렇게 냉랭하고 경직된 분위기에서 지내던 두 사람이 갑자기 자신을 주제로 공감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흠… 내가 그렇게 잘못 말한 거야?”
“아니야… 잘했어. 아마 우리가 둘 다 기본재능이라 선천 재능에 대한 생각이 좀 다른가봐.”
“그래?”
“응. 기본 재능은 포괄적이잖아. 엄청. 그래서 뭐 알려준다고 해도 잘 모르는데 다른 재능은 아니더라구.”
“참… 뭐… 나도 좋은 재능을 가져봤어야 알지.”
“나도 들어와서야 알았는데 뭐… 엄청 중요하게 생각하더라. 막 자기 걸 다른 것처럼 말하는 게 기본이래.”
“와… 이래서 있는 것들이 더 하다고… 진짜 재능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그래도 우리는 잘하고 있으니까 괜찮지! 그중에서도 범이는 정말 대단하구!”
“그것보다 네가 훨씬 대단하지! 최연소 주교 후보라는 말도 듣는데?”
마틴이랑 이야기하는 중에 갑자기 조용해진 분위기가 이상해서 고개를 돌려보니, 짜게 식은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는 이들이 보였다.
“너네…”
“진짜 재수없어!”
“왜? 내가 틀린 말 했어?”
“한 명은… 최연소 마스터, 한 명은 서품(敍品)받은 사제. 그 주제에 재능이 뭐?”
다시금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유독 카인과 마틴이 함께 있으면 나도 어려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기분이 딱히 싫지는 않았다.
“마틴 너도 뭐라고 해 봐! 우리가! 재능이 없어서 얼마나 힘들었는데!”
“뭐… 그건 사실이지. 원래는 그냥 바로 일하려고 했어.”
네 사람이 서로 시끌벅적 서로 투닥이는 사이에 로사와 있던 벽이 조금은 사라지는 듯했다.
*
일주일. 7일이라는 시간 동안 매일 저녁 성하(聖下)를 찾아 배움을 청했다. 스승님과 아침마다 시간을 보냈다.
카인과 마틴과 함께하는 시간, 종종 로사도 함께 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있어서야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후… 확실하게 정리하고 가자… 이번은 정리해야 가든 할 것 같네.’
마음을 다잡고 결정을 내린 아침. 그 결정을 내린 것을 어떻게 안 것인지 모두들 찾아왔다.
“범아~~”
어쩐지 아침부터 시끌벅적하더니, 1층에 아침을 먹으러 내려가니 이미 자리를 잡고 떠들고 있는 이들이 보였다.
에밋, 샨, 량, 마르쿠스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고 악동 같은 미소를 짓는 카인이 보였다.
벽을 세우던 자신의 마음에 언젠가부터 친구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이들이 보였다.
언제봐도 좋은 친구들이지만 오랜만에 보아서 그런지 더 좋은 친구들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 아침을 먹고 스승님을 다 같이 뵈고 온 후에야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에밋은 순조롭게 후계자의 위치에 다가서고 있었다. 샨은 그런 에밋의 곁에서 그림자로 지내고 있다고 한다.
량이는 이것저것 한다고 의뭉을 떠는데 아무래도 뿌리에 관련된 일 같았다. 그리고 마르쿠스는 나를 대신해서 조장이 되었다.
가문에서 돌아오라고 했지만, 자신은 용병이 좋다며 내 자리를 대신 한다고 한다.
다들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을 길을 정해서 가고 있는 모습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지금 이 순간만으로도 결심이 흔들리는데, 친구들은 이미 한발 앞서 나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여기서… 더 시간을 함께해도… 되는 건지…’
“그래서 넌. 결정했어?”
서로 각자의 이야기를 하다 가량의 질문에 모든 아이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날아온 질문에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음… 일단은…?”
“일단은이 뭐야.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지.”
“후… 올라가려고 했는데… 너희들이랑 있으니까 또 다른 생각이 드네.”
“멍청이.”
“범아…”
“흐음…”
“….”
하나같이 다른 반응들이 신기하면서도 즐거웠다. 친구라는 존재가 사실 처음이었기에 더욱 아쉬운 듯했다.
“그래도… 가야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이번 사건을 정리하고 가려고.”
“후… 확실해? 더 힘들고 더 어려워질지도 몰라. 지금! 20살의 나이에! 이 기회를 그냥 두고 본다고?”
“왜. 흥분하고 그러냐. 안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너도 올라가면 되잖아.”
“멍청한 무식쟁이 같으니라고. 연금술로 상위 세계에 오른다는 게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오오오. 그래도 생각은 있나 보네?”
“모르지 뭐. 나도 스승님처럼 늦은 나이에 가게 될지도 모르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올라가는 건 더 어려우니까…”
“하긴… 모든 걸 두고 떠난 다는 게 쉽지는 않지…”
결국, 흔들리던 나를 잡아주는 것도 친구들이었다.
‘과연… 올라가면… 이런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불안함 아쉬움 두려움이 올라왔지만, 우선은 이 시간을 조금 더 즐기기로 했다. 아직 얼마나 남은 시간인지 모르지만.
‘뭐… 이러다가 영영 못 올라가지는 않겠지…?’
실없는 생각을 뒤로하고 다시 친구들 사이에 파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