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량이랑 이야기한 부분인데. 아무래도 이 일이 꽤 길어질 것 같아서. 너가 남을 거라고 생각을 못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로사를… 데리고 와야 할 것 같아.”
“로사를… 굳이? 힘이 중요하지 않다며?”
“로사는 세력이 있으니까.”
벌써부터 카인과 량은 자신이 떠나고 난 뒤를 상정해서 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 부분이 조금은 아쉬웠다.
“내가… 떠나지 않아도 로사가 필요해?”
‘와… 씨… 내가 왜 이랬지. 입이 방정이지. 미쳤네…’
막상 내뱉고 보니 부끄럽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질투하는 것도 아니고, 아니 질투하는 아이처럼 분명 보였을 것이다.
세상에나… 질투라니. 그것도 이렇게 어리고 유치하게. 마스터가 되었는데도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마스터… 왜! 육체를 못 다루는 것이지!!’
“크하하하하하하하 범이는 울보가 아니라 질투쟁이였구나아~~”
‘하… 망했다.’
할 말이 없었다. 오늘따라 흑역사를 만들어내는 날인지 끊임없이 수치사 할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크하하하하..어?어어? 범아 그러는 거 아니야. 아니야. 미안해.”
자신도 모르게 극에 이른 수치감이 자신의 기세를 피워 올렸다. 그 기세에 양피지들이 팔락거리며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카인의 만류에 뒤늦게 깨닫고 기세를 갈무리했다. 얼마나 부끄러웠으면 자신도 모르게 기세를 피웠을까 자신이 불쌍했다.
‘얼마나 부끄러웠으면 그랬겠어. 결코, 결코 일부로 그럴 리 없잖아.’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면서 열심히 합리화 하지만 붉어진 목덜미는 도저히 하얘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와… 이거 서러워서 놀리지도 못하겠어. 진짜 너무하다 질…”
‘질’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강력한 의지를 담아서 카인을 노려보았다.
“알았어. 알았어. 그만하면 될 거 아니야! 진짜. 치사해. 자기는 다 놀려 먹고.”
“로사 이야기나 더 해 줘.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건데.”
“아! 로사. 로사는 세력이 있어. 명분도 있고, 비록 후계가 단단해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거든.”
“그래서…?”
“꼭 후작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여러 방법이 있으니까. 너가 설득을 해줘.”
“내가 말한다고 설득이 될까? 오히려 더 싫어할 것 같은데?”
자신의 대답에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사람을 보듯이 쳐다보는 카인이었다.
“왜? 뭐가 달라?”
자신의 대답에 깊은 한숨을 내쉬는 카인이었다.
“그래… 내가 바랄 걸 바래야지…”
뭔가 웅얼거리는 소리로 말하는 것이 정확히 들려왔다.
“왜?!”
“아니야. 음… 내가 알려준 대로만 해.”
뭔가 물어보면 더 비참해질 것만 같은 마스터의 감이 올라왔다. 그래서 조용히 경청하기로 했다.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열심히 듣고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니까… 말을 하고 잘 들어주고 좀 참으라는 거지?”
“하… 그냥 반박하지 말고 속으로 3번 생각하고 이야기해…”
“그래서 로사는 어디에 있는데?”
“신전에. 신전에 파견 나온 지 반 년… 정도 되었을걸?”
“파견? 파견을 나올 게 있나?”
“말은 파견인데… 원래 유명한 기사나 무사들이 와서 가르침을 베푸는 그런 게 있어. 그 역할로 와 있어… 사실 유배지…”
“근데… 로사가 유배를 와야 할 일이 있어? 왜 유배라고 하는 거야?”
“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너무 빠르게 강해졌어. 들리는 말로는 마스터를 바라보고 있다고 하더라.”
“와… 미쳤네… 진짜 천재는 다르구나…”
“되게 새로운 자화자찬(自畵自讚 : 스스로 칭찬한다.)이네? 로사가 천재면 넌 뭔데?”
“아니… 뭐 그래서 빨리 강해진 게 왜?”
“아. 후계자라고 하지만 아직 카시스 후작은 정정하고 후계자 자리가 공고한 건 아니거든.”
“근데?”
“근데 로사가 마스터 직전이라는 소식이 돈 거지. 원래도 로사를 지지하는 사람이 없지 않았는데, 그 소식이 전해지니까 확 떠오른거지.”
“흠… 거참 복잡하네. 그렇다 치고 둘째는 뭔데.”
“그리고 두 번짼 스승의 열등감이랄까나…”
“어?? 무슨 소리야 그건. 로사의 스승이면…”
“사탈레스님이지. 근데 가르칠게 없는 스승은 추해지기 마련이라지. 딱 그 상황에 처했어. 사탈레스님은 온실 속 화초라…”
“아무리 그래도 초인인데?”
“세세한 사항은 모르겠어. 다만 그렇게 이상적인 스승과 제자는 아니더라구. 그러니까 후작가의 후계의 수작에 이리로 밀려온 거지 로사가.”
“귀족들 참… 진짜 복잡하게 산다. 후… 그래서 대본대로 말하면 되는 거지?”
“좀! 그냥 가서 이야기하고 그래! 대본대로 할 생각하지 말고!!”
“후… 자신 없다만… 알았어. 근데 저녁에 나 나가봐야 하는데?”
“내일 가면 되잖아!! 멍청아!!! 좀!!!! 일부러 그러는 거지!!”
“조금?… 어? 야!! 아니다. 그거 아니야!! 여기 귀한 거 많다며!”
누구 성질을 닮아서 그런지 갑자기 마나가 눈에 보이게 유형화되더니 허공에 마법진을 만들어나갔다.
눈 깜짝 할 시간에 형성된 마법진은 카인도 그동안 많은 발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와… 식겁했네. 진짜 빨라졌는데? 거의 일반 마법이랑 속도가 비슷한 거 같은데?”
그 말에 금방 또 기분이 좋아져 헤실헤실 웃는 카인이었다. 점점 내가 눈치를 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치?! 아직… 다 그렇게는 못 하지만 몇몇은 비슷하게 속도를 올렸어!”
‘하긴… 쟤도 재능이 중상이니까… 거기다 그 오치소르이기도 하니까…’
종종 옆에 있어서 그런지 카인 또한 한 시대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인물이라는 것을 잊어먹고는 한다.
“크흐… 재능이 없다고 엉엉 울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카인이…”
“안… 안 울었어! 그때는 그냥… 눈에 먼지가…!!”
“응. 응 그래, 그래 먼지가 눈에도 코에도 막 들어갔구나. 그랬구나. 먼지가 많은 카인아 밥이나 먹으러 가자.”
말을 마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카인이 뭐라고 소리치는 것이 들렸지만, 듣지 않았다. 역시 카인은 놀리는 맛이 있었다.
“흐흥~ 오늘 저녁은 진짜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식당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게만 느껴졌다.
*
저녁을 먹고 카인과 이야기를 한 후에 시간을 맞추어 저녁 예배에 참가하러 갔다.
중앙 신전이 있는 이곳의 특이한 점이 있다면 매일 저녁에 예배가 드려진다는 것이다.
사실 당연한 거라고 생각 할 수 있지만, 예배를 드리는 장소가 여러 곳이라면 다른 이야기가 된다.
서품(敍品)을 받은 사제 중에서 몇 명이 각각 다른 주제와 다른 형식으로 예배가 진행된다.
심도 있는 경해(經解 : 경전을 풀이해서 강의하다.)가 이루어지는 곳도 있고 쉽고 재밌는 이야기로 진행되는 곳도 있었다.
그중에는 마틴이 주관하는 예배도 존재했다. 쉽고 재밌게 진행하는 예배로 드려졌는데, 마틴이 벌써 예배를 주관한다는 소식에 참여한 것이었다.
“와… 사람이 은근히 많네?”
은근히 넓은 장소에서 진행되는 것인지 예배당이 꽤 컸다. 그리고 이미 들어온 사람이 많이 존재했다.
“마틴이 은근히 인기가 많아. 저번에 한 번 왔었는데 진짜 잘하기는 잘해. 서른 즈음에 최연소 주교님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이야기도 있어.”
“진짜로? 주교님이라고?! 마틴이?”
“아니. 그런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는 거지.”
주교라니 상상도 못 한 이야기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주교다. 적어도 백작가의 영지가 되어야 주교님이 파견된다.
신전을 관리하는 사제님만 해도 아무리 어려도 30 전후였다. 그런데 주교님은 현재 가장 어린 주교가 47세.
그 주교님도 42살이라는 나이에 주교가 되어 엄청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30에 주교에 오를 재목(材木 :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거나 어떤 직위에 합당한 인물.)이라는 소리 자체가 대단한 것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마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얀색 사제복에 서품을 받은 띠를 두르고 있는 마틴은 다른 사람같이 느껴졌다.
‘와… 마틴… 나보다 훨씬 똑바르게 멀리 나아갔구나…’
사제로서 당당하게 예배를 주관하는 마틴의 모습은 정말 빛이 났다. 펴기만 하면 잠이 오던 성경이 재밌게 들리는 것도 신기했다.
그렇게 재밌고 쉽게 이야기하기 위해서 들였을 노력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이 되었다.
‘나보다… 훨씬 낫구나… 항상 마틴은 동생 같고 어릴 줄만 알았는데… 정작 어린 시절에 머무르는, 과거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은 나였구나…’
예배가 시작하고 끝이 날 때까지, 모든 사람의 손을 붙잡아주는 모습이 끝나기까지 단 한 순간도 마틴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헤… 어땠어?”
모든 사람이 나가고 나서 얼굴이 붉어진 채로 다가오는 마틴이었다. 여느 때처럼 수줍어하는 마틴이었지만, 전과는 달라 보였다.
“대단해… 정말 잘하더라. 진짜 대단해.”
“에이 뭘 그 정도까지야…”
“와!! 내가 대단하다고 할 때는 안 이랬으면서! 범아 마틴이 이런다~ 원래 네가 없을 때 크억….”
여전히 칸님께 수련을 받고 있는지 마틴의 주먹은 빠르고 묵직했다. 살살 친 것 같은데도 카인의 허리가 숙여졌다.
“엄살 부리지 마~ 별로 세게 치지도 않았는데, 범아! 넌 이제 가 봐야지 난 카인이랑 좀 더 이야기하고 갈게!”
“엄..엄살이 아니라… 너 진짜… 사제 맞냐….”
투닥이는 두 사람을 보니 새삼 둘이 얼마나 친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가라는 손짓을 하는 마틴을 뒤로하고 나섰다.
‘괜히… 좀 씁쓸하네…’
마틴의 비밀 장소로 향하는 동안에도 씁쓸함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예배당을 나와 작은 오솔길을 따라서 도착한 그곳.
그곳에는 허름한 사제복을 입고 있는 세르 할아버지가 텃밭을 가꾸고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드렸다.
“교황 성하를 뵙습니다.”
“허허허. 여기서는 그저 한 명의 사제이고 세르 할아버지이니 그리 관례는 필요가 없단다. 오랜만이구나.”
“예. 그간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니다. 너의 이야기는 항상 듣고 있으니. 많은 일을 겪었더구나.”
사제님들은 이상하게 함부로 하기 힘든 분위기를 자아내는 분들이었다. 그중에서도 교황 성하는 독보적이었다.
그저 허름한 사제복을 입은 할아버지(교황 성하라는 것을 모르면)일 뿐인데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가 흐른다. 툭툭 뱉는 말은 마음을 파고드는 힘이 있다.
“고민이 많은 표정이구나? 두고 가기 힘들어서 그런 것이더냐.”
그리고 이렇게 핵심을 짚는 말을 건네 실 때가 너무도 많다. 한마디 말조차 꺼내지 않았는데 심중(心中)을 어찌 그리 잘 아시는지 모르겠다.
“본래는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자신감이 없는 것도 있는 것 같고…”
가장 신비한 능력이라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느낄 수 있었다.
성하와 함께 있다 보면 가장 친한 이에게조차, 나 자신에게조차 잘 말하지 못 하는 속내를 나도 모르게 풀어내고 있다.
남아있는 문제, 상위 세계에 대한 두려움, 자신에 대한 의심 모든 것을 풀어내어 이야기를 드렸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 말씀하시는 첫 이야기는 의외의 이야기였다.
“많이 자랐구나.”
“네?”
“많이 자랐어. 참 고생했다. 본래 이곳이 화원인 것은 알고 있었느냐?”
“어… 처음보다는 꽃이 줄어든 것 같기는 해요.”
“마틴이 오면서 텃밭이 생겼지. 마틴과 함께 텃밭을 만들다 보니 어느새 화원의 반을 차지하게 되더구나.”
대중없는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화원이라니 이해할 수 없었다.
“교황이라는 이 자리는 음… 좀 불경일 수 있지만, 참 힘든 자리란다. 처음 교황이 되었을 때는 참 좋기만 했는데 말이다.”
이해 가지 않는 말들이었지만, 이 세상에 그 누가 교황 성하의 뒷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흥미가 생겨났다.
“처음 교황이 되었을 때는… 참 혈기왕성했지. 신전 내부를 단속하고, 세상에 이리저리 힘을 휘두르기도 했어.”
“세상에 악이 있다면 징치하기도 하고 잘못된 길로 가는 왕국에 경고하기도 했지.”
“하지만 말이다… 세상은 변하지 않더구나. 아니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해야 하나… 사제들조차 실수하고 잘못된 길도 가기도 하더구나.”
“허무하고 허탈했지. 왜 인간을 이리 두시나 싶기도 하고 회의감이 들기도 하더구나. 가장 힘들 때 내가 만든 장소가 이 장소란다.”
마틴의 비밀 장소가 이렇게 역사가 있는 장소라는 것은 처음 알았다. 자신이 있는 곳이 새삼 달라 보였다.
“그래서 후계를 찾았지.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 싶었거든. 그런데 말이다…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못하더구나… 더군다나 그 맑은 물이 억지로 만든 물이라면 말이다…”
항상 인자하고 편안해 보이는 성하의 표정에 처음으로 슬픔이, 회한이 서렸다. 그 표정이 너무도 애잔(애처롭고 애틋하다)하여 자신의 마음이 시려질 정도였다.
“참으로 명랑한 아이였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미소가 들게 하는…”
누군가를 회상하는 성하의 얼굴은… 너무도 슬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