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순례자의 길. 사제들이 서품(敍品: 사제나 부제를 임명하는 일)을 받을 때, 또는 자신의 선택으로 오로지 걸음으로만 걸어가는 길을 말한다.
어느 길로 갈지는 그 사제의 선택이지만 그 시작과 끝은 언제나 동일한 중앙신전이었다.
중앙신전에서 서대륙으로 나가는 길목. 그 길목을 순례자의 길이라고 불렀다. 사제 순례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는 길.
그 길에 대한 예의와 존경으로 그 주변에서는 살인도 약탈도 그 어떠한 폭력적인 행위도 금지하는 것이 불문율.
그런 순례자의 길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 야영을 하고있는 무리가 보였다.
본래 순례자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한 달간의 금욕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 음식도 과히 먹지 않고 성적 행위나 당연히 살인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길을 지나가고 있는 한 인영이 보였다. 본래의 길의 방향이 아닌 길을 가로질러서 가고 있는 이.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려는지 뛰지 않고 걸어가고 있는 이는 순례자의 길의 가장자리가 가까워 올수록 몸이 움찔움찔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가장자리에 도착해 비로소 순례자의 길을 벗어난 순간. 폭발적인 속도를 내며 야영을 하는 이들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
침묵이 흘러가고 있는 야영지에서 그 침묵을 깬 것은 데마르 님이었다. 달려오고 인영이 누군지 가장 먼저 알아챈 것.
“너!!”
반가운 마음으로 시작된 외침은 이내 경악성으로 바뀌었다.
“왜 그래!!”
“미안. 늦었다. 도중에 다시 왔다 가야 할 일이 생겨서.”
“아니!!! 왼팔이 왜!!”
데마르의 경악성은 데마르와 함께 있던 불스 용병단의 마음을 대변하는 외침이기도 했다.
왕성히 활동하는 3성 마수를 유린 할 수 있는 이.
언제나 당당하고 누구보다 강한 이.
그 강함이 너무나 강해 신전에게 관리 아닌 관리를 받는 초인 중 한 명
그러한 이가 자신들의 단장인 부발이었다. 그런데. 그렇게도 강한 이의 팔 한쪽이 사라진 상태이었다.
“도중에 싸게 값을 치르고 왔다. 몇이나 당했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고 질문하는 부발 님에게 차마 대답도 하지 못하고 놀라 있는 사이 자신이 나서서 대답했다.
“사상자 70명 중상자 12명입니다.”
“하… 이 개새끼들이… 진짜 사람을 빡치게 하는구나.”
자신의 보고에 순례자의 길을 가로지르는 동안 날카롭게 정련된 부발의 분노가 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
갑자기 찬 바람이 강하게 든 듯, 그 자리의 모든 용병이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꼈다.
“중상자는 얼마나 심해.”
“1명은 위태롭고 11명은 적어도 4일 이상은 치료에 집중해야 합니다.”
“후… 아마 내일쯤이면 씨어가 포션을 들고 올 거야. 걸을 수 있게 되면 바로 출발하자.”
“하지만…”
“하지만이고 저지만이고. 필요 없어졌어. 이제는 전력으로 간다. 이번을 마지막으로 나도 단장 노릇이나 제대로 해야지.”
태연히 말하는 부발 님이었지만, 누구도 태연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지금 상황이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누구라도 먼저 나서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물어보고 싶었지만, 금세 자신의 팔을 가리는 부발 님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다.
“일단 정리하고 애들 재우고 오늘 보초는 다 불스 용병단에서 서게 해. 범이랑 데마르는 따로 보자.”
발걸음이 떠나지 않는다는 듯이 밍기적거리며 나서지 않는 이들에게 부발 님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내 말을 못 들었나?”
평소의 희희낙락(喜喜樂樂: 매우 기뻐하고 즐거워함)한 부발 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이 마수 사냥에 언제나 최선두에 있던 그의 참모습이었다.
그 기세에 절로 각이 잡혀 뛰어가는 이들을 보며 혀를 차다가 여전히 설명을 갈구하는 데마르 님의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오는 부발 님이었다.
“후… 진짜. 끝까지 잘 들어야 해. 중간에 자르지 말고.”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부발 님의 왼팔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데마르 님에게 부발 님이 설명을 시작했다.
*
호트가 철벽이었다면 부발은 모든 것을 부수는 파괴자였다. 클레이모어 중에서도 큰 클레이모어를 들고 모든 것을 파괴하는 부발에게는 막힘이 없었다.
황폐한 대지가 더욱 황폐해지고 온갖 상처가 드러난 대지는 고작해야 인간 두 명이 벌인 전투의 결과로 보이지 않았다.
“후… 후… 그래도 왼팔 하난 가져갔으니 나쁘지는 않군.”
“하! 괴물 같은 영감태기 같으니라고. 그래서 왜 그런 거요.”
부발은 왼팔이 짓이겨져 어깨 밑으로는 너덜너덜해진 상태였고 그 상대인 호트는 양팔이 잘려나가고 다리 하나는 기이하게 꺾여있었다.
“데스투도 백작이… 내 아들의 명줄을 쥐고 있어. 서약서로 강제한 거라… 뭐 어쩌겠나.”
“하! 그럼 신전에 말이라도 하지 그러셨수! 아님 우리한테 도움을 청하던가!!”
“하하…쿨럭… 자네한테는 미안하이. 하지만 그 이상으로 폐를 끼칠 순 없지 않겠나. 그리고 신전은, 이미 내 아들에게 베풀 은혜가 없음을 선언했다네…”
“니미럴… 데스투도 백작이라고 하셨지요…”
귀화가 피어오르는 듯, 부발의 눈에는 분노가 그만큼 차올랐다.
“쿨럭. 그래도 나쁘지 않은 인생이었어. 초인이 될 줄도 몰랐지. 어땠나?”
그 물음에 귀화가 피어오르는 눈 사이로 한 줄기 따스함이 차오른다.
“뭐. 영감태기 조금만 더 빨리 초인이 되었다면, 박빙?”
“쿨…럭…쿨럭… 허. 허! 쿨럭…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아들! 아들을 부탁하네!”
그렇게 아들을 부탁할 때 또렷한 음성으로 말하고 나서 호트는 이내 숨을 멈추었다.
“씨발… 그 노무 아들 새끼는 내가 꼭 사람으로 만들어줄게요.”
말을 마치고 부발은 숨을 멈춘 호트를 어깨에 들고 수호성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 부발의 눈에는 피와 눈물이 섞이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
부발 님의 설명이 끝나자, 데마르 님의 눈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분노가 차오르다 못해 핏줄이 터지기 시작했다.
사건을 이렇게 키운 것에 대한 분노, 자신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 모두를 넘어선 데스투도 백작에 대한 분노였다.
“그래서 말인데. 그냥 전력으로 가자. 전략이고 전술이고 뭐고 없이. 힘으로. 예전처럼.”
“후. 그래. 힘으로 가자. 이것 저것 잴 게 뭐가 있겠어.”
“그래서 범아. 네가 제일 중요하다.”
“저요?”
데스투도 백작에 대한 분노로 어떻게 해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는 차에 갑작스러운 부발 님의 말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전투에서. 너는 빠져 줘. 너랑 너희 소대원 모두. 후방에서 새끼 불스들을 봐 줄 사람이 필요해.”
“하. 하지만.”
“나를 제외하고 가장 강한 사람이 너다. 그래서 부탁하는 거다.”
부발 님의 진심 어린 부탁이었지만 정말 듣고 싶지 않은 부탁이기도 했다. 데스투도 백작을 향해 도를 들고 싶은 마음이 강했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결국 선택은 정해져 있었다. 새끼 불스들과는 접점이 별로 없다지만, 용병대가 마음껏 날뛰기 위해서는 누군가 후방을 지키는 게 맞았기 때문.
“후우. 알겠습니다.”
“고맙다.”
부발 님에게 부탁을 받은 것을 소대원들에게 말을 해 주기 위해서 나가는 자신과 다르게 정리를 마친 불스 용병단의 간부들이 부발 님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들만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들을 뒤로하고 자신의 소대원들이 자리를 만들어 놓은 곳에 도착했다. 한쪽에 만들어 놓은 야영지에 도착하자 소대원들의 설명을 갈구하는 눈빛이 쏟아졌다.
“후… 조금 가까이 와서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 같다.”
자신의 말에 작은 원을 그리며 소대원들이 모여들었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
쉽게 잠이 들 수 없는 밤이었다. 마르쿠스와 함께 불침번을 서고 있는 와중 문득 전생이 떠올랐다,
평온해 보이는 대륙이었지만, 실상은 끊이지 않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서대륙 전체를 휘감는 전운(戰雲: 전쟁이 일어나려는 험악한 형세)은 없었지만 남쪽으로는 시디야 왕국 그리고 동쪽으로는 해적과의 전투는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그렇기에 전장에는 언제나 용병이 필요했고 자신은 수많은 전쟁 용병 중 하나였다.
용병단으로 전장의 판도를 쥐는 이들도 있는 반면에 자신은 그저 전장에 참여하는 하나의 칼에 불과했다.
하나의 칼에 불과했음에도 자신조차 다양한 전략과 모략을 수행했었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달랐다.
전술은 있을지언정 전략과 모략은 없었다. 순수한 힘과 힘의 대결만이 있을 뿐이었다.
“힘만으로는 부족한 걸까?”
나직한 읊조림에 대답이 들려왔다.
“네?”
“아. 아니. 생각보다 피해가 많은 것 같아서. 힘 대 힘으로 부딪히면 압승인데 작은 모략에 이렇게 당했으니까.”
“수호용병에 대한 말씀이십니까?”
“그것도 있지만, 난 힘이 있으면 당하고 살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조금 결이 다른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상대가 이렇게까지 나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기에 당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럴까…”
“과거에는 수호용병이 이런 복수를 행하러 나올 때는 암묵적으로 힘 대 힘으로만 대항했다고 합니다. 개인적인 복수는 공표하고 다니지 않았구요.”
“그런데. 우리는 너무 당당했다?”
“당당했다기보다, 공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공표한 이유도 최대한 피해를 줄이고자 했던 것이니까요. 저희도 상대도.”
“그래도. 조금은 씁쓸하네.”
“하! 꼬맹이. 이상한 생각이나 하고 있었구만.”
어느새 다가온 것인지 단장이 옆으로 와서 자신에게 한소리 했다.
“단장님…”
“꼬맹이. 마스터가 되니까 갑자기 대륙에서 강자가 된 것 같으냐?”
“그건 아니지만…”
“물론 내가 키운 불스 용병단이 강하기는 하지. 그러니까 슐랑거 가문을 그렇게 피해 없이 박살 냈지.”
“하지만…”
“그래. 협곡에서는 꽤 많은 사상자가 일어났지. 그런데 꼬맹아 용병 일이 원래 그래. 목숨을 걸고 하는 거라고.”
“…”
수긍이 가는 말이기는 했지만, 무언가 목에 걸려 나오지 않는 말이 있었다. 그래도 불스 용병단은 그저 그런 용병단이 아닌 수호 용병단이지 않은가.
“꼬맹아. 이름에 취하는 순간 용병은 훅 가는 거야. 그리고 우리 용병단이기에 협곡에서 전멸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거고.”
무언가 알 것 같지마는 여전히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데스투도 백자가를 만만하게 본 내 잘못이지. 사실 그런 모략은 생각도 못 했고, 아마 이번 일로 꽤 많은 게 변할 거다.”
“후… 단장님은 답답하지 않으세요?”
“뭐… 나야 마수를 사냥할 때는 그런 제한들이 없으니 괜찮기는 했지. 근데 이번 일이 있어서 깨달은 건데. 확실히 제한이 필요하긴 한 것 같더구나.”
“네?”
“아니. 나도 초인이랑 이렇게 전력으로 싸워 본 건 처음인데. 만약에 초인에 대한 제한이 없었으면 왕국은 존재하지도 못하겠더라고.”
“네???”
점점 더 이해 가지 않는 말이었다.
“뭐… 꼬맹이 너가 특이한 케이스긴 하다만. 내일 보면 알게 될 거다. 제한이 없는 초인이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난데없는 부발 님의 당당함에 당황스러운 범이었다.
“그러니까 뭐 힘이 어쩌고 이런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모략도 힘이고 우리는 약점을 찔렸을 뿐이니까.”
그 말에 잡히지 않던 무엇인가가 윤곽을 드러내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초인을 동원한 수완, 듣도 보도 못한 환영진, 거기에 눈 돌아간 또라이들에 궁사와 마법사. 그 정도임에도 살아난 것은 그만큼 힘이 있기에 그런 것이다.”
“아!”
“하! 기가 차는 꼬맹이 같으니라고. 단장을 불침번을 세우는 꼬맹이가 여기 있네. 마르쿠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범의 뒤에서 범을 지키듯이 서있는 마르쿠스였다. 그리고 두 시간이 지나자 감겨있던 범의 눈이 떠졌다.
“감사합니다.”
“하. 아니. 내가 한 말 중에 뭐 깨달을 건덕지나 있었냐? 어이가 없네.”
“뭐. 힘이라고 해서 무식하게 힘만 생각하던 거랑, 모략이나 다른 재능을 천시하던 이런 거랑 좀 깨지니까 눈이 넓어지긴 하네요.”
“하. 재수 없는 꼬맹이. 이래서 천재들이란 것들은 정말. 쯧.”
“데마르 님이 종종 하시던 말씀인데요. 그건? 무식하기 그지없는데 쓸데없이 강해지는 데는 도가 튼 무책임한 어떤 분에게”
“쯧. 간다! 너네도 이만 교환하고 자러 들어가.”
휘적거리며 돌아가는 부발 님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 마르쿠스의 축하를 받으며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
날이 밝아오고 해가 환해지기 시작할 무렵 씨어가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