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거대한 대전. 어쩌면 크기로는 대륙을 통틀어 가장 웅장할지도 모르는 건물의 중심.
그곳에 고뇌에 빠진 자와 시름에 빠진 자가 함께하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자 중 하나. 라이언의 이름을 잇는 자. 바로 라이언 26세와 궁내부 대신이었다.
“어찌 하는 게 좋을 것 같소?”
“우선은 지켜보심이 좋을 것 같습니다. 슐랑거 가문이 나섰으니 그 후에 대비하셔도 될 듯합니다.”
“하. 하필이면. 이제 정리가 되고 안정을 찾으려는데, 쯧. 지금 뭐 하고 있소?”
“나름 방안을 찾으시는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시오. 아무것도! 하…. 최상위 재능이라 좋아했거늘… 하필!”
잘난 아들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그런 아들. 핏줄만 잘 타고난 것이 아닌 재능도 빼어난 아들이었다.
최상위재능을 가졌다 했을 때 왕위를 선양 받았을 때 만큼이나 좋았다. 그런데… 하필 그런 아들이 왕위를 물려받지 못하게 생겼다.
세상의 정점. 그중 하나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자신에게도 지켜야 할 선이 있었다.
정말 얇고도 몇 없는 그런 선이기에, 그것만 지킨다면 자신은 거칠 것이 없는 절대자였다.
그런 자리를 물려받을 자식이었다. 그것도 장자로 태어나 아무런 분란조차 일어나지 않게 해준 귀한 자식이었다.
마도에만 빼어난 것이 아니라 제법 제왕학에도 빼어난 성취를 보였다. 한데, 결국 죽은 지식이었을 뿐인지 하필 선을 건드리고 말았다.
자신조차 건드리지 못하는, 아니 건드리면 안 되는 선을 건드려버렸다.
솔직히 서대륙과 동대륙 그리고 중앙의 자유섬을 통틀어서 자신이 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 다만 2가지 선만은 지켜야 했다.
첫째로는 신전에 대한 선이었다. 감히 신전을 손대는 것은 금기를 넘어선 무언가였다.
그리고 그 신전보다 어쩌면 더 중요한 존재들이 수호용병들이었다. 사명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이들이었다.
가끔 멍청한 신흥 귀족들이나 망나니로 자란 귀족 자식들이 멋도 모르고 수호용병을 건드렸다가 가문이 지워진 적이 허다했다.
귀족들이 아니 백성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수호용병은 고결한 존재였고 귀한 이들이었다.
다만, 세월이 너무 흘러 그들의 뿌리를 기억하는 이들이 너무 적어젔을 따름일 뿐이었다.
“하… 그래서 슐랑거 백작가는 진정으로 전쟁을 하겠다고…?”
“예. 감히 귀족과 같이 서려는 천한 용병을 단죄하겠다며…”
“미친 거지…아니 그나저나 단장은 어떻게 해결 하려고 그런데? 초인인데… 누구 초인이 또 있나?”
감히 큰 소리로 말하기조차 어려웠는지 자신이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만큼 다가가 조용히 속삭이는 궁내부 대신이었다.
“미친. 그냥 이번 기회에 사라지는 게 낫겠네. 수습할 준비하고, 절대. 절대로 우리는 관여하지 않는다. 왕명이다.”
“전하. 수호용병이 그리도 중요한 존재들입니까?”
“하. 수호용병이 그리도 중요하냐니. 시간이 진실로 너무 많은 것을 잊게 했나 보군. 그들의 뿌리는 우리, 아니…”
*
슐랑거 가문이 기사대전을 요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수호성은 들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용병 사무소와 신전이 있었다.
용병 사무소의 가장 높은 층. 그곳에 수호성의 주교님와 수호성의 시장님이 모두 함께 모여 있었다.
데마르나 씨어가 아닌 자신이 왜 이 자리에 있는지조차 얼떨떨할 지경인 범이었다.
“주교님.”
주교님에게 공손히 인사를 한 부발 님은 원탁의 자리 하나에 앉았다. 그리고 그 뒤에 범이 시립해 있었다. 부발 님이 자리에 앉아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주교님이었다.
“하. 세월이란. 참 무섭군요.”
“세월이 무서운 게 아니라, 인간이 멍청한 거지. 조그만 권력을 쥐었다 싶으면 세상이 자신들의 것인 줄 아니까.”
대뜸 반말을 내뱉는 부발 님의 모습에 순간 자신의 단장이 미친 게 아닌가 싶었던 범이었다. 그런 단장님의 반말은 끊이지 않았다.
“어차피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알 거 아는 사인데, 제발 존대 이런 거 하지 말자. 어차피 누가 듣는다고.”
“단장님 뒤에 서 계신 분은 사람이 아닙니까?”
정중하고 예의 바른 말이었지만 자신의 모든 화를 꾹꾹 눌러 참는 다는 것을 누가 봐도 알 수 있게 말하는 이는 용병 사무소의 소장님이었다.
“너. 그렇게 참으니까 머리도 빠지고, 경지도 안 오르는 거야. 쯧쯧. 얜 어차피 이번에 끝나고 정리하고 당장은 아니지만 결국에는 올라가니까 괜찮아.”
부발 님의 말에 실내에 있던 모든 사람이 놀랐다.
‘단장님께서? 이렇게 가볍게 말을 하실 분이 아닌데? 도대체…’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있는 자신을 제외하고 다른 이들은 모두 갈피를 잡았는지 갑자기 방 분위기가 변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진중하고 무거웠던 자리가 지금은 수호성에 존재하는 흔하디, 흔한 주점에 모인 친구들의 분위기로 바뀌었다.
“하. 넌 그래도 용병이니까 얼마나 좋냐. 내가 씨발. 주교하기 싫다고 그냥 고위 사제로 만족한다고. 그렇게 노래를 불렀는데.”
어딘가 불량함이 가득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정말 방금 전까지 자애로웠던 주교님이 맞는지.
“내가. 경지랑 머리로 시비 걸지 말랬지? 수호용병단 단장 주제에 지금 사무소장한테 개기는 거냐?”
언제나 냉정하고 칼 같은 일 처리로 그 누구도 쉽게 다가가지 못했던 사무소장은 마치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하는 떼쟁이 삼촌과도 같아졌고
“그래도. 전. 시장인데… 항상 막내잖아요…”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은 채 언제나 합리만을 중요시하던 시장은 매일 갈굼만 당하는 막내가 되어버렸다.
“단. 단장님?”
“아. 이해해. 다들 어릴 때 같이 쓰레기통을 구르던 사이라. 우리가 지금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도 못했지. 떼쟁이가 사무소장이 되고 찡찡이가 시장이 되고 껄렁이가 주교님이라니 맨 욕을 달던 놈이 참.”
“넌! 무식쟁이 주제에 어떻게 초인이 되어가지고 수호용병단까지 기어 올라갈 줄 알았냐! 데마르만 아니였음 넌 망했어.”
“그러니까 잘 데리고 있자나. 안빠트리고.”
“내가 진짜. 엄니만 아니었음. 확!”
그런 적응하지 못할 것 같던 분위기가 점차 눈에 익어갈 무렵 본래 주제가 나왔다. 그 시작은 대머리. 아니, 용병 사무소장이었다.
‘툭’
신경질적으로 던져진 종이에는 슐랑거 백작가의 인장이 찍혀져 있었다.
“내가. 이걸 받고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를 거다. 진짜 전쟁을 하자고 나서는 가문이 있다니.”
“슐랑거 가문이면, 뭐 그럴 만도 하지 귀족이 된 지 200년 정도 됐나? 거기에 지금처럼 중심에 오른지는 더 얼마 안 됐고.”
“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왜 하필 내가 주교일 때. 귀찮게. 이 지렁이 새끼들이”
오가는 대화는 분위기에 적응한 자신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대화였다.
‘귀족이. 그것도 백작가가 이렇게 가볍게 말할 수 있는 곳인가?’
“뭐. 우리도 몰랐으니까. 자리가 자리인지라 알게 된 것일 뿐이지. 게다가 엄니가 아니었으면 몰랐을걸?”
“그래서 어떻게 해. 다 죽여도 되는 거야?”
조용히 말을 듣고 있던 부발 님이 소름 끼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냈다.
“아니. 그래도 뭘 다 죽이기 까지 하려고 하냐”
“먼저 칼을 그것도 암살을 시도 한 것도 그쪽. 전쟁을 하자고 말을 꺼낸 것도 그쪽. 다 죽이면 안 될 이유라도?”
“후. 부발아.”
“애초에 날 여기에 부른 것도. 너네만 나온 것도 적당히 하라고 부탁하려는 건 알겠는데. 너무 큰 걸 바라진 말자.”
“엄니를”
“어머니 얘기는 꺼내지도 말고. 진짜 확!”
부발 님의 말에 용병 사무소장님도 시장님도 주교님도 찔리는 것이 있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색한 적막에 말을 꺼낸 건 주교님이었다.
“슐랑거 직계까지는. 너무 무리냐”
“응. 안 돼. 슐랑거 백작가의 피가 섞인 이들은 절대 타협의 대상이 아니야.”
“그럼”
“그 휘하 가문도 안 돼. 기사단원들은 직계까지만으로 해줄 수는 있어.”
“휘하 가문이면 무려 남작가가 둘이야!”
“그럼. 아예 다 싸그리 묻어?”
단호하고 고집 어린 말투에 머리를 부여잡은 셋이었다. 어떻게든 설득을 시켜야 하는데 들어가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치열하게 단호한 옹고집을 뚫기 위해서 온갖 제안이 오고 간 후에야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럼. 슐랑거 백작가, 휘하 남작가 두 개 그리고 기사단장의 직계. 이렇게 하자.”
“기사단원이다. 하. 진짜. 씰이 안 죽은 걸 다행으로 생각해. 아니였음 이렇게 쉽게 안 갔어.”
“알아. 알아. 그리고 이왕 하는 거 수호용병이 어떤 존재인지 좀 잘 알려주고 와.”
온갖 설전이 끝나고 나자 세 사람의 얼굴은 피곤함이 가득 묻어났다. 그렇게 치열한 설전이 끝나고 본부로 돌아가는 길.
“단장님. 저는 왜?”
“넌 왜 데리고 갔냐고?”
“네”
“초인이라는 자리가 참 그런 게. 이런 전쟁에 나서기가 쉽지 않아. 그런데 내가 있는데도 전쟁을 하자고 한다? 뭔가 날 옭아맬 카드가 있다는 거지.”
“그런데요?”
“넌 아직 초인은 아니지만, 마스터에는 올랐잖냐. 사람들 눈에는 거기서 거기로 보이겠지. 그래서 말 해 둔 거야.”
“네???”
“네가 마음껏 전장을 날뛰어도 되는 명분을 만들어 놓은 거라고. 미리 말해 주는 거지.”
“아! 역시…”
“그치? 내가 좀 대단하지?! 초인의 자리가 이렇게 무겁고 대단하다!”
“데마르 님은 역시! 대단한 거 같아요!”
자신의 감탄사에 한껏 올라가려던 어깨가 못 올라가고 다시 내려오는 부발 님이었다.
“티 났냐”
“데마르 님은 역시 저희 용병단의 두뇌. 심장!”
“아니”
그렇게 열심히 단장님이 아닌 데마르 님을 찬양하면서 걸어갈 수록. 단장님의 내려가는 어깨를 구경하는 것은 역시나 즐거웠다.
*
부발 님과 헤어지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량의 방으로 찾아갔다.
“량아!”
“뭐가 궁금한데 또?”
“헤헤헤. 그게 아니라. 수호용병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좀 알려 주라. 귀족보다 대단한 거야?”
“하. 아니. 하기사 이제는 아는 사람이 없기는 하겠네.”
“역시 량이!”
“음. 어차피 길게 이야기하면 너무 길어지니까. 간단하게 말하면 수호용병의 뿌리가 귀족들보다 더 깊고 굵어.”
“어. 너무 간단해…”
“혈통으로 보면 수호성에서 태어난 이들이 더 고귀한 혈통이다 이거지. 거기에 이유가 어찌 되었건 사명을 위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니까.”
“조금만 더.”
“애초에 수호성이 처음 세워졌을 때 있던 이들이 지금의 왕가들 공작가들의 선조라 혈통이 더 귀한 거고 수호산맥을 방어하는 사명을 띄고 있으니 신전에 반 정도는 속한 이들이라는 거지.”
“더 모르겠는데?”
“하. 후. 하.”
이내 방에 있던 칠판을 가지고 와서 세세하게 설명해 주는 량이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수호용병이 더 강하다 이거 아니야?”
“하. 아니! 내가 지금껏 설명한 거는 어디에 팔아먹고!”
그렇게 출전 전날을 수호용병에 대해서, 역사 공부를 하느라 량이에게 잡혀서 있었다.
‘잘못 찾아왔나? 엄청 어렵다. 뭐가 이렇게 깊고 복잡하냐.’
*
해가 밝아 오고 수호성에 비치는 어느 때와 다르지 않은 아침이 밝아 왔지만 수호성의 분위기가 달랐다.
북문 그 가장 경계에 있는 불스용병단의 저택. 그 앞에 완전 무장을 한 불스용병단과 산하 용병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자. 들어라”
대뜸 자신에게 건네주는 것을 받아 들었다.
“네가 우리 기수다.”
불스용병단을 상징하는 깃대를 자신이 들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내 기쁜 마음으로 받아 들었다.
그리고 정문 앞에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이가 있었다. 새하얀 로브를 깊게 눌러쓰고 심지어 가면까지 쓴 이가 신전의 깃발을 들고 서있었다.
부발 님의 왼쪽으로 자신이 자리하고 오른쪽으로 신전에서 나온 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는 신전에 수호용병의 외유를 정식으로 인정한다는 의미로 전쟁을 허락받았다는 뜻이었다.
“간다.”
군기(軍氣)가 느껴지는 행렬이었다. 고작 300도 안 되는 인원들이 군기를 내뿜는 것이 웃기는 이야기일 수 있지만 이들의 군기는 진짜였다.
저택을 나오자 기수인 자신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온 거리를 뒤덮고 있는 인파였다.
마치 수호성의 전 인원이 참여한 것만 같은 엄숙하고도 거대한 환송식이었다. 어리둥절한 자신에게 부발 님이 설명을 해주었다.
설령 수호용병이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수호성에 나고 자란 이들은 자부심이 있었다. 수호산맥을 방어하는 최전선에 이바지한다는 그 자부심.
남들에게는 세월에 잊힌 그들의 명예를 그들은 결코 잊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받는 환송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울림을 가져다주었다.
불스용병단은 수호성의 환송식을 어깨에 얹고 그들이 누구인지. 어떤 존재들인지 다시금 세상에 알려주고자 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