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그레누이에서 나온 모든 물품을 그저 아공간에 쑤셔 넣고 씰을 안아 들었다. 여전히 따스한 씰은 아공간에 넣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씰을 안아 들고 스승님과 함께 돌아가는 길은 고요했다. 말없이 자신을 위로해주는 스승님이 계셨기에 요동하는 감정을 수습할 수 있었다.
내리 이틀을 쉬지 않고 달려왔다. 한 켠에 씰을 뉘어 두고 그제야 쉬도록 자리를 잡았다.
“감사합니다.”
“이제 조금 괜찮아졌느냐?. 고생했다.”
“아직도. 아직도. 아직도 씰이 따스해요.”
“그래. 네가 최선을 다했다는 걸 씰도 알아줄 거다.”
스승님의 말에 그동안의 피로가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세상이 어두워졌다.
쓰러져서 잠을 청하는 제자를 보는 라니우스의 심정은 안타까움뿐이었다. 말년에 겨우 얻은 제자였다. 자신의 상상 이상의 성장을 보여주는 제자.
자신이 해준 것이라고는 [바람의 탑]을 주고 길을 잡아 준 것 뿐이었다. 그것만으로 제자는 알아서 성장했다. 제자라고 부를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저 허리를 펴는 법을 알려줬더니 알아서 걷고 뛰던 기특한 제자였다. 쓰러져 자는 제자의 머리를 쓰다듬는 라니우스.
“제자야. 걱정하지 말아라. 네가 하는 복수에 다른 곁가지들이 절대 개입하지 못하게 해주마. 온전히 모든 복수를 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 도와주마.”
겨우 쓰러져서 잠에 든 제자의 모습을 보며 밤새 머리를 쓰다듬으며 밤을 지새우는 라니우스의 모습은 애잔했고 확신에 차 보였다.
*
눈앞에 훈련소가 보인다. 업고 있는 씰의 무게가 느껴진다. 점점 자신의 집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지 씰의 무게가 가볍게 느껴졌다.
자신이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는지 훈련소의 정문 앞에는 3대대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모여 있었다.
정렬하여 서 있는 용병들의 모습은 경건해 보였다. 자신들의 가족을 다시 맞는 이들의 모습은 사뭇 열기가 넘쳤다.
“우-우! 우-우!”
발 구름 소리와 함께 이들의 구호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고 이내 정렬된 이들을 지나가기 시작하자 더 소리가 커졌다.
그리고 맨 앞 중앙에 서 있는 부발의 앞에 당도하자, 그 앞에 있는 나무로 만들어진 단에 씰을 올려놓았다.
“고생했다. 고맙다.”
단장님의 옆으로 가서 서자 발 구름 소리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잠깐!”
단장님의 입이 열리려는 순간 그를 가로막는 소리가 있었다. 량이 뛰어나오더니 잠깐을 외치며 씰에게 다가가 여기저기 손을 대보기 시작했다.
“량!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자린데! 감히 함부로 나서는 것이냐!”
열기로 가득하던 사열식에 난데없이 끼어든 량이를 향해서 자신조차 처음 보는 화난 얼굴의 부발 님이었다.
자신조차 지금 량이의 행동에 열이 받는데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열식에 있던 열기가 분기로 바뀌는 데는 순식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량은 꿋꿋이 씰의 주변을 돌아다니며 이곳저곳 만져 보고 있었다. 더는 참지 못하고 량이에게 한소리 하려는 찰나.
“씰… 아직 안 죽었는데요?”
“?!?!”
“!?!?!?”
“무슨 헛소리야!!!”
열 받아서 소리치긴 했지만, 한구석 기대가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기대가 스러질까 두려운 마음이 더 컸다.
“범이 너 씰 데리고 올 때 씰이 차갑지 않았지?”
“어? 아니 그렇긴 한데.”
“혹시나 해서 그레누이에 대해서 알아봤는데 역시나. 아직 그렇게 오래되지도 않았고, 그레누이가 사라질 때 씰 말고도 이것저것 많았지?”
아직 말하지도 않은 사실을 이미 본 것처럼 확신하며 묻는 량이의 태도에 일말의 기대감이 자라기 시작했다.
“어. 갑옷들이랑 검이랑 뼈랑 이것저것?”
“흠. 지금 상황에서는 한 5할 정도? 사제님이 계시면 8할. 지금 씰은 죽은 게 아니라 가사(假死) 상태야.”
량이의 말이 이어질수록 분기로 변한 열기가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실상 3소대원 중에서 가장 오래 수호용병단에 소속되어 있었던 이가 씰이었다.
무려 9년. 수습으로 시작해서 씨어의 관리하에 들어가고 정식 용병이 되어서 3소대원이 된 만큼 모든 이들이 씰을 아꼈다.
그랬던 아이가 싸늘한 시체로 돌아오자 ‘겁도 없이 우리 용병단에 칼을 들이댄’의 분노에서 ‘우리 용병단의 피를 흘리게 한’ 원수로 분노가 커진 상황이었다.
그런데 싸늘한 시체인 줄 알았던 씰이 살아날 일말의 가망이 있다고 말하는 량이의 말에 모두가 당황했다.
“조금 더 설명을 해 보거라.”
격정에 어린 씨어가 온 힘을 다해서 인내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정도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가사 상태. 말 그대로 죽은 듯한 상태라는 거지 죽은 상태는 아닌 거라는 거죠. 그레누이가 동면을 위해서 배에 음식물을 저장하는데.”
설명이 길어지는 듯한 모습에 다들 안달을 못 하는 모습에 량이는 설명을 간단하게 바꾸기로 하였다.
“쉽게 말해서 음식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죽이지 않고 죽은 듯한 상태로 만들고 계속 두었기 때문에 완전히 죽은 게 아니라는 거죠.”
“살아날 가망이 있다는 건?”
“아. 그건 연금술사가 있다면 가능해요. 가사 상태를 만드는 것 또한 연금술사의 하나 연구 분야이기도 하니까요. 사제님이 계시면 더 확률이 높아지는 거구요.”
“사제는 어느 정도의 사제가 필요한 거냐.”
“적어도 정식으로 서품을 받은 사제는 되어야 해요.”
“씨어. 들었지? 최대한 빠르게 다녀와.”
그 말에 뛰쳐나가는 씨어였다. 누구보다 씰을 오래 가르쳤기에 씰을 생각하는 마음이 누구보다 강했던 그였다.
“더 필요한 것은 없느냐?”
“본부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이래저래 필요한 게 있어서. 범아. 내가 줬던 포션은 얼마나 남았어?”
그 말에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아공간을 열어서 량이에게 받은 포션들을 모두 꺼냈다.
“하. 아공간은 또 언제? 그 정도면 충분하겠다. 하루면 되니까. 일단 씰을 데리고 와줘.”
내려놓은 포션을 들고 가는 량이의 뒤를 따라서 씰을 한결 더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 뒤따라갔다.
훈련 본부의 건물로 량이와 범이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한 남은 이들이었다. 그 뒤로 라니우스마저 사라지자 부발이 입을 열었다.
“불스 수호용병단에 감히 칼을 들이민 것들이 있다. 아무리 범을 노렸다고 해도 범이 우리 용병단인 이상 우리를 건든 것이다.”
부발의 말이 시작되자 허둥대던 기세가 단숨에 하나의 칼날 같은 기세가 되기 시작했다.
“막내가 끝내 씰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리고 임시로나마 와있는 량이 덕분에 살아날 희망이라도 생겼다.”
칼날 같은 기세 속에서 안도와 기쁨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막내에게, 량이에게 모든 것을 짐을 지우려 함인가? 우리가 그 정도밖에 안되나?”
그 말에 안도와 기쁨이 사라지고 다시 칼날 같은 기세와 함께 열기가, 분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왕가가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우리는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불스 수호용병단이다. 감히 우리에게 칼을 뽑아 든 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알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나!!”
““그렇습니다!””
“우리의 피 한 방울은!”
““남의 생명!””
“우리 가족의 생명은!”
““그 가족의 몰살!””
“정식으로 불스용병단의 복수를 천명하고 시작하자.”
““우-우! 우-우!””
“준비하라!”
““우-우! 우-우!””
*
밖의 열기를 뒤로하고 량이를 따라 들어온 방. 량이의 말에 따라서 욕조를 만들고 그 안에 포션과 물을 부어 넣었다.
“이러면 돼?”
“응. 비율도 맞고 응 응. 그리고 그 안에 씰을 집어넣어”
어떤 방법을 썼는지 모르지만 량이 만든 욕조 통 안의 희석된 포션의 색은 분홍색이었다.
씰을 조심스럽게 안아 들어서 욕조 속으로 천천히 집어넣었다.
“범아! 머리는 집어넣으면 안 돼!”
량의 외침에 머리까지 깊이 집어넣으려는 것을 그만두고 머리통을 빼놓은 채로 전신이 욕조에 담긴 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만으로 되는 거야? 지금 씰이 가사? 상태에 있다는 거지? 그게 어떻게 가능해? 몇 달이 넘어가는 데도 가능하다고?”
“음. 가사 상태가 뭔지는 대충 알지?”
“죽은 척하는 거 아니야?”
“아냐, 아냐 그보다는 조금 더. 심장이 뛰지 않고 동공도 풀리는데 아직 살아날 가망이 있는 상태를 가사 상태라 그래.”
“그게 가능해?!”
“그냥 일반 사람도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나는 경우가 있잖아? 그런 상황이라고 보면 돼”
“근데. 이렇게 오래 지났는데?”
“우선 너가 씰을 씻기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가설이긴 한데, 그레누이 같이 동면을 취하는 마수들이 종종 있잖아?”
“응.”
“동면을 취하는 명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동면을 취하는 동안 필요한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 천천히 소화를 시킨단 말이지?”
“그래서?”
“그래서 동면 전에 사람, 몬스터 등의 생물을 배에 쟁여 놓고 에너지를 취하는 거로 조사가 되어 있어. 최대한 천천히 죽게 하는 거지.”
“그거랑 가사 상태랑 무슨 상관이야?”
“마수는 가장 필요한 에너지가 부정적인 에너지란 말이지. 주로 절망 비통 원한 이런 거. 배에 집어 넣은 동안 가사 상태로 만들어서 끊임없이 절망감을 빨아들이고 더는 빨아들일 절망이 없을 때 진짜로 죽여서 소화 시켜 먹는 거야.”
“어엄. 그러니까 씰의 절망감을 먹으려고 살려 두기는 하는데 그걸 가사 상태에서 진행한다는 거네?”
“응. 대충 그런 거지. 그래서 일어났을 때 어떨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그래도 살아날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니까.”
“후.”
“그래도 이만큼 버틴 건 씰도 살아날 의지가 그만큼 확고하다는 거니까. 잘 일어날 수 있을 거야.”
“후 고마워, 고마워”
“에이~ 아직 일어난 것도 아닌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사제님이 도착하면 한 2일 정도?”
“알았어.”
“그나저나. 이번에는 진짜 사건이 커질 것 같은데?”
“왜? 우리가 복수하는 것 때문에?”
“그것도 그렇지만, 애초에 시발점이 왕궁의 명령이라는 것 때문이지. 왕도 아마 곤란해질걸? 왕궁의 명령이 사실은 용병단을 노린 거라면. 진짜 큰 사건이 되는 거지”
“그런 건 모르겠지만, 누군지 모르겠지만 진짜 끝까지 갈 거야 이번에.”
“그나저나! 너! 어떻게 할 거야?”
“하. 카인도 안 물어봤는데 넌 어떻게 금방 아냐”
“난 천재니까?”
“하하하하하하 맞아. 넌 천재지. 올라갈 거야 난.”
“역시… 그렇구나… 쳇… 아쉽네.”
“그런데 지금 당장은 아니야. 혹시 못 올라가더라도 끝을 보려고. 이제 나도 책임져야 할 일이 생겼으니까. 넌 올라갈 생각 없고?”
“나? 있지! 근데 난 천천히 올라가려고. 너랑 같은 세계로 간다는 보장도 없고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데 끝은 보고 가야지.”
“후. 일단은 비밀로 해 줘. 나중에 내가 직접 애들한테 말하게.”
“알았어. 애들이 꽤 많이 좋아하겠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다들 은근히 걱정하고 있을 텐데.”
“나도 너희 덕에 많이 성장했으니까. 항상 고마워. 씰을 잘 부탁해.”
씰을 뒤로하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방에 도착하자 침대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역시! 다녀갔구나.”
자신이 나가 있는 동안 카인이 다녀갔다는 듯이 침대 밑에는 얇은 책과 함께 카인의 편지가 남겨져 있었다.
-범아! 잘 다녀왔지? 난 대충 윤곽이 나와서 우선 너한테 먼저 알려주려고 왔다가 네가 아직 안 왔다고 해서 여기에 놓고 가!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우선 대략 윤곽이 잡히기는 했어. 누가 메인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확실히 손과 발로 사용된 이들은 울프용병대랑 슐랑거 가문이야. 그리고 연관된 이들은 필스너 백작가에서는 로안이 개인적으로 나섰고, 참 마음에 안 드는 놈이란 말이지. 그리고 메인으로 의심되는 인물은 둘이야. 같이 공조를 하지 않았을까 싶어. 그건…
*
“왜? 뭐 때문이지? 나랑 그렇게? 두고 보라지. 일단 단장님께 보고하러 가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