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부발과 인사 아닌 인사를 하고 나온 곧장 스승님을 찾아갔다. 스승님께서는 방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스승님!!”
“범아! 괜찮으냐! 어떤 개 같으? 범아?”
“스승님!!”
오래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 같은데 스승님의 품이 너무 그리웠었다. 씰이 떠난 순간부터 지어진 짐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전생에 동료를 부하를 잃어본 적이 없는 것이 아녔다. 아니, 수많은 동료의 시체를, 부하들의 시체를 넘어서 전장을 달리던 자신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씰을 잃은 것은 다른 느낌이었다. 전생에서는 그저 하나의 도구였다. 앞으로 나가기 위한 고기 방패들.
몇이 죽어 나가도 별 감흥이 없었다. 동료라고 해도 다른 전쟁에서 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부하라고 해 봐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씰은 그런 부하도 동료도 아니었다. 자신의 휘하에 있는 부하였다. 자신이 맡은,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었다.
2년간 자신과 함께한 친구이자 부하였고 동료였다. 그를 무기력하게 죽게 만든 자책이, 무력감이 계속 자신을 짓눌렀다.
스승의 앞에 서야, 품에 안겨서야 그 무거움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머릿속에서 씰이 잡혀 들어가는 그 모습이 떠나지를 않았다. 무력하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잊히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몰두할 수 있었다. 소드마스터의 경지가 그렇게 간절할 수밖에 없었다. 힘이, 힘이 너무 필요했다.
그렇게 눈물을 한바탕 스승님의 품에서 쏟아내고 나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심마(心魔)구나. 용케도 심마를 가지고도 소드마스터에 올랐어. 아니… 심마 때문인가.”
“심마요? 하지만. 마나에는 문제가 없었는데요?”
“심마라는 것이 꼭 마나에서부터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란다. 오히려 너처럼 보이지 않는 싹이 심어지면 차후에 더 걷잡을 수 없게 변하는 법이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제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지.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지. 하지만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란다. 내일 떠날 테니 준비하거라.”
“네? 떠나요? 어디로요? 지금 어디를 갈 수 있는 게 아닌데요?”
“부발에게는 내가 설명할 테니 군말하지 말고 떠날 준비를 해 놓거라.”
“스승님!”
자신의 말을 다 듣지 않고 나가는 스승님을 차마 잡을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걸 알기에. 하지만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 같은 시기에!
“범아? 들어가도 돼?”
눈치를 보며 문에 고개를 빼꼼 내미는 카인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났다.
‘진짜. 못 산다.’
“들어와도 돼. 뭘 눈치를 보고 그래.”
“그냐앙. 엄청나게 걱정했어! 괜찮아?”
“응. 다행히 나는 괜찮아.”
“대충 듣기는 했는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안 그래도 부탁할 것도 있고 해서.”
카인에게 그동안 있던 일에 대한 설명과 함께 회의했던 내용을 다 말해 주었다.
“카인. 좀 도와줘.”
“걱정하지 마! 내가 진짜! 감히! 어! 누구를 진짜. 내가 알아볼게.”
“근데 괜찮겠어?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구?”
“범아. 너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구나! 그 정도는 일도 아니지!”
평소보다 더 호들갑스럽게 가슴을 내밀어 말하는 카인을 보니 한결 마음이 풀어졌다.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 일부러 행동하는 것을 아니 기분이 풀릴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음. 한 2주 정도면 윤곽은 나올 것 같은데 자세한 건 알아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아. 짐작 가는 게 없지는 않으니까”
“짐작 가는 게 있어? 왕가에 날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
“음 확인해 봐야 알 거 같으니까 그때 다시 알려 줄게. 그나저나 도대체 소드마스터라니… 범이 넌”
“진짜. 진짜 운이 좋았던 거야.”
“아니 어떻게 운이 좋으면 17살에 소드마스터가 돼냐! 그냥 너님이 너무 괴물 같은 거야.”
“아니야. 진짜 괴물은 마르쿠스지. 이제 2년 됐는데 벌써 경계에 들었다니까?”
오랜만에 보는 친구와 이야기를 하니 마음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기분을 만끽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내일의 일은 생각나지 않는 시간이 흘러갔다.
*
아침이 되어 부발 님에게 찾아갔다. 이른 아침인데도 부발 님은 일어나 있었다.
“단장님?”
“들어 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놀랍게도 서류를 붙잡고 있는 부발 님을 볼 수 있었다.
“어제 라니우스 님께 이야기 들었다. 심마라니. 너도 참 다녀와라. 한 달이면 될 거라고 하시더구나.”
“지금 이 시간에 한 달을 떠나도 괜찮은 건가요?”
“어차피 지금 당장 네가 필요한 일은 없으니 괜찮다. 이래저래 조사하는데 한 달은 필요하니 걱정하지 말고 그보다는 심마가 훨씬 중요한 일이니.”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되는 건지. 맞는 건지.”
“헛소리 말고, 맞고, 되니까 다녀와!”
“예에.”
결국, 방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내심 단장님이라면 말려 줄 수 있을 거라고, 말려 줄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터덜터덜 걸어서 나오니 어느새 스승님께서는 갈 준비를 마치고 계셨다.
“스승을 기다리게 해서 되느냐?! 어서 준비하고 가자.”
어쩔 수 없이 소대원들과 카인에게 인사를 하고 스승님을 따라 훈련 본부를 나서게 되었다.
“조금 빨리 갈 것이니까 잘 따라오도록 해라. 아마 처음일 테니 조심하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빠르게 뛰어나가는 스승님이었다.
‘너무. 너무 빠르게 가시는 거 아냐?’
생각하기를 그만하고 따라나섰는데 생각 이상으로 자신의 속도가 빨라서 놀라웠다. 생각하는 데로 몸이 반응하고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옆에 스승님이 계셨다.
“생각 이상으로 빠르지?”
“네. 그냥 생각만 하는데.”
“반응이 바로바로 오지? 그게 시작이니까 잘 적응해 나가야 한다. 그럼 일단은 가장 빠르게 뛰어 보는 것부터 시작하자.”
스승님의 말을 따라서 전력으로 뛰어 볼 생각을 하니, 저절로 마나가 다리로 흐르기 시작했다.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고 마나가 흘러가는 상황에서 한 발 내디뎠다.
“쾅!”
“으아. 아…”
생각 이상의 속도로 뛰어져 나가 나무에 부딪히고 말았다. 꽤나 아팠다.
“허허. 너무 한 번에 모든 힘을 다 쓰려 하지 말아라. 아직은 어색할 테니. 점점 빠르게 가다 보면 알게 될 거다. 꽤 아파 보이는구나?”
날 보며 웃는 스승님이 얄밉기도 하고 내 몸에 대해서 아직 모르는 자신이 신기하기도 했다.
“제 몸이 너무 변한 거 같아요.”
“네 몸이 변한 것도 변한 거지만. 아직 네 생각이 익스퍼트일 때의 생각으로, 경험으로, 감각으로 행동하는 버릇이 남아있어서 그렇단다.”
“이렇게나… 차이가 심한 거네요. 익스퍼트랑 마스터랑은…”
“자. 어서 일어나서 다시 달려보자.”
반파된 나무를 뒤로하고 슬슬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본래 자신이 낼 수 있는 전력의 속도가 되었다.
‘분명. 이 정도가 최대 속도였는데. 하나도 안 힘드네? 조금 더. 조금 더…’
조금씩 빨라지는 자신의 속도를 느끼며 달려가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속도는 빨라지는 것이 확실한데 주변을 인지하는 것도 점점 더 명확해져 갔다.
마스터에 오르기 전이라면 상상하지 못할 속도로 달려가고 있는 지금 지나가는 풍경이, 앞에 보이는 풍경이 눈에 다 들어왔다. 아니 머릿속에 그려졌다.
보고 인지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눈에 들어온 광경들이 머릿속에 이미 인지가 되어 있었다. 신기한 경험이었고 새로운 세상이었다.
1주일. 스승님께 배움도 받으면서 달려왔는데 던전이 있는 장소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터무니없이 빠른 속도였다.
“이곳이구나.”
“네. 여기 이 장소에서.”
“느껴지니?”
“어렴풋이 그런데 확실하지는 않아요.”
“아마 동면에 다시 들어가서 그런 거 같구나. 이제 너만의 결말을 맺어야지. 그 시작이 여기다. 다녀오거라.”
“네.”
씰이 잡아먹히는 광경을 본 그 지점에서 소대원들과 함께 죽을 듯이 달려온 길을 지나오니 너른 평지가 눈에 들어왔다.
“씰.”
자신이 자만했다는 자책감이 올라왔다. 누구보다 빨리 익스퍼트가 되었다는 사실에, 전생에서는 꿈도 꾸지 못했던 수호용병단에 입단을 했다는 사실에, 그 수호용병단에 소대장이 되었다는 사실에.
그래서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자책감. 생각 없이 임무를 받아들였다는 자책감. 너무 무기력하게 잃었다는 자책감.
평원의 중심으로 걸어가는 손에는 도가 쥐어져 있었다. 도에는 녹빛의 검기가 칼날 위로 매끈하게 서려 있었다.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자 평원 중심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혀가 튀어나왔다.
그렇게 빨라 보이던 혀가 그렇게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혀를 피하고 앞으로 뛰어들었다. 꺾어져서 날아오는 혀.
마치 공중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혀를 피하며 그새 튀어나온 그레누이의 앞으로 나아갔다.
3m가 넘는 거대한 육체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혀도 더 이상 무섭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그레누이의 다리를 발판 삼아 한 번의 도약으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번의 베기.
“끼야아아아아악!!”
3성 마수는 역시 단단하긴 했다. 본래라면 한 번에 베어지지 않았을 테지만, 자신의 재능이 더해진 검기는 그레누이의 얼굴에 긴 자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생각 이상의 고통에 괴성을 지르며 격분하는 그레누이.
동시에 뒤로 물러나고 그 자리로 그레누이의 손이 떨어졌다. 다시 물러나자 혀가 자신을 쫓아오는 것이 보였다,
1주일 동안 배운 바가 있다면, 자신이 인지하고 생각한 것보다 자신이 훨씬 빠르고 강하다는 것.
검기가 서린 도로 그레누이의 혀를 베어냈다. 들어가지도 않을 것만 같았던 그 강대한 혀가 베어졌다.
‘확실히. 내 재능도 뭔가 변화한 것 같은데. 더 잘 베어지는 건가?’
너무 매끄럽게 잘려나가는 혀를 보면서 순간 현실감을 잊을 뻔했다.
그래누이의 피가 떨어지는 그 땅들이 부식되고 3성 마수의 괴성과 함께 피가 흐르는 잘린 혀가 날아다니는 광경은 처참했다. 그 처참한 가운데 도를 들고 있는 범.
‘아니면 아직 덜 자란 그레누이라서 그런가. 생각보다 쉬운데? 동면 중에 나와서 그런가? 조금만 더 빨랐다면, 얼굴 전체를 날릴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두렵던 3성 마수가 이제는 사냥할 수 있는 사냥감으로 보였다.
그레누이의 몸에는 상처가 늘어나고 피가 더 흘러내렸다. 땅은 그레누이의 피로 부식이 되어가고 그레누이는 어떻게든 눈앞에 인간을 죽이고자 사력을 다해 발버둥 쳤다.
그 반대로 자신은 점점 여유를 찾아갔다. 다가오는 혀를 조금씩 잘라내고 그레누이의 이마에 조금씩 조금씩 홈을 만들어 갔다.
그 모습은 마치 바람과 같았다. 곁에 있고 존재하는 것을 알지만 막상 손으로 잡으려면 잡을 수 없는 바람.
그레누이의 홈 사이로 보이는 검은 무엇인가 보였다. 그리고 그 홈 사이로 도를 찔러 넣었다.
“키에에에에엑!”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그레누이의 온몸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점점 몸이 가루가 되면서 부스러지고 있었다. 부스러지는 그레누이에서 이것저것이 튀어나왔다.
“쿵! 쿵!”
갑옷 무더기와 함께 그 위에 검은색 결정이 떨어졌다. 마수가 죽어야만 나오는 마정석. 마수의 심장이자 에너지원이 눈에 들어온다.
마수를 잡았다는 증거인 결정을 보자 정말 끝이 났다는 것을 실감했다.
“수고했다.”
언제인지 모르게 다가온 스승님이 곁에서 어깨를 토닥여주자 깊은숨이 나왔다.
“후…. 아….”
이제 끝이 난 느낌이었다. 그레누이가 토해 놓은 무더기로 걸어가자 무더기 사이에 익숙한 무엇인가 눈에 들어왔다.
무엇인가 홀린 듯 무더기를 파헤치자 눈에 들어온 익숙한 무엇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머릿속에 수없이 재생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씰!!! 씰!!!”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흘러내렸다. 부둥켜안은 씰은 따스했다. 차갑지 않고 따스한 씰은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라니우스는 오열하는 자신 제자의 모습을 그저 안타까움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