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어렵지 않게 128강을 통과한 범과 마르쿠스였다. 대진표상 자신은 16강이 되기 전까지는 그다지 눈에 띄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마르쿠스는 64강부터는 한 명 한 명이 쉽지 않은 상대였다. 그중에서도 64강에서 만나는 이는 꽤나 유명한 이였다.
페이그 슐랑거. 슐랑거 가문의 적자로 어린 나이부터 두각을 나타내 지금은 익스퍼트를 앞두고 있다는 강자였다.
창을 사용하는 창사로, 기마하면 또래에 적을 찾을 수 없다는 평가를 받는 무사이자 기사였다.
하지만, 기마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무시할 수 없는 그런 강자였다. 마르쿠스도 기대를 받기는 하지만, 이번 대결은 압도적으로 페이그의 우세를 점치는 사람이 많았다.
넓은 경기장을 향해서 걸어가는 마르쿠스가 보였다. 정작 올라가기 전에 반신반의하던 마르쿠스의 모습이 떠올랐다.
*
“제가… 이길 수 있을까요…”
“왜. 막상 다가오니까 잘 모르겠어?”
“페이그… 인성은 몰라도 실력은 확실하니까요.”
“네가 왜 몇 달도 되지 않아서 이렇게 발전했는지 알아?”
“…왜…죠?”
“클라운으로 사는 동안, 아무것도 안 한 게 아니라서. 죽을 듯이 노력한 성과가 있어서 그런 거야. 그래서 금방 실력이 오른 거고.”
“그… 발악들 말인가요…?”
“남들이 그걸 발악이라고 하더라도 넌 그러면 안 되지. 피를 토하는 노력이지. 스스로를 너무 낮추지 마.”
“범 님…”
“하여튼.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동안 쌓은 것 위에 너에게 맞는 무기를 수련하니까 실력이 빨리 올라온 거야.”
“하지만, 무술이라는 건…”
“무술이라는 게 고련이 필요하고 그렇지만, 그건 달인들 결투에서 필요한 거지. 익스퍼트일지리도 달인이 못된 사람이 많은 거 알고 있지?”
“네…”
“그 아래 단계에서 결국 가장 중요한 건 힘과 속도야. 속도는 비등하거나 페이그가 낫지만, 힘은 비교할 수 없지. 자신감을 가져!”
자신의 말이 끝나자 한동안 가만히 있던 마르쿠스가 대뜸 큰소리로 외쳤다.
“반드시 이기고 오겠습니다!”
저렇게 의욕과 힘에 찬 마르쿠스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눈에 독기가 풍기는 모습은 자신마저 흠칫할 정도였다.
*
결투장에 오르자 얼굴에 온 힘을 모아 경멸과 귀찮음을 나타내고 있는 페이그의 얼굴이 보였다.
“클라운이면 클라운답게 밑바닥에 처박혀 있을 것이지. 굳이 귀찮게 하는 건 또 쯧…”
뚫린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하나하나 더해질 때마다 힘이 나는 것이 느껴졌다.
“검도 아니고 무식하게 망치나 들고 다니는 놈이 주제를 알고…”
계속 이어지는 헛소리를 흘려들으면서 망치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을 더했다. 그리고 결투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있는 힘껏 망치를 횡으로 휘둘렀다.
창으로 막았지만, 생각 이상의 힘에 놀라며 튕겨 나가는 페이그였다.
‘넌 아직 기술이 없다. 그러니 한 번 공격이 성공하면 끊임없이 몰아쳐라.’
라니우스 님의 말을 떠올리며 튕겨 나가는 페이그를 향해 달려나가며 다시 망치를 휘두르는 마르쿠스.
무너진 자세로는 마르쿠스의 망치를 다시 막는 수밖에 없었다. 힘을 주고 내려치는 망치를 막았지만, 그 무식한 힘에 다른 행동을 못 하는 페이그였다.
단 세 번. 세 번 만에 페이그는 결투장의 끝에 서게 되었다. 뒤로 물러날 수 없는 상황.
마르쿠스는 단 세 번에 벼랑으로 몰아세워 진 페이그를 보면서 해방감을 느꼈다. 그리고 망치를 높게 든 순간.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창이 찔러 들어왔다. 자신이 잠시간의 틈을 보인 순간 찔러 들어오는 창.
‘아차! 들떠서…’
“이 버러지 같은 클라운 따위가…! 힘만 센 무식한 가문 주제에….!”
입을 짓씹으며 이야기를 하던 페이그는 이내 빠른 속도로 마르쿠스를 향해 달려 들어왔다.
자신에게 찔러 들어오는 창을 망치를 이용해 위로 쳐 냈지만, 생각보다 강한 힘에 어깨가 베이고 만 마르쿠스.
‘아까보다… 힘이 강해졌어?’
마나를 이용해 힘을 늘릴 수 있다고 하지만, 한계가 명확했다. 익스퍼트가 아닌 이상에야 함부로 마나를 이용하다가는 속이 찢어지고 상하게 된다.
그런데 방금 들어온 공격은 본래의 힘을 아득히 상회하는 힘이었다.
마르쿠스의 상념은 더 이상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자신을 베고 지나갔던 창날이 목을 향해서 날아오고 있었다.
그대로 앞으로 달려드는 마르쿠스. 창대에 망치의 대를 대고 막은 후에 창대를 타고 내려가 손을 향해 망치를 내쳤다.
치열한 공방이 몇 번이나 오갈 무렵, 점점 이상한 점을 느끼는 마르쿠스였다.
‘이상하게 단순해지는 느낌인데? 날카로운 맛이 사라졌어.’
힘은 점점 강해졌지만 단순해져 가는 공격으로 변하자 한결 상대하기 쉬워짐을 느끼는 마르쿠스였다.
몇 번의 공방 끝에 확신을 얻은 마르쿠스는 자신에게 찔러 들어오는 창날을 옆으로 피하고 온 힘을 내어 망치를 횡으로 휘둘렀다.
“쿠왕! 쾅! 쿵!”
망치에 맞아 날아간 페이그는 바닥에 몇 번 튀기더니 결국 결투장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마르쿠스! 승리!”
사회자의 외침과 함께 거대한 함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망치를 지지대 삼은 마르쿠스에게 그 환호는 전신을 울리는 무언가였다.
*
“수고했어!”
경기장에서 나오는 마르쿠스에게 담담하게 축하의 인사를 전해 주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더니 갑자기 고개를 숙이는 마르쿠스.
“감사합니다!”
땅바닥에 물방울이 지는 것을 모른 척하면서 그저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가자! 애들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리고 뒤를 돌아서 먼저 나섰다. 얼마 걷지 않아서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다 시원하네. 내가 이긴 것보다 기쁜 건 왠지 모르겠네.’
그렇게 식당으로 향하는 두 사람이었다.
*
파란을 일으킨 마르쿠스의 승리는 결국 16강 탈락의 성적으로 마치게 되었다. 하필이면 16강에서 로사를 만난 것.
로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더 높이 올라갔을 거란 인식이 팽배했다.
그 정도로 마르쿠스에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되었다. 더 이상 마르쿠스에게 함부로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에 힘입어 [우시아]는 한 번 더 유명세를 치르게 되었다. 모두가 아니라고 한 클라운 아닌 클라운을 받아 골든리그 16강으로 만든 대단한 동아리로.
그리고 그 장인 범이 골든리그에서 승승장구하는 것이 그 유명세를 더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대망의 결승이 다가왔다. 결국, 모두가 예상했듯이 로사가 결승에 올라오게 되었다.
경기장에 들어서고 결투장에 올라서자 그 크던 환호가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로사의 말만이 뚜렷하게 들려왔다.
“역시… 네가 올라올 줄 알고 있었어.”
“뭐… 나도 대충 너가 결승에 올라올 거로 생각했어.”
“이번에는… 이번에야말로 널 이기겠어. 너에게 들을 말이 많아.”
“난… 할 말이 없는데 말이지. 솔직히 나한테 날을 세우는 이유도 모르겠고.”
두 사람의 이야기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결승에 걸맞게 거대한 축포와 함께 시합이 시작되었다.
달려드는 로사는 과연 날카롭고 빨랐다. 유저라고 해서 다 같은 유저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재능에 따라 다르고 서킷에 따라 담을 수 있는 마나가 다르고 단련에 따라 다르다.
로사는 이 셋 모두가 최상인 말도 안 되는, 그 말 그대로 찬란한 재능이었다.
빠르고 날카로운 바람을 담은 로사. 어느 유저와 상대하더라도 쉽게 이길 수 있는 강자.
하지만 자신에게는 아녔다. 유저와 익스퍼트 그 사이의 간극은 그렇게 쉽게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있었다.
유저가 익스퍼트를 이기기도 하지만, 그것도 경우에 따라서 일뿐이었다.
폭풍이 치는 것과 같이 자신을 압박해 오는 로사의 모습은 로사가 우위에 있다고 모든 이들이 느끼게 해주었다.
하지만, 자신의 도에서 아지랑이가 피어나오고 그 순간 도는 로사의 레이피어를 걷어 내고 어느새 로사의 목 앞에 놓여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경기장. 환호와 함성이 가득하던 경기장이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격전을 예상한 이들이 정적에 빠졌다.
도에 서린 아지랑이를 본 이들이 정적에 빠졌다.
그리고 범의 앞에 있는 로사가 가장 놀랐다.
“너…. 너…”
“운이 좋아서 오를 수 있었어.”
“왜…. 왜 항상… 너만… 너는 왜 날… 그동안 나를 얼마나 우습게 보았을까…내가 얼마나 우스웠니…”
“아니… 왜 또 우습다는 이야기가 나와?”
도를 내리자마자 대답 없이 돌아 들어가는 로사였다. 그런 로사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이후로 로사는 더 이상 자신에게 아는 척조차 하지 않았다. 단상에 올라서 시상을 하는 내내 그저 없는 사람 취급을 하는 로사였다.
그런 로사 때문에 시상식 내내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가 모든 행사가 끝나고 [우시아]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야 마음이 놓였다.
‘진짜… 모르겠다니까.’
아카데미 외부의 여관 별채를 빌려서 진행한 마르쿠스와 자신의 축하 파티로 인해서 아이들은 이미 뻗어있었다.
별채의 난간에 나와서 잠시 바람을 쐬는 범이었다.
‘진짜… 많이 변했다.’
전생과는 정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지금 나이에 전생에서는 아카데미에서 구르고 있을 때였다.
마르쿠스보다 더 못한 취급을 받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강제로 아카데미를 뛰쳐나가게 되는 시기였다.
지금은 그냥 아카데미도 아닌 수도 아카데미에서 골든리그의 우승자가 되어 있다.
그것도 익스퍼트에 올라서. 참 얄궂은 일 같았다. 그렇게 변함이 없는데 한 번의 생을 경험한 것만으로 이번 생은 너무도 달랐다.
“범아?”
한참을 회상하며 있다가 문득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에밋이 있었다.
“응? 무슨 일이야? 애들은 다 들여보냈어?”
“응. 완전히 다들 정신을 놨어. 참…”
“고맙지. 앞으로도 네가 고생이 많겠어! 2대 동아리장.”
“아니야. 그나저나… 오늘 로사랑 무슨 일 있었어?”
“어? 아니… 뭐 계속 모를 소리만 하고 혼자 나한테 날 서 있고 그랬긴 했는데”
“너무… 미워하지 말아 줘…”
“아니. 내가 뭐라고 로사를 미워해. 그냥 왜 그러나 싶지. 넌 혹시 아는 게 있어?’
“아니… 나도 그렇게 정확하게 아는 건 아닌데. 로사는 애매한 위치에 있으니까… 이래저래…”
“어?”
“가문에도 아카데미에서도 로사는 좀 애매한 존재라서… 재능이 너무 뛰어나다랄까…”
“하… 귀족들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냥… 그 말을 해주고 싶었어. 너무 미워하지 말라구”
“뭐… 앞으로 안 보게 될 건데 뭐.”
“다음 주네 벌써…?”
“하… 그러게…”
“마르쿠스도 너 따라간다고 하고, 라니우스 님도 같이 가신다며?”
“응. 감사하지.”
“내년이 돼서야 보게 되겠다…”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 에밋과 대화를 나누며 어느새 로사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
그리고 이별은 언제나 그렇듯 빠르게 찾아왔다. 포탈이 열리는 탑 앞에는 [우시아]의 아이들과 플레미 선생님, 도미토르 선생님이 자리하고 있었다.
“내년에 봬요!”
배웅을 받으면서 걸어가는 범의 목에는 새로운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마르쿠스와 라니우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목걸이는 졸업할 때 선택할 수 있는 아티팩트로 받아온 것이었다.
3층에 자리하고 있지만, 효능은 피로와 활력의 회복이라서 누구도 찾지 않는 아티팩트였다.
하지만 자신을 기이하게 당기는 느낌이었기에 선택했다. 세 번이나 확인을 받을 정도였지만, 마음에 드는 아티팩트였다.
어느새 포탈이 열리고 아이들에게 인사를 하면서 길지만 짧았던 아카데미 생활을 뒤로하고 수호성으로 향했다.
*
“흠… 바로 시작해 볼까?”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