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정신없이 구경하다 보니 웬 문 앞에 스승님과 함께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성하(聖下)의 방이란다. 중앙 신전에 왔으니 인사는 드려야지.”
무방비한 상태에서 지나친 충격을 받으면 시간이 멈춘 듯, 사람 그 자체가 멈춘다.
현재 자신이 그러했다. 교황 성하라니! 스승님과 있으면 너무 말도 안 되는 것이 쉽게 일어나는 기분이었다.
“제…. 제…가요…?”
“그래. 성하가 굉장히 인자하고 좋은 분이니 걱정 말거라.”
“이…이…렇게 갑작스럽게 뵈어도 괜찮을까…요…?”
“하핫. 관문을 넘어서는 순간 알고 계셨을 것이다. 중앙신전은 성하의 안에 있으니까 말이다.”
“…네?”
“그만하고 들어가자꾸나.”
들어간 성하의 방은 참 단출했다. 침실과 성경으로 보이는 책 한 권, 책상 그리고 조금 고풍스러워 보이는 의자. 그것이 다였다.
“성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허허허. 라니우스군. 오랜만일세. 옆에 형제가 자네 제자인가 보구먼”
의자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네는 성하의 모습은 순간 뒤에서 빛이 비쳐 보였다. 눈을 다시 뜨고 보니 웃음이 너무나 따스한 그런 분이셨다.
“아…안…녕하세요. 라니우스 님의 제자 버…범이라고 합니다.”
너무 긴장되어서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자신이 성하를 만나는 건지 믿어지지 않았다.
“허허허허. 축복을 받은 아이였구나. 좋은 인연을 맺었어 라니우스군. 돌아와서 잘 나아가고 있구나 어린 형제.”
성하의 말씀에 머리에 번개가 치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돌아온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을 처음 만난 것이다.
“여전히 아이 취급하는 건 하나도 안 변하셨네요. 정말. 성하 앞에서는 아이가 된 기분입니다.”
“허허허허허. 아직 어린 나이이지 않은가. 자네도 갈 길이 멀어.”
성하와 스승님께서 이야기하는 동안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혼자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게 오히려 마음을 편히 해주었다.
“마틴 형제 군은 저녁이 되어서 볼 수 있을 걸세. 범 형제 덕분에 신전으로 올 수 있게 되었다지? 허허허 아주 잘 나아가고 있네.”
성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자신을 위로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2년간 열심히 살아온 것이 인정받는 그 느낌은, 또 다른 충만함을 안겨 주었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성하. 다음에 또 뵈러 오겠습니다.”
“그래. 종종 찾아오게나. 혼자 그렇게 구석에 박혀 있지 말고.”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도 여전히 자신이 현실에 있는 것인지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스승님과 함께 성전을 나와서 ‘바람이 머물다 간’ 여관에 도착해서야 이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임을 알게 되었다.
“스승님! 정말… 정말…!”
“성하께서 참 놀라운 분이시지. 그렇지 않더냐?”
“네! 정말…. 감사해요 스승님.”
여장을 풀고 중앙신전 근처를 돌아보니 금세 저녁이 되었다. 저녁이 되자 마틴을 찾아 다시 중앙신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쪽빛 머리의 아이가 보였다.
“마틴!!!!!!!”
이름을 부르자 목이 꺾이지 않을까 걱정되는 정도로 자신을 보며 뛰어오는 마틴이 보였다.
“범아아아아아아!!!”
달려와서 이내 안긴 마틴은 여전히 자신보다는 조금 작았다. 정말. 반가웠다.
“진짜 진짜 너무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건강했지?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그래 그래. 고생했어. 스승님께 인사드려야지.”
“아차차차! 맞네. 어디 계셔 라니우스 님!”
“어… 내 바로 뒤에…”
“안녕하세요! 범이의 하나뿐인 동생 마틴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우리 범이를 잘 부탁드려요!”
“하하하하하! 네가 마틴이구나. 만나서 반갑단다. 정말 말 그대로 활기차구나.”
“마틴. 칸 님께서는 어디 계셔?”
“칸 님? 이제 곧 나오실 거야! 신전에서 무술을 가르치시거든. 이제 끝날 시간이니까 곧 나오실 거야! 그나저나 어떻게 지냈어!”
여전히 활기차고 신나 보이는 마틴을 보면서 걱정을 덜어낸 범이었다. 신전에 와서 고생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범이었다.
자신과 스승님에게 온갖 질문을 던지는 동안 성전의 왼편에서 칸 님이 걸어 나오셨다.
“칸 님! 정말 오랜만에 뵈어요.”
“하하하하! 범이구나. 정말 반갑다. 그리고 라니우스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칸! 좋은 인연을 이어줘서 정말 고맙네. 덕분에 범을 제자로 거둘 수 있었네.”
“아닙니다. 라니우스 님의 인연이었던 거죠.”
“하하하하. 신전에 있더니 거의 사제가 되어 가는구먼. 여기서 이러지 말고 여관으로 가세나.”
여관으로 온 일행은 저녁을 먹으며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스승님들께서 술을 꺼낸 뒤로 마틴은 자신을 데리고 나왔다.
“범아. 범아! 이리로 와 내가 좋은 곳으로 데려가 줄게!!”
마틴을 따라간 곳은 성전의 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였다. 성전 뒤에 있는 한 움막으로 자신을 데리고 온 마틴이었다.
성전 주변으로는 건물이 없고 그저 숲이 자연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그 안에 이런 움막과 작은 화원이 있다는 것이 신비해 보였다.
“신기하지! 우리 비밀 장소 같은 곳이야. 원래 세르 할아버지도 계시는데 오늘은 안 계시네…”
“여기에 들어와도 괜찮은 거야?”
“그럼! 세르 할아버지가 괜찮다고 해주셨어. 범아… 진짜 보고 싶었어…”
이내 움막에 앉아 마틴의 이야기를 천천히 들어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틴도 많은 고초를 겪었다.
몇몇 사람들에게 시기와 질투를 당한 모양이었다. 지금은 괜찮아졌다고 하지만, 그리 녹록하지 않은 생활이었음을 들을 수 있었다.
“나도…처음에는 정말 실망 많이 했다. 다들 수습 사제분들인데도 그러니까… 그 와중에 세르 할아버지를 만난 거야!”
한창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을 무렵에 누군가가 움막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다리를 절며 해진 옷을 입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세르 할아버지! 이 친구가 제 형제인 범이에요!! 범이 인사드려 세르 아저씨야!”
“안…억… 안녕하세요.”
들어온 이의 얼굴은 불과 얼마 전에 범이 본 사람의 얼굴이었다. 해진 옷을 입으며 다리를 절고 걸어오는 이는 성하였다.
순간 제대로 인사를 하려는 자신에게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시는 모습에 어쩔 수 없이 그저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허허허허허. 우리 마틴 오랜만에 형을 보아서 기분이 좋겠구나.”
“네! 네! 지금 막 세르 할아버지를 처음 만난 이야기를 해주고 있었어요.”
“하하하하하! 그때 펑펑 울면서 여기로 들어온 때를 말하는 게냐.”
“아…. 할… 할아버지!!! 제가 언제 울었다고 그러세요!!”
“하하하. 그렇다고 하자꾸나.”
이 상황이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대체 성하는 왜 여기에 계신 것이며, 세르 할아버지는 또 뭔지 혼란스러웠다.
“마틴아. 잠시만 가서 물을 길어다 주지 않겠니?”
“아… 벌써 떨어졌어요?! 정말! 금방 다녀올게요! 범이랑 얘기하고 계세요! 범아 잠깐만 있어! 내가 금방 다녀올게!”
마틴이 나가자마자 다시 인사를 드렸다.
“성하를 뵙습니다.”
“허허허. 많이 놀랐지요? 마틴에게는 따로 말해 주지 말아 주세요. 아직 모르고 있답니다.”
말을 하시면서 자연스럽게 움막의 구석에 있던 동이를 잡으셨다. 그리고 이내 그 안에 있던 물을 몰래 밖에 쏟아내셨다.
“아… 네… 근데 어떻게 성하께서…”
“허허. 주께서 주신 인연이지요. 본래 이곳은 제가 혼자 기도를 하고 저를 돌아볼 때 오는 곳이었답니다.”
성하께서 이야기하시는데 감히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허허허허. 그러지 마세요. 여기에 있는 저는 교황이 아닌 세르 할아버지니까요. 편히 앉아도 괜찮아요.”
“네? 그래도 감히 제가 어떻게…”
“괜찮아요. 편히 앉아요. 아! 그렇죠. 마틴이 펑펑 울면서 이곳에 온 게 첫 만남이었어요.”
*
여느 때와 같이 조용히 기도하러 나온 참이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울면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열심히 가꾸어 온 화원 중간에 주저앉아 우는 아이는 너무나 서러워 보였다.
‘저 아이는… 수습 사제 마틴이지 않나.’
아이의 정체를 알고 난 뒤 천천히 걸어 그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아. 무슨 일이길래 그리도 서럽게 울고 있는 게나.”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본 아이는 화들짝 놀라더니 울고 있는 얼굴로 죄송하다며 사과를 건넸다. 참 기특한 아이였다.
아이를 토닥이고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많이 힘들었겠구나 싶었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온 중앙신전에서 다른 수습들의 시가와 질투가 상처가 되었고, 무엇보다 그들이 사제이기에 큰 실망으로 다가온 듯했다.
자신도 겪어온 일이다 보니 남 일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어린 나이다 보니 더욱 상처가 컸을 터. 이리로 인도하신 이유가 있으신 듯하였다.
“마틴. 사제가 된다면 완벽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사제님을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사제도. 주교도. 모두 사람일 뿐이란다. 가르침을 따라서 살려고 노력할 뿐이지.”
“그럼… 그럼 왜 그냥 두시는 건가요!?”
“너무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렇단다. 더디 오시지만 도둑 같이 오신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단다.”
“그래도…. 전 잘 모르겠어요.”
“음… [프린시오 비블리아]에 이름이 올라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 것 같으니.”
“그분께서 인정해 주시고 올바르게 나아가고 있다는 거 아닌가요?”
“그렇지 그렇지. 감사하게도 미혹되는 우리 대신에 틀리지 않으시게 알려 주신단다. 그럼 우리는 매번 [프린시오 비블리아]를 봐야 우리 상태를 아는 것일까?”
“음…”
“천천히 생각해보렴.”
“아닌 거 같아요. 저도 나쁜 짓을 하면 마음에 걸리구… 사실 제가 먼저 아는 거 같아요.”
“허허허허허. 우리 마틴은 참 똑똑하구나. 그래 마음으로 알고 있단다. 그때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단다.”
“선택이요?”
“그래. 선택. 잘못을 뉘우치고 바로잡을지 아니면 자신을 합리화하던지.”
“합리화하면 어떻게요?”
“그러면… 그것이 쌓이게 된단다. 간혹 [프린시오 비블리아]에 이름이 올라왔다가 사라지는 이름이 있지?’
“수업시간에 들었어요. 정말 드물지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그게 쌓이고 쌓이면 어느새 이름이 사라지게 된단다. 더불어 우리가 받은 은혜와 축복이 반대로 저주가 되어 돌아온단다.”
“그럼… 그 가운데 힘들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해요.”
“그러니…더더욱 큰 벌이 있는 거란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위해서는 큰 보상을 해주는 것이고.”
“후… 그럼 잘못을 뉘우치는 건 그냥 뉘우치기만 하면 되나요?”
“음… 혼자서 자신에게 죄를 짓거나 그렇다면 그렇지만,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상처를 주었을 때는 그 사람의 용서를 받아야 한단다.”
“만약에… 그 사람이 용서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해요. 충분히 사과하고 보상도 해줬는데 데도요.”
“그 사람이 용서를 해줄 때까지 감내해야 하는 거란다. 그 죄를 지은 것에 대한 책임이 그렇게 무거운 것이란다.”
“그러면요. 만약에 제가 잘못한 것이 없는 데도 막막 다른 사람이 절 미워하면 어떻게 해요.”
“그건… 네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다르겠구나.”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달라요?”
“그럼. 네가 음… 사제라면, 더욱 큰 사람이라면 그 사람도 사랑으로 안아주어야 하지. 훈계도 중요하지만, 사랑이 없는 훈계는 그저 상처를 줄 뿐이란다.
“후….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감사해요 할아버지.”
“허허허허 괜찮다. 천천히 알아가면 되는 것이니. 세르 할아버지라고 부르거라.”
“세르 할아버지…. 저 종종 여기에 찾아와도 괜찮아요?”
“흠… 그 대신 물을 길어다 주지 않으련?”
“네! 열심히 할게요!”
“그래. 그래. 기특하구나. 너무 열심히만 하지 마려무나. 너도 쉼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으니.”
순수한 눈망울에 쪽빛 머리를 가진 수습 사제와의 인연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 또한 주의 이끄심이겠지… 이번에는… 후…’
*
“그렇게 된 거란다. 그러니 범이 너도 여기서는 그저 세르 할아버지로 대해 주었으면 좋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