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종합 1반의 아이들이 들어오자, 같이 있던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이동했다.
각자 자리를 옮기면서 범의 옆에는 카인과 에밋, 량 그리고 샨만이 남아 있었다. 스콜라스와 재인이 에밋의 곁에 있는 아이들을 흥미롭게 쳐다볼 때였다.
로사가 자신에게 나아왔다.
“이번 학기는 다를 거야. 수련회에서는 그럴 수 없지만, 돌아와서는 다를 거야.”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며 말을 하는 로사를 보며 스콜라스는 흥미를, 재인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기대할게. 나도 한 달 동안 놀고만 있던 건 아니니까.”
자신의 말에 흡족한 표정으로 제자리로 가서 앉는 로사였다. 그리고 들어온 선생님은…
플레미 선생님이었다.
“반가워요! 여러분. 논의 끝에 종합 1, 2반을 당분간 통합해서 맡게 된 플레미에요. 수련회에서 종합 1, 2반이 함께 조를 짜서 움직이게 될 거예요.”
플레미 선생님의 말씀에 모든 아이가 집중해서 들었다.
“대략적인 이야기는 다 알죠? 전투 조는 스콜라스 학생이 조장을 맡고 행정 조는 재인 학생이 조장을 맡을 거예요. 혹시 다른 의견이 있나요?”
플레미 선생님의 질문에 량이 손을 들었다.
“선생님! 행정 조의 조장이 권한이 있거나 한가요?”
“아뇨. 그렇지 않아요. 뭐… 성과를 보인 고학년은 권한을 가지긴 하지만, 여러분은 아직 1학년이니까요.”
“넵! 알겠습니다.”
“그럼 수련회에서 1학년이 뭘 하는지 알려줄게요.”
수련회에서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오전 수업이 다 지나갔다.
수업이 끝나고 항상 카인과 둘이가던 길에 에밋과 량 그리고 샨이 함께했다.
“량, 에밋 너희 둘은 원래 알던 사이였어?”
“아! 스승님이 계시는 곳이 에밋네 영지에 있거든. 그래서 알게 됐지. 아마 에밋 말고 아는 애가 없을걸?”
“스승님이 대단한 분이셔?”
“나름 엄청? 근데 평민들은 잘 모를걸? 나도 처음 봤을 때 그냥 인자한 할아버진 줄 알았다니까. 막 비장하게 이름을 말해주시는데 내가 ‘그래서 유명한 사람이에요?’ 이러니까 엄청나게 당황하셨어. 헷”
“하 량이 너도 정말. 그분에게 유명한 할아버지냐고 물어보다니. 량이 스승님의 존함이 파울로 알케미아셔.”
그 이름에 자신과 카인은 둘 다 놀랐다.
“어? 너네 둘 다 스승님 이름을 알고 있어?!”
“전대 블레어 왕에게 연금술사라는 의미의 성을 부여받은 천재. 위대한 연금술사. 이 세계 유일의 진정한 연금술사. 파울로 알케미아.”
경악한 표정으로 말하는 카인의 표정에는 놀람과 부러움 동경이 서려 있었다.
“오 스승님 유명한 게 맞구나!”
“하. 량이야아…”
“그분께서 지금 쓰이는 포션을 만드신 분 아니야? PA라고 쓰여있는 포션.”
“우와! 범아 너도 아는구나!! 와… 우리 스승님 진짜 유명하시네. 이따가 말씀드리러 가야겠다.”
“파울로 알케미아 님께서 수도에 계셔?! 그렇게 왕실에서 초청했는데도 와흐네 영지의 탑에서 절대 안 나오셨는데?!”
“어 음. 아마 알게 되지 않을까? 내가 아카데미도 가야 하고 그러니까… 내가 아카데미에 있는 동안은 아카데미에 계실 거야.”
량이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에밋이였다.
“량아. 아마 밝히실 생각이 없으셨을 거 같은데.”
“괜찮아~ 뭐 어때!! 친군데~”
“량아. 나중에 나도 한 번 같이 뵈러 가도 될까?”
“그럼! 당연하지!”
초롱초롱한 카인과 으쓱거리는 량 그리고 그 옆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젖는 에밋. 이 세 사람이 참 보기가 좋았다.
*
이런 다섯 사람을 지켜보는 무리가 있었으니, 스콜라스와 재인 그리고 로사의 무리였다.
“역시 대공녀는 다르다는 건가. 아무런 관심도 없는 척하더니. 왕자님. 저리 두어도 괜찮을까요?”
“흠 뭐 아직 1학년이고 시간은 많으니까?”
“그래 봐야 비천한 고아에 비천한 평민인데.”
“로안. 비천한 고아라고 표현하지마. 적어도 지금은 나에게 경쟁자이고 넘어야 할 상대야.”
로사의 말에 스콜라스와 재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무에 있어서 양보가 없던 로사의 말에 놀라기도 했다.
로안은 그런 로사의 말에 신경질을 부리며 말했다.
“로사. 네가 나에게 명령할 위치는 아니지. 형님께서 널 도우라고 하셨지만… 그렇다고 네가 형님이 되는 건 아니지. 너도 어쩌다 저런 고아랑. 쯧”
로안의 말에 로사의 표정이 굳었다. 덩달아 스콜라스의 표정도 굳었다. 오직 재인만이 조용히 재밌다는 듯이 미소를 순간 지었을 뿐이었다.
어색한 기류가 흐르려던 찰나에 재인이 나서서 수습해서 식당으로 마저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서로가 어느새 조금씩 떨어져 걷는 아이들이었다.
아무리 어린 나이더라도, 각자 가문과 왕가를 생각해야 하는 아이들이었다. 배워온 것이 다르고 생각하는 것이 달랐다.
아직 피지 않은 어린 나이이기에 어설프고 미숙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 어설프고 미숙함에서 피어난 불편함이 어찌 될지는 모를 일이었다.
서로에 대해서 알아가는 시간, 각자의 생각을 키워가는 시간, 그런 시간이 아카데미에서의 시간이었다.
*
점심을 먹고 전투 조에 소속된 아이들 모두가 연무장에 모였다. 아이들이 모두 연무장에 도착하자 도미토르 님이 입을 열었다.
“모두 자리를 잡고 대기하고 있도록.”
자리에 서 있다 보니 주변에 있는 물품들과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플레미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와! 역시 도미토르 님은 다르네요! 아이들이 자세가 달라요!”
“크흠. 감사합니다. 그럼 말한 대로 짧은 시간이지만 최대한 가르치도록 하겠습니다.”
“네! 감사해요! 얘들아 도미토르 선생님 말 잘 듣고 내일 보자!”
플레미 선생님이 나가고 어리둥절해서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도미토르 선생님이 호통을 내질렀다.
“조장 누구야! 조장 맨 앞으로 서고 2열 종대로 서라! 뛰어라!”
갑작스러운 큰소리에 아이들이 놀라 줄을 맞추어 섰다.
“이번에 수련회에 참여할 때 너희는 가장 밑바닥에 있다고 생각해라. 수호성의 모든 사람이 너희 선임이고 윗사람이다. 너희의 가문을 잊고 생활하도록.”
경고부터 시작되었다. 경고하는 도미토르 선생님은 몹시 진지했다.
“왕국의 병사들은 너희에게 잘해줄지 모르지만, 그것이 너희의 대우라 생각하지 말아라. 특히나! 수호 용병과 수호 병사에게는 더더욱 조심하도록.”
말이 이어질수록, 아이들도 더불어 진지해져 갔다.
“그들은 소속된 국가가 없다. 그만큼의 자유와 대우를 받는 이들이니 너희가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고 또 명심하도록.”
도미토르 선생님의 수업은 역시나 힘들었다. 짐을 싸고 풀고를 반복하고, 뛰고 멈추고를 반복했다.
무사 반의 아이들은 그나마 괜찮았지만, 마법사 반의 아이들은 말 그대로 녹초가 되어갔다.
마법 사반 아이들이 모두가 뻗을 무렵에야 수업이 끝났다.
“정말 기초의 기초만 맛을 본 것이다. 자만하지 말고 항상 조심하고 조심하도록.”
마지막까지 경고의 말을 하며 수업을 마친 도미토르 선생님이었다.
모든 마법사 반의 아이들이 쓰러져 있는 가운데 그나마 서 있는 것은 에밋이었다.
“와 너네는 항상 힘들겠다. 매번.”
부쩍 친해진 에밋이 자신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래도 자율 훈련이라 덜했었는데. 오랜만이긴 하네. 오늘따라 엄청나게 반복이 많아서 그냥 지친 것도 있고. 근데 에밋 너 체력 좋다?”
“응 할아버지께서 집중은 체력에서 나온다고 하셔서. 그래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천천히 숨을 고르고 명상할 때처럼 앉아서 천천히 가다듬어봐.”
“응. 고마워”
마법 사반 아이들이 녹초가 되어서 쓰러져 있는 동안 자연스럽게 무사만 아이들이 짐을 챙겨왔다.
수업시간에 마법사 반의 아이들의 짐을 대신 들고 정리하는 훈련을 했기에 퍽 자연스러웠다.
아이들과 저녁을 먹은 후 언제나처럼 라니우스 님의 오두막으로 향했다. 항상 가는 이 길은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길과 같았다.
“라니우스 님! 저 왔어요!!”
오두막에서 나오지 않으시자 먼저 큰소리로 인사를 하며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오두막을 열고 들어가니 평소와 다른 라니우스 님이 서 계셨다.
가죽조끼를 입고 허리에는 도를 패용한 라니우스 님은 마치 전쟁을 나가는 사람처럼 진지하고 비장하셨다.
“왔니.”
“네.”
자연스럽게 위축되는 느낌이었다.
“범아. 너를 나의 제자로 맞이하고자 한다. 그동안의 모습들을 보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결정을 한 것이란다. 나의 제자가 되겠니.”
라니우스 님의 말이 천둥처럼 범에게 울렸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오지도 않았다.
엄청 기쁘고 신날 줄 알았던 그 순간이 막상 찾아오자 그 어떤 행동도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불안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초인은 그 존재로 이 세계에 정점에 있는 사람. 혹시나 내쳐지지 않을까 불안하고 초조했다.
“범아. 나의 제자가 되어주겠니.”
재차 말하는 라니우스 님의 말에 겨우 한 글자를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었다.
“네.”
“너는 나의 첫째 제자이자, 모든 것을 이어받는 유일한 제자가 될 것이다. 나에게 배움을 받은 아이들이 있지만, 그 위에 네가 서야 할 것이다. 그리할 수 있겠느냐?”
“네. 모든 것을 이어받는 제자가 되겠습니다.”
“너는 나의 신념을 이어받아 너의 신념을 세워야 할 것이다. 그리할 수 있겠느냐?.”
“네. 라니우스 님의 신념을 이어받아 저의 신념을 세우도록 하겠습니다.”
“고맙구나. 그럼 사제의 의식을 맺자꾸나. 따라 나오렴.”
라니우스 님의 뒤를 따라 공터로 나오면서 우습게도 든 생각이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깨끗하게 입고 나올걸!!’
스스로도 참 웃기다 싶은 생각이었다.
“꼬맹이? 라니우스 님의 제자가 되려는 아이가 너였어? 대단한데? 라니우스 님께서 부탁하셔 왔는데 그게 꼬맹이 너라니… 인연은 인연이구나.”
“서 프란체스코? 범이를 아는가?”
“꼬맹…아니 범이 마을에서 수도로 올 때 같이 왔습니다. 부탁을 받은 게 전우였던지라 알고 있었습니다.”
“하. 칸이랑 전우였던가. 인연은 인연이구나. 그럼 잘 부탁하네.”
“네. 그럼 자리에 서주시길 바랍니다.”
라니우스와 범이 서로를 마주 보고 꿇어앉았다.
그리고 프란체스코가 입을 열었다.
“나의 주여. 여기 이 자리에서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가장 무거운 후연(後緣 : 태어나고 나서 맺은 인연)을 맺고자 이 자리에 앉았습니다. 이들의 언약을 미쁘게 받아주옵소서.”
“본명. 라니우스 이명 도살자. 신 앞에 맹세하니 범을 저의 제자로 맞이해 저의 모든 것을 물려주겠나이다. 이 인연을 기쁘게 허락하여 주소서.”
“본명 범. 신 앞에 맹세하니 라니우스 님을 스승님으로 맞이해 모든 것을 물려받고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라니우스 님을 아버지로 맞이해 순종하고 따를 것을 맹세하오니 이 인연을 기쁘게 허락하여 주소서.”
두 사람의 맹세가 끝나자 각자의 가슴에서 빛이 나와 프란체스코의 앞으로 모여들었다.
“나의 아버지시여. 두 사람의 맹세를 미쁘게 받으사 두 사람의 관계에 축복을 허락하소서. 이 무거운 인연의 공증으로 저를 세워주심에 감사하오니 두 사람의 맹세를 아버지의 종 프란체스코가 들었나이다. 두 인연을 위해 항상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로 모였던 빛이 다시 나뉘어 라니우스와 범의 가슴으로 스며들어 갔다. 의식이 끝을 맺을 무렵 자신의 가슴이 따스함을 느꼈다.
“이로써 이 세계에 한 명의 스승과 한 명의 제자가 새로이 연을 맺었음을. 서의 이름을 받은 프란체스코가 선언합니다.”
그렇게 나는 라니우스 님의 제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