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점심을 먹고 카인은 수도 구경을 시켜준다며 자신을 이끌고 나왔다.
자신에게 수도는 티에르의 도축장이 있는 골목과 신전 그리고 아카데미가 전부였다. 괜히 다른 곳을 갈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카인의 소개로 돌아다니는 수도는 정말 다양한 장소가, 상점이 있었다.
서대륙의 물건을 파는 상점도, 기괴한 약품을 파는 상점도, 귀족들을 위한 호화로운 상점도 있었다.
상가지구만을 돌아다녔는데도 어느새 해가 져가고 있었다.
“넌 어떻게 이런 걸 다 알고 있어?”
“나야 뭐… 여기저기 다니는 게 일상이기도 했고, 수도에는 오래 있었으니까.”
자신과 카인이 평민이었지만, 내성을 다니는 데는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둘이 입고 있는 코트 덕분이었다.
아카데미의 정규 복장인 코트를 입고 다니는 두 아이는 오히려 환영을 받았다. 적어도 내성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 아카데미 학생들은 콜로세움의 검투사들과 다를 바 없었다.
누가 과연 초인의 제자가 될 것인가, 누가 가장 일류의 경지에 오를 것인가 등을 내기하는 도박장의 존재 때문이었다.
아카데미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존재하는 이 도박장은 내성 주민들의, 그리고 귀족들의 가장 애정하는 유희였다.
자신의 안목을 자랑할 수도 있었고, 일확천금을 얻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덕분인지 내성을 돌아다니는 데 있어서 오히려 환대를 받았으면 받았지 냉대를 받지 않은, 범과 카인이었다.
카인의 덕에 여기저기를 구경하게 되자 보답하고 싶어서 카인을 티에르의 도축장으로 이끌었다.
“티에르 님! 저 왔어요!”
평소와는 다르게 매우 의기소침하게 인사하는 카인이었다.
“안….안녕하세요…”
“범이 왔냐. 넌… ‘바람이 머물다 간’ 후계 아니냐. 왜 여기에 온 거지?”
카인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는 티에르였다. 인상을 살짝 찌푸리는 티에르는 화난 야수와 같았다.
“어? 티에르 님도 카인을 아세요? 저랑 같은 방을 쓰는 친구예요!”
“허… 너도 참 귀찮은 꼬맹이를 친구로 삼았구나.”
“카인은 어떻게 아세요?”
“음… 귀찮은 꼬맹이?”
“헤헤헤…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시절이라…”
“흠… 불과 반년 조금 넘은 것 같다만…?”
“죄송합니다!”
“뭐… 됐다. 네가 처음도 아니고, 넌 어리기라도 하니. 그나저나 무슨 일이냐.”
“아… 카인이 저 수도 구경시켜줬는데, 저도 무언가 구경도 시켜주고 보답도 해주고 싶었었어요. 혹시… 괜찮을까요?”
그 말에 놀라는 카인, 반면에 흐뭇해하는 티에르였다.
“그래. 오늘 갓 들어온 불스가 몇 있으니 도축해가라. 다만, 도축장 내부로는 꼬맹이는 못 들어간다.”
“감사합니다! 카인… 잠깐 기다려도 괜찮겠어?”
“진열장은 들어가도 된다.”
“응! 응! 천천히 다녀와!! 진열장 구경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거데! 경매에 들어가는 귀한 고기도 많아서 함부로 못 보는 건데!”
신나하는 카인을 뒤로하고 도축장으로 들어갔다. 도축장에서 가장 신선해 보이는 불스 고기를 중앙으로 가져왔다.
도축이 좋았다. 아직 어렵고 힘들지만, 마음이 고요해지는 이 순간이 좋았다. 자신도 도축을 좋아하는데도 도축을 하는 티에르 님을 무시했다는 것이 우스웠다.
‘안심만 떼어 가자.’
아직 할 수 있는 정형은 아직은 몇몇 고기 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무엇을 도축해도 길이 보인다고 하셨는데 멀고 먼일 같았다.
재능을 항상 다룰 수 있게 된 이후로 도축에 속도가 매우 빨라졌다. 금세 필요한 부분만을 정형한 뒤 나서는 범이었다.
“카인! 다했어. 여태 구경 중이야?”
“벌써?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내가 다 정형 하는 게 아니니까. 오늘은 그냥 우리가 먹을 부위만 가져가는 거야.”
“대단하다! 손에 들고 있는 게 그거야?”
“응. 티에르 님! 불스에서 안심 부위만 떼어 가요!”
“비싼 걸 가지고 가는구나. 주급에서 깔 테니 그리 알아라!”
“네!”
도축장을 나오자 카인이 걱정이 담긴 어투로 말을 건넸다.
“범아…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아? 이거? 아니야. 어차피 주급에서 안 까실 거야. 말만 저리 하시구, 그리고 의외로 주급 많이 받아서 괜찮아.”
“정말? 우와…. 벌써 돈도 벌구… 대단하다!”
“영영 돈 벌 필요가 없는 네가 더 대단하다 야.”
“아니야…. 일 엄청 많아…. 성년 되기 싫다…”
“복에 넘치는 소리 하기는. 여관으로 가자. 너네 여관 요리사님이 요리 진짜 잘하시는 거 같더라. 완전 기대돼. 가면 유모도 같이 먹자고 하자.”
*
여관으로 돌아와 주방장에게 고기를 건네주었다. 고기를 건네주자 새색시를 바라보는 서방의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주방장을 피해 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피신한 범과 다르게 카인은 유모에게 도축장에 관해서 설명과 자랑을 늘어놓고 있었다.
“유모… 그래서…. 나 범이한테 말하고 싶은데…?”
카인의 이야기를 웃으며 들어주던 유모가 단호한 표정이 되어서 말했다.
“도련님. 안돼요. 적어도 성년이 되셔야 해요.”
“15살이면…. 너무 멀었잖아… 범이는 믿어두 된다고!”
“그렇다면 2서클에 하루빨리 오르시면 되겠네요!”
“2서클….하… 그럼 이런저런 걸 알려주는 건 괜찮지?”
“네! 어차피 도련님이 적당히 하시겠지요.”
“어…으……. 너무해…”
“괜찮아요! 도련님은 충분히 잘하실 수 있어요!”
“후…그래. 알았어. 그럼 밥 먹으러 가자. 범이가 유모도 먹으라구 유모 몫까지 챙겨왔어!”
“어머? 어디 사는 무심한 누구와는 다르게 선물도 가지고 오시네요?”
“언…언… 언제는! 내 미소만으로 족하다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요~ 도련님도 안 준 선물을 받아보러 갈까요오~?”
“유모오오!!”
카인은 범을 데리고 식당으로 내려왔다. 곧이어 셋이 앉은 식탁으로 주방장이 직접 음식을 가지고 나왔다.
접시는 간단했다. 구워진 안심과 함께 익힌 채소들이 같이 나왔다.
“범 님 덕분에. 귀한 재료로 요리를 할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접시를 내려놓으며 범에게 말하는 주방장이었다.
“아니에요! 이렇게 요리를 잘 해 주셔서 감사한걸요! 잘 먹을게요!”
“제가 주방에 있는 동안은 언제든 찾아와 주십시오. 특히, 이런 재료를 가지고 오신 날은 더더욱 환영합니다. 그럼 맛있게 식사하시지요.”
주방장은 말을 마치고 다시 들어갔다.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고기를 자르는 순간, 부드러운 버터를 자르듯이 저항 없이 나이프가 들어갔다.
“우와…. 범아! 고기가… 고기가….너무 부드러워!!”
카인의 입에는 이미 고기가 들어있었다. 고기를 들어서 입에 넣는 순간 진한 육향이 퍼져 나왔다.
이빨에 닿는 순간 녹아버리는 고기는 부드러움의 극치였다. 그 기분 좋은 식감이, 향이, 맛이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와…. 진짜… 맛있다…”
“범 님 덕분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네요. 정말 감사해요!”
“저도… 이렇게 맛있을 줄은 몰랐어요. 주방장님이… 실력이 대단하시네요!”
순식간이었다. 각자의 앞에 놓인 고기 사라진 것은. 양이 적지 않았음에도 세 사람의 표정에는 동일하게 아쉬운 표정이 그려져 있었다.
황홀한 식사가 순식간에 지나가듯이, 첫 방학도 금방 지나갔다. 어느새 방학이 끝나가고 아카데미에서의 첫 수련회가 다가왔다.
*
방학이 끝나기 며칠 전 미리 들어온 아카데미는, 아직 방학 기간인 데도 불구하고 매우 분주했다.
수련회 때문이었다. 수련회가 다른 아카데미와 수도 아카데미와의 가장 큰 차이를 만드는 부분이었다.
다른 아카데미에서도 수련회가 있지만, 오롯이 수도 아카데미에서만 수호산맥으로 향하는 수련회가 존재했다.
1달을 수호산맥의 수호성 중 하나인 블레어성에서 보내면서 실전을 경험한다.
1~3학년은 대부분 잡일을, 4~6학년은 경계와 순찰을, 7~8학년과 특별한 몇몇의 학생은 수호 용병대에 소속되어 진짜 수호산맥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 수련회가 곧 다가오는 것이었다. 설레었다.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수호성을 가는 것도, 수호산맥을 경험하는 것도 너무 설레는 일이었다.
그런 설렘을 가지고 있기를 며칠, 드디어 수업이 시작되었다.
“다들 방학은 잘 보내고 오셨나요?”
“네!”
“우선 수업하기 전에 여러분이 작성해야 할 게 있어요. 제한의 계약서를 아는 학생이 있나요?”
량이가 손을 들었다.
“상호 간에 계약을 맺을 때 강제성을 부여해주는 계약서에요! 원래 신전의 언약의 서가 있지만, 너무 구하기 힘들어서 만들어진 계약서에요!”
“맞아요! 량이가 정확하게 알고 있네요. 그리고 아카데미에서는 입학서라고도 해요. 왜 그럴까요?”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 그것이 진짜 아카데미 학생이 되었다는 조건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조금은 무미건조하게 말하는 에밋이었다.
“맞아요! 드디어 여러분이 계약서를 작성하는 시기가 왔어요! 각자 나눠줄 텐데 잘 읽어보고 서명하면 돼요.”
선생님이 나누어준 계약서에는 간단명료한 조건이 쓰여 있었다.
-(계약자의 이름)은 아카데미 졸업 전까지 아카데미에서 배운 내용을 외부에 전하지 않는다. 이는 졸업 시에 졸업의 전당에서만 파기할 수 있다.-
이미 맺어본 적이 있는 계약이었다. 다만 그 계약서의 질이 달랐다. 전생의 계약서는 양피지로 된 가장 하급의 계약서였다.
물론 계약서 자체는 귀한 물건이긴 했지만, 지금 손에 들린 계약서는 가죽으로 되어있고 꼭지 부분들이 금색의 금속으로 마감되어있었다.
중급의 계약서였다. 언약의 서에 비견되는 최상급 계약서나 그 아래의 상급은 아닐지언정 결코 흔한 계약서가 아녔다.
이런 사소한 부분의 차이가 수도 아카데미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서명하고 자신의 피로, 인을 찍고 난 후에 모두가 선생님께 제출했다.
“자! 그럼 수업을 시작해 볼까요? 오늘 수업은 수련회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가질 거예요. 모두 아카데미의 수련회가 무엇인지 알지요?”
“수호산맥으로 다녀오는 수련회 입니다.”
으쓱거리며 말하는 로안을 보자, 변하지 않는 것도 있구나 싶었다.
“맞아요. 그럼 수도에서 블레어 수호성까지 어떻게 갈까요?”
“……”
“바로 워프를 통해서 갈 거예요! 대단하죠?”
‘워…프? 워프는 허락되지 않는 경지 아니었나…?’
하지만, 선생님의 말에 놀란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모든 아이가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했다.
“역시. 우리 반 학생들은 다 알고 있군요. 그럼 에밋이 설명해 볼까요?”
“본래 허락되지 않는 경지지만 성유물로 가능합니다. [프린시오 비블리아]가 세계 유일의 성유물로 알려 있으나 각 대륙의 패권을 인정받아 받을 수 있는 성유물이 하나 더 있습니다.”
에밋의 설명에 귀를 기울여 경청했다.
“[제미누스 아스트룸] 이름 그대로 쌍둥이 별입니다. 서대륙에 하나 동대륙에 하나 있는 것으로 별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5개의 꼭짓점과 중앙의 조각으로 서로를 이어주는 포털을 생성하는 성유물입니다.”
명료한 설명이었다. 에밋은 언제나 차분하고 또박또박했다. 자신을 흥미로운 눈으로 보는 것을 제외하고는 감정표현이 드물었다.
‘하… 역시…. 태생이 다르면 배우는 게 다르구먼.’
왠지 조금은 씁쓸하면서 열이 받는다.
이어지는 수업은 굉장히 재밌었다. 몬스터와 마수에 대한 설명도 굉장히 흥미로웠다.
“자 그럼. 수련회에서 해야 하는 일은 다음 시간에 설명해 줄게요! 그리고 다음 수업은 종합1반 아이들과 함께할 거예요. 그럼 조금 이따 봐요.”
선생님이 나가자 곧장 몇몇의 사용인들이 책상과 의자를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범이 들으라는 듯이 말하는 아이가 있었다.
“쳇. 다 알고 있는 내용인데, 고아 하나 때문에 시간만 낭비했어. 이래서 아무나 받아주면 안 되는 건데…”
역시나 로안이었다. 그냥 있으면 신경끄려 했지만, 자신을 긁는 로안에게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였다.
“그놈에 고아. 고아 질리지도 않니? 너도 여기서 성이 없어. 아니면 범에게 밀리니까 배경이라도 들이미는 거니?”
범 대신 나선 아이가 있으니, 량이었다. 몇 번 대화를 나눈 적은 있지만 친해진 것은 아니었는데 나서준 량이가 고맙기도 의아하기도 했다.
“넌 또 뭐냐. 이래서 평민들이란. 쯧.”
“이래서 바보란… 쯧 배경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감히! 평민 따위가!! 들어보지도 못한 평민 놈이!”
로안의 언성이 점점 높아지자 에밋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만해. 너가 감히 평민이라고 하는 아이가 누구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이야기하면 후회할 거야. 그리고 량이 말이 맞아. 아카데미에는 성이 없어.”
“아니… 공녀님. 어째서 저런 평민 따위…”
“그만해. 너가 그렇게 무시하는 량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리고 범이에게 고아라고 하는 것도 그만하고.”
“하…허!”
저 스스로 열을 받아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로안이었다.
“에밋, 량. 고마워 진심으로”
“아니야! 나름 짝궁이잖아! 그리고 난 너가 대단하다고 생각해!”
“사실이니까. 아카데미에서는 성이 없어. 그리고 넌 꽤 재밌기도 하고.”
“어… 내가 재밌어?”
“응. 흥미롭지. 고아임에도 당당하고 실력도 좋고 노력도 엄청나게 하고. 아무리 아카데미에 성이 없다지만, 너처럼 당당한 애는 없을걸? 케이스는 다르지만, 옆에 하나 더 있나?”
“칭찬…인가? 내… 옆에?”
“나! 나야! 난 네 자기 확신이 좋아! 너나 나처럼 성이 없는 아이가 확신을 가지는 건 정말 어렵거든.”
“글쎄…. 내가 자기 확신이 있는 건가… 어찌 되었든 진짜 고맙다.”
항상 혼자였고 귀족은 나쁘다는 공식이 머리에 있었다. 하지만 조금이지만 괜찮은 귀족이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공작가의 공녀인 에밋은 의외로 말이 많고 밝은 아이였다. 평민이라는 량이는 스승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했다.
둘 다 배경이 뛰어남에도 그를 타고 위세를 부리지 않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리고 어느새 반 아이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다만, 뒤에서 스칼렛과 로안. 둘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 보고 있었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면서 종합 1반의 아이들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