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어느새 아카데미의 방학이 1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새벽에는 언제나 라니우스 님의 오두막 공터에서 서킷을 수련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자신의 내부에 여덟 개의 탑을 중심으로 돌고 도는 마나를 느끼고 있었다.
서킷을 수련하면서 어느새 자신도 바람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마나가 하나의 탑으로 몰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당황하려는 찰나에 라니우스 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중해라!”
라니우스 님의 말에 다시 차분해질 수 있었다. 오른쪽 맨 위의 탑으로 마나가 향하더니 그 탑을 통해서 마나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 바람이구나.”
첫 번째 탑에서 나오는 바람은 거세지도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그런 바람이었다.
눈을 감고 있는 범을 중심으로 바람이, 산들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를 바라보는 라니우스는 놀라기도 흐뭇하기도 했다.
‘생각보다 훨씬… 빨라… 벌써 하나의 탑을 개방하다니…’
서킷 ‘바람의 탑’은 마나가 쌓이는 효율이 다른 최상위의 서킷에 비해서는 손색이 있는 편이었다.
그만해도 엄청난 양이긴 하지만 그 ‘안드로니쿠스’가 말년에 집대성한 서킷이라기에는 부족함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라니우스가 범에게 ‘바람의 탑’을 배우고 익히게 한 이유에는 지금의 범이 겪고 있는 현상에 있었다.
‘바람의 탑’의 가장 특이한 점은 내부에 만들어지는 8개의 탑이였다. 마나 홀에 만들어지는 이 8개의 탑은 바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 질수록 개방 된다.
개방이 되면 될수록 각각의 바람을 다룰 수 있게 된다. 무기에, 몸짓에 바람을 담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하나의 선천 재능이 추가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엄청난 효과였다.
여러 속성을 쓰는 것은 오로지 마법사 또는 아티팩트뿐이라는 것이 정설이었고, 굳어진 지식이었다.
서킷을 통해서 하나의 속성을 사용한다는 것은 상상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이내 바람이 잦아들고 범의 눈이 떠졌다.
“축하한다. 꼬맹이.”
“라니우스 님… 제가… 탑을 개방했어요… 이건 정말…”
“수고했다. 생각보다 빠르게 탑을 열었구나. 이제는 네 재능을 누가 보아도 바람에 관련된 기본 재능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 정말… 대단해요!”
생각지도 못한 부분을 라니우스 님의 말로 깨달은 범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대단한 서킷을 배우게 되었는지도 새삼 알게 된 범이었다.
“꼬맹… 아니 범아.”
“네…?!”
“조금만 더 노력하거라.”
“네…?”
“아니다. 어서 수업에 가려무나. 늦겠다.”
“네! 감사합니다. 라니우스 님께는 항상 너무 많은 것을 받는 거 같아서 언제나 감사해요!”
“빨리 가!”
“네!”
서둘러 뛰어가는 범을 바라보면서 라니우스는 그저 흐뭇하고 즐거웠다.
“생각보다… 훨씬 빨라. 허! 나도 모르게 제자로 삼겠다고 말할 뻔하다니. 허! 허허!”
*
그날 저녁. 라니우스 님의 오두막으로 향했다. 단도를 받은 뒤로는 격일로 도축장과 라니우스 님의 오두막을 오가고 있는 범이었다.
오두막이 보이자 그 앞에 공터에 나무로 만들어진 도 두 개가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도착하는 것과 동시에 오두막 문이 열리고 라니우스 님이 나왔다.
“꼬맹이. 오늘 수업은 대련이다.”
“네?! 대련이요??”
“오늘 탑 하나를 개방하지 않았느냐.”
“네!”
“‘바람의 탑’은 따로 도식이 없는 서킷이다. 서킷을 완벽히 다루고자 한다면 그만큼 많은 경험으로 너에게 바람을 맞추어 가야하는 것이다. 오늘 깨운 바람을 알아간다고 생각하거라.”
“아…. 그래서 따로 무기술이 없다고 되어있는 거군요….”
“서킷을 돌리면서 네가 개방한 탑의 바람을 느끼며 대련에 임하거라.”
“네!”
바닥에 있는 도를 하나 쥐고 라니우스 님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서서 서킷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마나가 자신의 몸 안에서 도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첫 번째 탑을 개방했다.
마나의 움직임이 일순 변했다. 집중해야만 느낄 수 있는 변화였다. 살랑 살랑거리며 움직이는 마나가, 바람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주변에서 바람들이 불기 시작했다. 미세하지만 산들 산들거리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서 도를 뽑았다.
평소와는 다르게 나오는 도였다. 본래 대련에서 발도를 하나의 공격으로 사용하던 것이었는데 지금의 발도는 부드러웠다.
‘역시…. 감각은 타고났구나!’
부드럽게 도가 나오는 것을 보자 라니우스가 먼저 달려들었다. 가볍게 도를 내리치는 라니우스.
범은 도를 맞대면서 가볍게 방향을 바꾸고는 같이 도를 내렸다. 내려간 도는 자연스레 휘돌아 라니우스의 머리를 향했다.
머리를 향해 오는 도를 바깥으로 쳐내고 목을 향해 다가오는 라니우스의 도.
둘의 대련은 마치 약속대련 같았다. 끊임없이 범을 베어 들어가는 라니우스의 도. 그 도를 따라 부드럽게 움직이는 범의 도.
하나의 춤처럼 움직이는 두 사람의 도였지만 정작 두 사람은 한 발 이상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몇번이나 도가 서로 부딪혀 갈 무렵 라니우스가 입을 열었다.
“산들바람은, 바람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한다. 그런데 너는 고요하구나. 중심이 고요한 것은 태풍뿐이니 지금의 너는 무엇이더냐.”
라니우스의 말에 범은 머리에 벼락이 처지는 것만 같았다. 그와 동시에 범의 움직임이 변화하였다.
라니우스의 도를 따라 내려가는 것만이 아닌 범이 뒤로 훌쩍 뛰어나가기도 하고 앞으로 나서기도 하면서 움직이는 반경이 넓어졌다.
아직은 어색한 모습이 보이기는 했다. 중간중간 움직임이 끊어지기도 서킷이 중간에 부드럽게 이어지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조금씩이지만 착실하게 범의 도는, 아니 범은 산들바람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리고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 두 사람의 대련은 끝이 났다.
범의 전시에는 땀이 흐르고 팔과 다리는 후들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에는 미소가 환하게 걸쳐 있었다.
“수고했다. 처음치고 정말 많이 따라왔다. 어서 앉아서 서킷을 돌리거라.”
라니우스 님의 말에 서킷을 차분히 가동 시켰다. 어느새 서킷의 중심이 첫 번째 탑이 돼 있었다.
대련에 대해서, 산들바람에 대해서 생각할수록 바람을 깨달아가고 중심이 되는 첫 번째 탑이 단단하게 쌓여가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뜨자 어느새 밤이 깊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찬연히 빛나는 달이 꽤 깊은 밤이 되었음을 알게 해주었다.
라니우스가 해준 저녁을 먹고 서둘러 기숙사로 뛰어가야만 했다.
항상 가는 길이었건만, 가는 동안 바람이 자신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는 느낌이 들어 너무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기숙사로 향하는 길에서 바람을 만끽할 수 있었다.
*
방학이 이제 정말 코앞으로 다가왔다. 5일밖에 않았다. 자신의 목표대로 2시간 안으로 기초체력 훈련을 마치게 되었다.
라니우스 님의 말에 따라서 오 후 수업시간에 끊임없이 기초 도법을 수련하던 자신에게 다가오는 아이가 있었다.
“범.”
한창 휘두르던 도를 멈추게 한 아이는 로사였다. 대충 예상하던 바이지만 놀라긴 놀랐다.
“로사?”
“나와 대련하자.”
굉장히 비장하게 말하는 로사를 보고 순간 웃을 뻔했지만 겨우 참아낼 수 있었다.
‘진짜 위대한 기사, 무의 정점이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거냐… 어려서 그런가…’
“그래. 좋아”
“진검으로 하자.”
“어…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닌데…?”
둘의 대화가 시작되면서 어느새 아이들은 각자의 수련을 멈추고 둘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오늘이 대련의 마지막 날이니 허락해 주마. 마나를 사용하는 것도 허락해 주마. 단! 머리와 심장, 그리고 마나 홀을 공격하는 것은 금지한다.”
이어지는 도미토르 님의 말에 아이들이 모두가 놀랐다. 당연히 마나를 사용하면 로사가 이길 것이기에 도미토르 님의 결정이 의아했다.
“마나를 사용하는 것은… 범에게 너무 불리하지 않을까요?”
로사가 반문했지만, 그 반문에 어이없어하는 도미토르 님이었다.
‘진짜… 그놈에 고아라는 건 어떻게 떨어지지를 않냐. 어이가 없네…. 아닌가… 내가 말이 안 되는 존재이긴 하지…’
“로사. 너희는 아직 10살이다. 재능의 차이가, 마나의 차이가 얼마나 날 것으로 생각하느냐?. 벌써부터 마나가, 재능이 승패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더냐? 하!”
도미토르 님에 말에 충격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은 로사였다. 마치 자신이 질 것처럼 이야기하는 도미토르가 인정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로사의 말에 어이가 없는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나저나 로사도 로산데… 도미토르 님도 좀 그러네… 조금 더 나이를 먹으면 당연히 내가 질 것처럼 이야기하시네… 참…’
일반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맞는 말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너무도 싫었다.
귀족은 당연히 이길 것이다. 재능의 차이는 명백하다. 이 소리들은 정말 들어도 들어도 듣기 싫은 말이었다.
‘진짜 들어도 들어도 기분 나쁘기는 어떻게 똑같지… 아니… 더 기분 나쁜 거 같기도…’
표정을 지우고 자신의 도를 허리에 찼다. 그리고 어느새 연무장의 중심에 자신과 로사가 자리했다.
“대련의 시작은 저번과 같다. 동전이 떨어지면 시작한다.”
도미토르 님의 말이 끝나고 ‘팅!’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로사의 눈이 자신을 직시하고 있었다.
‘탱!’하는 소리와 함께 로사가 달려들었다. 마나 사용을 보여주듯 그 속도가 몹시 빨랐다.
범의 어깨를 향해 찔러 들어가는 로사의 레이피어. 그런 레이피어를 부드럽게 옆으로 쳐내고 팔을 향해 베어 들어가는 범의 도.
범의 도를 향해서 레이피어가 베어 들어왔다. 도가 튕겨 나가면서 범도 자연스럽게 옆으로 물러났다.
충돌하고 물러난 것은 범이였지만, 표정이 구겨진 것은 로사였다.
“너…”
말을 삼키고 다시 한번 찔러 들어오는 로사였다. 이번에는 치골을 향해서 들어오는 레이피어.
범은 찔러 들어오는 레이피어를 쳐내기 위해 도를 뻗었다. 순간 다시 들어갔다가 어깨를 향해 들어오는 레이피어.
범은 그대로 아래로 굴렀다. 구른 뒤 일어나면서 로사의 배를 걷어차는 범. 생각지 못한 공격에 그대로 날아가는 로사였다.
그대로 따라가서 로사의 다리를 베어 들어가는 범의 도. 하지만 물러나는 로사를 보며 범도 다시 물러났다.
생각지도 못한 양상의 대련에 아이들이 모두 빠져들어 갔다. 로사는 직선적이고 공격적이었다면 범은 부드러웠다.
평상시의 범과 다르게 방어를 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범의 양상에 아이들은 역시나라고 생각했다.
“역시… 고아란. 마나를 쓰니 결국 이런 거 봐.”
“로사 님이 대단하신 겁니다. 마나를 사용하는 로사 님은 견습 기사와도 검을 나누실 수 있는 정도니까요.”
범이 방어에 급급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기에, 결국 이렇구나 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이었다.
오직 도미토르와 로사만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동안 내가 봐 온 범이랑은 너무 다른데… 라니우스 님께서 아무리 초인이라고 하실지라도… 이건 너무 다른데…’
‘그간 내가 관찰한 범이랑 왜 이렇게 다른 거지? 분명 내가 공격하는데 왜 내가 지고 있는 거 같지? 뭐지? 분명 약점을 공격하고 있는데… 왜! 왜!!’
얼마 되지 않은 시간 동안 대치 상태를 유지하던 중 로사의 자세가 변했다. 로사의 자세가 변하자 로사 주변의 공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레이피어를 얼굴 앞으로 드는 순간. ‘팡’ 소리와 함께 로사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어 왔다.
범의 앞에 도달한 순간, 무릎을 구부려 범의 가슴을 아래에서 위로 관통하는 방향으로 레이피어가 찔러 들어갔다.
모두 대련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범의 도가 레이피어를 아래에서부터 타고 올라갔다.
힘이 있는 동작이 아녔다. 그저 자연스럽게 타고 올라가는 범의 도. 두 무기가 맞닿는 소리가 ‘스르릉’ 나며 레이피어가 그대로 올라갔다.
범의 도가 어느새 로사의 목 앞에 멈추어 섰다. 바람 한 자락이 로사의 머리를 흔들며 지나갔다.
“그만! 범의 승리다.”
무엇이 일어난 것인지 명확히 본 아이가 없었다. 그저 ‘팡’ 하더니 ‘스르릉’ 하고 범의 도가 로사의 목의 앞에 놓여있었다.
로사와 범 그리고 도미토르만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을 따름이었다.
“말도…안돼…내…내가… 또…?”
“아가씨…”
아이들의 웅성거림은 조금씩 켜졌고, 로사는 레이피어를 늘어놓은 채 넋이 나가 있었다.
“둘 다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도미토르의 말에 반응한 것은 범뿐이었다.
“이번 승패에 너무 연연하지 말도록. 아직 너희는 갈 길이 멀고 먼 아이들일 뿐이다.”
도미토르의 말이 이어졌지만, 로사는 그저 넋을 놓은 채 서 있었다. 그런 로사를 호통을 치는 대신에 그대로 두는 도미토르였다.
다른 아이들을 정리시키고 해산을 시킨 도미토르였다. 남아 있으려는 프라우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주라며 억지로 숙소로 보내기까지 한 도미토르였다.
모두가 나간 연무장. 로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넋을 잃을 채로 있었다.
‘덜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