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154화 (154/155)

154화 월드 시리즈 (6)

-100마일이라니, 제가 잘못 본 건 아니겠죠? 이곳은 쿠어스 필드가 아니라 펜웨이 파크인데, 유현 선수가 어떻게 100마일을 기록한 거죠?

-구속 측정이 잘못됐을 수도 있고, 극한의 집중력을 발휘한 상황에서 자신도 모르게 최고의 공을 던졌을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건 오늘 유현 선수의 컨디션이 베스트라는 겁니다. 전날 구원 등판 따위는 그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확실히 컨디션이 좋아 보이긴 합니다. 포심 패스트볼의 압도적인 구위에 보스턴 레드삭스의 타자들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걸 보면 말이죠.

-그래서인지 몰라도 볼 배합이 단순합니다. 문제는 단순한 볼 배합이 제대로 먹히고 있다는 거겠죠.

월드 시리즈 5차전의 유현은 평소와 달랐다. 컨디션이 좋아도 너무 좋다 보니 찍어 누르는 피칭을 해도 보스턴 레드삭스 타자들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4차전에서 나름 타선이 살아나는 모습을 보여 줬던 보스턴 레드삭스지만, 유현의 압도적인 구위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거기에 4회 말.

유현이 100마일짜리 포심 패스트볼을 던져 강태영을 루킹 삼진으로 돌려세웠을 때, 보스턴 레드삭스 타자들은 직감했다.

아. 오늘 유현을 공략하기 힘들겠구나.

그래서 보스턴 레드삭스 타자들은 생각을 바꿨다. 공략이 힘들다면 최대한 물고 늘어지면서 한계 투구 수까지 빠르게 도달하게 만들어 마운드에서 끌어내리는 걸로 말이다.

8회 전에만 유현을 끌어내릴 수 있다면 3점 차 정도는 얼마든지 뒤집거나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그마저도 쉽지 않다는 거였다.

적극적으로 스윙을 하면 카운트가 몰린 상황에서 스플리터에 당하고, 적극적으로 스윙하지 않으면 보더라인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포심 패스트볼을 넋 놓고 쳐다보다가 루킹 삼진을 당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삼진만 하나둘씩 추가되는 상황에서, 유현은 7회 말까지 무려 18개의 삼진을 잡아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투구 수조차 많이 기록하지 않았다. 보스턴 레드삭스 타자들이 유현의 페이스에 알아서 말려들어 준 덕분이었다.

8회 말.

강태영이 세 번째 타석에 들어섰다.

보스턴 레드삭스 입장에서는 사실상 마지막 찬스였다. 투구 수 81구를 기록 중인 유현을 클린업 트리오가 공략해 주지 못한다면, 9회 말까지 마운드를 지킨다고 봐야 하니까.

82구째.

딱!

강태영이 몸쪽으로 파고드는 커터를 노려봤지만 파울이 되고 말았다. 배트 안쪽으로 파고드는 커터를 억지로 끌어 당겨서 어렵사리 파울을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동시에 강태영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제 구원등판한 놈이 이렇게 좋은 공 던져도 되는 거야? 이러니까 도핑 검사 받지. 후우. 오늘 경기…… 힘들지도 모르겠는데?’

유현이 오늘 경기에서 100마일을 던진 건 딱 한 번, 강태영의 두 번째 타석에서 루킹 삼진을 잡을 때가 유일했다.

그 외에는 100마일은커녕 99마일조차 나오지 않았기에, 구속이 잘못 측정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중계진조차 구속이 잘못 측정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꺼냈으니까.

하지만 강태영의 생각은 달랐다.

그때 유현이 던졌던 공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알면서도 못 칠 것 같은 그런 공이었다. 전광판이 잘못된 게 아니라 그 상황에서 유현이 극한의 집중력을 발휘해 최고의 공을 던진 거였다.

유현이 던진 공을 타석에서 직접 본 강태영이기에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승부처에서 다시 한 번 100마일짜리 포심 패스트볼을 던질 거라는 걸 말이다.

‘의식하고 던지는 게 아니라는 걸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지, 월드 시리즈 원정 경기에서 미친 듯한 야유를 들으면서도 집중하는 걸 불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네.’

보스턴 레드삭스 팬들은 시종일관 유현에게 야유를 보내고 있었고, 유현이 한시라도 빨리 마운드에서 내려가 보스턴 레드삭스가 역전 찬스를 잡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 와중에도 유현은 묵묵히 제 공을 던지며 집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3차전에서 존 그레이가 흔들렸던 건 보스턴의 추운 날씨에 적응하지 못해서이기도 하지만, 극성인 보스턴 팬들의 야유에 위축돼서이기도 했다.

강태영은 유현이 야유를 듣고 조금이라도 흔들려 주기를 바랐다. 그래야 보스턴 레드삭스가 파고들 빈틈이 생길 테니까.

애석하게도 현실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8회 말 타석에 들어서서 유현이 던진 초구 커터를 어렵사리 파울로 만든 순간, 손바닥 전체로 퍼지는 짜릿한 통증을 느끼며 강태영은 확신했다.

레드삭스의 2020시즌은 오늘로 끝이라고.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강태영이 할 수 있는 건, 승부를 8구까지 끌고 간 뒤 뚝 떨어지는 스플리터에 헛스윙 삼진을 당하는 게 전부였다.

유현은 5구를 던져 J.D.마르티네즈도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8회를 끝마쳤다.

94구를 투구해 8이닝 무피안타 1사사구 20탈삼진 무실점.

아웃카운트 세 개를 남겨 둔 상황에서, 유현이 월드 시리즈 우승을 확정짓기 위해 9회 말 또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 * *

-유현 선수가 9회 말에도 마운드에 오릅니다. 스코어가 6대0으로 벌어진 상황에서도 콜로라도 로키스는 방심하지 않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다른 투수를 올린다면 로키스의 감독은 아마 평생 먹을 욕을 오늘 하루 동안 다 먹을 수 있을 겁니다.

-하하하. 맞는 말입니다. 대기록을 앞둔 투수를 내려서는 안 되죠. 심지어 투구 수도 8회까지 94구일 정도로 잘 관리했는데 말이죠.

-2020시즌 메이저리그를 제패한 괴물이 시즌의 끝을 장식할 수 있을까 지켜보시길 바랍니다. 남은 아웃카운트는 단 세 개입니다.

월드 시리즈 역사상 퍼펙트게임이 나온 건 단 한 번 있었다.

1956년.

뉴욕 양키스와 브루클린 다저스의 월드 시리즈 5차전에서 양키스 소속 투수인 돈 라센이 기록한 게 유일무이한 월드 시리즈 퍼펙트게임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월드시리즈 노히트 게임은 나온 적이 없다. 최고의 무대에서 긴장하지 않고 최고의 공을 던지며 수비수들의 도움마저 완벽하게 받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역대 최초의 월드시리즈 노히트 게임에 한 발자국만이 남은 상황, 거기에 9이닝 최다 탈삼진 기록 갱신을 다시 한 번 눈앞에 두게 됐다.

유현이 8회까지 잡은 삼진은 20개.

9회 말에 탈삼진 1개를 잡으면 타이, 2개나 3개를 잡으면 자신이 세웠던 신기록을 다시 한 번 갱신할 수 있는 상황.

유현은 긴장하지 않았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마운드에 올랐다.

월드 시리즈 최초의 노히트 게임 달성과 9이닝 최다 탈삼진 기록을 갱신이라는 대기록 두 개를 동시에 앞두고 있다는 걸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흔들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공을 잡은 유현은 짙은 아쉬움을 느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기서 블론 세이브를 기록하고 5차전을 패배하면, 월드 시리즈는 7차전까지 가게 될까? 그럼 봉식이와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며칠이라도 더 늘어나겠지?

말도 안 되는 생각이란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유현은 봉식이와의 예고된 이별에 짙은 아쉬움을 느꼈다.

봉식이가 아니었다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지도, 대전 펠컨스에서 에이스로 활약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2018시즌에 2군에서 머물다가 결국 야구를 포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유현은 지금의 자신이 존재하는 건 봉식이의 도움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봉식이는 유현에게 올바른 길을 가르쳐 줬고, 유현은 그 길 위를 죽어라 뛰어난 끝에 마침내 그 끝을 볼 수 있게 됐다.

이제는 봉식이를 놓아 줘야 한다.

일찌감치 예고된 이별임에도 마운드에 오른 유현은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그렇다고 피칭이 흔들리진 않았다.

유현은 두 타자를 모두 탈삼진으로 돌려세우며 2아웃을 잡아냈다.

22탈삼진으로 9이닝 최다 탈삼진 기록을 갈아치우고 월드 시리즈 최초의 노히트 게임에 아웃카운트 단 1개만을 남겨 둔 상황.

유현이 공인구를 꽉 움켜쥐었다.

마지막 아웃카운트 하나만을 남겨 둔 채, 유현이 봉식이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그동안 고마웠어.’

-나야말로 고마웠다.

‘네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있을 수 없었을 거야. 시골에서 오리나 키우고 있었겠지.’

-네가 아니었다면 그 어떤 투수도 내 요구사항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을 거다. 최고의 투수를 만들기 위한 플랜은 너니까 가능했던 거야.

봉식이가 올바른 길을 가르쳐 준 건 사실이지만, 그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건 유현이 죽어라 노력한 덕분이었다.

유현이 아닌 다른 투수였다면 제대로 걸어 보지도 못한 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걸 희생해야 한다. 철저하게 인내하고 루틴을 지키며 끊임없이 고민해야만 한다.

지난 3년.

유현은 단 한순간도 빼놓지 않고 봉식이가 말한 것들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덕분에 지금의 유현이 존재하는 것이다.

유현은 봉식이에게, 봉식이는 유현에게 진심을 드러냈다.

‘결정구는 역시…….’

-당연히 그거지.

유현이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기 위해서 공을 던졌다. 결정구는 지금의 유현을 있게 만들어 준, 봉식이를 만나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배운 바로 그 구종이었다.

딱!

공이 스트라이크 존 한가운데를 파고들었다.

실투라 생각한 타자가 스윙을 하며 어렵사리 타이밍을 맞췄다 생각한 그 순간, 공이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면서 급격한 변화를 일으켰다.

좌타자의 몸쪽으로 파고든 공은 정타를 허용하지 않았다. 배트 안쪽을 맞으면서 타구에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았고, 유격수 앞으로 날아갔다.

“아웃!”

가뿐히 잡아낸 유격수가 1루를 향해 송구했고, 아웃카운트 하나가 추가로 올라갔다.

메이저리그의 2020시즌의 끝을 알리는 아웃카운트이자, 콜로라도 로키스의 첫 월드 시리즈 우승을 알리는 아웃카운트였다.

22탈삼진 노히트노런.

유현이 메이저리그 2020시즌의 마지막 경기의 피날레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 * *

우승이 확정된 그 순간.

특유의 어퍼컷 세레모니를 한 유현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포수 마크 번칠과 가볍게 포옹을 한 뒤 주먹을 맞댔다.

동시에 콜로라도 로키스 더그아웃에서 선수단이 일제히 쏟아져 나왔다. 유현을 둘러싼 선수들이 한데 뒤엉켜 환호성을 내질렀다.

-2020시즌 메이저리그 최후의 승자가 갈렸습니다. 로키스가 창단 최초로 정상에 올라섭니다.

-콜로라도 로키스가 KBO리그 출신의 투수와 대형 계약을 체결했을 때, 상당수의 언론에서는 좋은 투수에 눈이 멀어서 오버 페이를 한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하지만 콜로라도 로키스는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했습니다.

-다음 시즌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메이저리그는 매 시즌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2020시즌은 로키스의, 그리고 유현의 시대였습니다.

월드 시리즈 우승을 노리고 데려온 투수가 월드 시리즈 우승을 확정짓는 경기에서 최고의 피칭을 통해 팀에게 승리를 안겨 줬다.

콜로라도 로키스가 그토록 바라던 창단 첫 월드 시리즈 우승의 순간, 선수단의 중심에 있는 건 바로 유현이었다.

모든 선수들이 알고 있었다.

유현이 없었다면 월드 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했을 거라고, 그가 마운드 위에서 항상 최고의 모습을 보여 줬기에 우승할 수 있었다는 걸 말이다.

감독 다음으로 헹가래를 받은 것도 유현이었다.

선수단의 한가운데에서 유현은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봉식이와의 이별을 앞두고 있는 것과 별개로, 팀이 창단 첫 월드 시리즈 우승을 거머쥔 건 분명 기뿐 일이었다.

한참의 소란스런 시간이 지나간 뒤.

유현은 인터뷰를 통해 월드 시리즈 우승을 쟁취한 소감을 짧게나마 밝혔다.

“제게 주어졌던 기적에 감사합니다.”

그렇게 유현의 2020시즌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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