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월드 시리즈 (5)
단기전에서 다음 날 선발투수로 등판해야 할 투수가 중간계투로 투입해서 이닝을 분담해 주는 상황은 생각보다 자주 나오곤 했다.
벤치의 입장에서는 연장으로 가거나 접전일 때, 가장 믿음을 가지고 기용을 할 수 있는 게 1~2선발이라고 봐야 하니까.
다만 대부분은 결과가 그리 좋지 못했다.
콜로라도 로키스가 유현을 4차전에 투입한 게 자충수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 상당수의 언론들을 통해 흘러나왔다. 유현이 컨디션 관리에 실패하면서 무너지면, 자신감을 얻은 보스턴 레드삭스 타선이 챔피언십 시리즈처럼 마운드를 폭격할 수도 있다는 게 요지였다.
분위기를 타면 막기 힘든 보스턴 레드삭스의 타선과, 전날 0.2이닝을 책임져 준 유현의 컨디션이 베스트가 아닐 거라고 본 것이다.
일리 있는 이야기였다.
등판이 예정된 선발투수가 전날 구원 등판을 한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다음 날 있을 선발 등판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체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만약 유현이 5차전에서 보스턴 레드삭스 타선을 틀어막지 못한다면, 4차전에서의 구원 등판을 문제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게 당연한 상황이다.
콜로라도 로키스 벤치가 지나칠 정도로 유현에게 의존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다.
물론 유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외부에서 어떻게 떠드는지를 신경 쓰기보다는 월드 시리즈 5차전에서 우승을 확정 짓기 위한 컨디션 조절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봉식이는 스칼렛과 함께 모처럼 유현이 몸을 풀 때부터 일찌감치 머리 위에 올라타, 한시도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웬일이야? 평소였으면 더그아웃에서 해바라기 씨 까먹으면서 구경할 건데.’
-어쩌면 이번 시즌 마지막 경기일 수도 있으니까, VIP석에서 봐줘야 하지 않겠어?
‘내 정수리가 좀 편하긴 하지?’
-경기를 보기 제일 좋은 자리니까. 그래서, 컨디션은 좀 괜찮아?
‘최고야.’
유현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전날 구원 등판을 했을 때 유현이 던진 공은 7구에 불과했다. 7구로 아웃카운트 두 개를 처리하며 팀의 4차전 승리를 지켜냈다.
컨디션?
고작 7구를 투구했다고 해서 컨디션에 영향을 끼치기에는 평소의 유현이 워낙 관리를 잘했고, 거기다 봉식이의 축복이 더해지니 체력적으로 큰 어려움을 느끼기 어려웠다.
오히려 컨디션은 그 어느 때보다 좋았다.
콜로라도 로키스 벤치는 4차전에 구원 등판한 유현의 컨디션이 베스트가 아닐 수도 있다는 현실적인 걱정을 했고, 유현과 카일 프리랜드를 1+1으로 묶어서 기용함과 동시에 모든 투수들을 대기시키는 초강수를 뒀다.
월드 시리즈 우승을 위한 의지가 확고했다.
승부를 6차전으로 끌고 갈 생각이 없었다. 총력전을 통해 덴버로 돌아가지 않고 월드 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고 싶었다.
유현의 생각 또한 비슷했다.
벤치와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의 손으로 월드 시리즈 우승을 확정짓는 아웃카운트를 잡고 싶었고, 컨디션 또한 그 어느 때보다 좋아 자신감이 넘친다는 것 정도였다.
‘갈 땐 가더라도 월드 시리즈 MVP 정도는 괜찮잖아?’
* * *
처음 경험한 포스트시즌의 중압감 때문일까?
기록적인 루키 시즌을 보낸 헨리 곤잘레스와 랜디 오스틴 테이블 세터는 포스트 시즌에서 부진했고, 콜로라도 로키스 타선이 대량 득점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결정적 이유가 됐다.
득점을 만들어 내기 위한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테이블 세터가 출루한 뒤 클린업 트리오에서 쓸어 담는 것인데, 테이블 세터가 출루하지 못하는 득점을 만들어 내는 게 어려웠다.
콜로라도 로키스 감독은 되도록 타선에 변경을 주고 싶지 않는 스타일이다.
헨리 곤잘레스와 랜디 오스틴이 콜업되기 전이야 득점을 쥐어짜기 위해 유현을 상위 타순에 기용하는 등의 변칙 운용을 더러 보여 줬지만, 타선이 자리 잡은 이후로는 되도록 타순에 변화를 주지 않았다.
정해진 타순이 타자의 심리를 안정되게 해 준다고 믿었으니까.
포스트 시즌에서의 부진에도 콜로라도 로키스의 테이블 세터는 헨리 곤잘레스와 랜디 오스틴이었다. 상황에 따라 대타로 교체되기는 했지만 선발 라인업에는 변화가 없었다.
경기 후 따로 훈련을 해봐도, 호텔 주차장에서 몇 시간 동안 스윙을 하다가 잠이 들어도 타격감은 여전히 밑바닥을 기었다.
어쩌면 2020시즌에 지리는 마지막 경기가 될 수도 있는 월드 시리즈 5차전.
헨리 곤잘레스와 랜디 오스틴은 1회 초부터 간만에 연속 안타를 기록하면서 무사 1․2루의 천금 같은 찬스를 만들어 줬다.
밥상이 차려진 상황에서 침착하게 승부를 이어잔 찰리 블랙몬이 9구까지 가는 접전 끝에 체인지업을 골라내며 무사 만루.
월드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맞이한 무사 만루 찬스에서 놀란 아레나도가 타석에 들어섰다.
전날 솔로 홈런을 기록한 것을 포함, 놀란 아레나도는 포스트시즌 내내 어째서 자신이 내셔널리그 홈런 1위인지를 몸소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보스턴 레드삭스 타선의 핵이 강태영이라면 콜로라도 로키스 타선의 핵은 놀란 아레나도였다. 그리고 놀란 아레나도는 웬만해선 자신의 앞에 차려진 밥상을 놓치지 않는 타자였다.
설사 마운드에 서있는 투수가 상대 팀의 에이스라고 해도 다른 건 없었다.
딱!
그린 몬스터를 통타하는 큼지막한 싹쓸이 2루타가 터지며 스코어는 3대0, 콜로라도 로키스가 선취점을 만들어 냈다.
무려 3점이다.
5차전이 에이스 간의 맞대결이라는 걸 감안했을 때 이 점수는 제법 컸다.
마운드에 오른 유현을 상대로 3득점을 만들어가는 게 가능할까?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봐야 한다.
유현의 컨디션이 정상이라면 말이다.
“고작 7구일 수도 있지만 어제 마운드에 올랐어. 컨디션이 정상은 아닐 거야.”
“어쩌면 어제의 앤디 프리먼처럼 전력투구를 할 수도 있어.”
“유현과 카일 프리랜드를 1+1으로?”
“그럴지도 모르지. 거기에 불펜까지 총동원해서 3점을 지키려고 할 가능성이 높아.”
“뒤는 신경 쓰지 말고, 일단은 유현을 최대한 빨리 끌어내리는 것에 집중하자고. 어차피 유현을 끌어내리지 못하면 그 뒤는 없어.”
보스턴 레드삭스 선수단은 콜로라도 로키스가 유현과 카일 프리랜드를 1+1으로 기용할 거라는 걸 짐작하고서 움직였다.
유현이 전력투구를 할 거라는 것도 예상했다.
다만…….
유현이 100구 내내 전력투구를 해도 지치지 않는 괴물 같은 체력의 소유자라는 것과, 오늘 유현의 컨디션이 너무 좋다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
팡!
“스트라이크!”
1회 말.
유현이 몸쪽 꽉 차는 포심 패스트볼을 던져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아냈다.
구속은 98마일.
유현의 컨디션이 좋다는 걸 보여주는 초구였고, 보스턴 레드삭스 타자들은 더그아웃에서 유현의 피칭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조금이라도 빈틈이 있으면 후벼 파서 유현이 마운드를 오래 지키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초구 스트라이크를 수월하게 잡았던 유현은, 2구 또한 스트라이크를 잡은 뒤 볼을 연속으로 네 개나 기록하며 볼넷을 내주고 말았다.
컨디션이 좋음에도 볼넷을 내줬다.
스트라이크 존이 까다로운 주심을 상대로 몸쪽과 바깥쪽 경계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1회 초 콜로라도 로키스가 3득점을 할 수 있었던 건, 상대 투수가 스트라이크라고 생각한 코스가 몇 번이나 볼이 된 게 컸다.
오늘 주심은 유독 바깥쪽에 박한 스타일이다.
몸쪽에 강점이 있는 유현의 입장에서는 부담이 덜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트라이크 존을 명확하게 파악하지 않고 갈 순 없었다.
볼넷을 내줬지만 괜찮았다.
덕분에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수확이 있었으니까.
“스트라이크 아웃!”
유현은 우타자를 상태로 바깥쪽으로 빠지는 투심 패스트볼을 결정구로 루킹 삼진을 잡아냈다.
보더라인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투심 패스트볼에, 상대 타자는 바깥쪽에 인색한 주심의 성향을 감안해서 볼이라 판단하고 배트를 휘두르지 않았다.
반면 유현은 스트라이크라 확신했고 말이다.
고작 볼 반 개 정도 차이였지만, 선두타자를 상대로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을 명확하게 파악한 덕을 제대로 봤다고 보는 게 맞았다.
1사 1루.
4차전에서 J.D.마르티네즈와 함께 팀의 승리를 견인했던 강태영이 타석에 들어섰다.
‘쉽게 가자.’
유현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강태영은 몸쪽과 바깥쪽, 낮은 코스와 높은 코스 모두 뚜렷한 약점이 없는 타자다. 컨디션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의 코스를 효율적으로 공략할 줄 안다.
따라서 어떤 코스를 공략할지 고민하는 건 솔직한 말로 큰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유현은 다른 방향으로 접근했다.
오늘만큼은 어느 코스를 노릴지가 아니라,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구종으로 강태영을 찍어 눌러 보자고 말이다.
그 어느 때보다 컨디션이 좋기에 할 수 있는 판단이었고, 투수를 존중하는 스타일의 포수인 마크 번칠은 유현의 의견을 따라줬다.
2스트라이크 1볼 상황.
빠각!
강태영이 몸쪽으로 파고든 커터를 공략해봤지만, 배트가 부러지면서 유격수 앞으로 흘러가는 땅볼이 되고 말았다.
첫 타석은 유현의 확실한 승리였다.
그리고 다음 타석에서도, 아니 오늘 경기가 끝날 때까지 유현은 강태영을 상대로 압도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채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강태영은 분명 좋은 타자다.
다만 오늘 유현의 컨디션이 너무 좋았다.
그 어떤 타자를 상대로도, 야구의 신이 오더라도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1회 말 선두타자에게 허용한 볼넷 이후, 유현은 4회 말 1아웃까지 단 한 명의 주자도 출루시키지 않은 채 이닝을 틀어막았다.
2회 말부터 4회 말 1아웃까지 7타자 연속 탈삼진을 잡아낼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타자들은 유현의 압도적인 구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이어진 강태영의 두 번째 타석.
강태영은 컨디션이 미쳐 날뛰는 유현을 어떻게 공략할 수 있을까 고민에 빠졌다.
‘볼 배합은 단순해. 포심과 스플리터 위주로 피칭하면서, 가끔씩 투심과 커터를 섞어 던지는 정도야. 타이밍만 잘 맞춘다면 공략하지 못할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오늘의 유현은 분명 평소와 달랐다.
볼배합을 통해 타자의 허를 찌르는 피칭을 즐겨하던 것과 다르게, 포심과 스플리터 위주로 피칭하면서 작정하고 삼진을 잡았다.
그럼에도 보스턴 레드삭스 타자들은 유현의 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이유는 명확했다.
오늘 유현의 구위가 보스턴 레드삭스 타자들을 압도할 정도로 좋았으니까.
볼 배합이 단순하다는 건, 타이밍만 제대로 맞추면 공략하지 못할 것도 없다는 뜻.
강태영이 차분하게 유현을 상대로 승부하면서 2스트라이크 2볼까지 카운트를 끌고 갔지만…….
“스트라이크 아웃!”
몸쪽 보더라인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포심 패스트볼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면서 삼진을 당하고 말았다.
“허…….”
강태영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유현이 카운트를 잡으면서 보여준 포심 패스트볼과, 루킹 삼진을 잡을 때의 포심 패스트볼은 느낌이 전혀 달랐다.
훨씬 더 빨랐고 볼 끝이 더 떠올랐다. 웬만한 강속구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강태영이 움찔하면서 스윙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강태영이 본능적으로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100마일.
전광판에는 쿠어스 필드가 아님에도 100마일이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디비전 시리즈 1차전.
어쩌다 한 번 보여 줬던 그 공이, 월드 시리즈 5차전 강태영을 상대로 다시 한 번 재현됐다.
불펜으로 향하려던 카일 프리랜드는, 전광판에 찍힌 구속을 확인하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 일찍 퇴근해도 될 거 같은데요?”
투수코치는 카일 프리랜드의 말에 동의했다.
원래는 유현과 카일 프리랜드를 1+1으로 묶어서 기용하려고 했지만, 막상 마운드에 오른 유현의 컨디션이 지나칠 정도로 좋았다.
게다가 체력마저 워낙 좋다 보니, 저렇게 전력투구를 해도 9회까지 책임질 가능성이 높았다.
이 상황에서 카일 프리랜드를 기용한다?
유현이 흔들리지 않는 한 불필요한 행동이다.
카일 프리랜드가 보스턴 레드삭스의 타선을 유현처럼 확실하게 막아 준다는 보장이 없다. 지금으로선 컨디션이 좋은 유현에게 최대한 긴 이닝을 믿고 맡기는 게 옳았다.
유현이 10타자 연속 탈삼진을 잡았을 때, 투수코치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중얼거렸다.
“월드 시리즈 한 경기 최다 탈삼진이 몇 개였더라. 아니, 그보다 월드 시리즈에서 노히트게임이 나온 적이 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