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152화 (152/155)

152화 월드 시리즈 (4)

콜로라도 로키스가 4차전 선발로 선발투수가 아닌 마무리투수 오수완을 예고했다는 건, 챔피언십 시리즈 4차전과 마찬가지로 오프너 전략을 사용하겠다는 뜻으로 봐야 했다.

누가 보더라도 오프너였다. 오프너가 아니라면 마무리투수를 1회에 올릴 이유가 없다.

어쩌면 뻔할 수도 있는 전략이다.

그럼에도 콜로라도 로키스가 오프너를 택한 건, 그것이 4선발 앤디 프리먼의 기량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전략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콜로라도 로키스는 1~3선발만으로 월드 시리즈 선발 로테이션을 구사할 생각도 했다.

단, 3차전을 이겼다면 말이다.

존 그레이의 컨디션 난조는 콜로라도 로키스가 가장 바라던 스윕 우승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도 나름의 수확은 있었다.

흔들리는 와중에도 확 무너지지 않았고,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낸 이유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6과 3분의 2이닝을 소화하며 필승조를 기용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덜어 줬다.

덕분에 4차전 오프너 전략의 사용이 가능했다.

1회부터 3회까지, 콜로라도 로키스는 필승조를 총동원해서 이닝을 틀어막을 계획이었다.

다만 이번 월드 시리즈 4차전의 오프너는 챔피언십 시리즈 4차전의 오프너와는 스타일이 사뭇 달랐다.

당시에는 유현을 오프너로 기용한 뒤 앤드 프리먼을 4회부터 기용했지만, 이번에는 마무리투수인 오수완을 오프너로 기용했다.

또한 필승조를 총동원해서 3회까지 틀어막을 계획을 세웠다.

상황이 다르니 스타일도 다른 게 당연했다.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3연승 후 4차전을 맞이했지만, 월드 시리즈에서는 2승 1패 후 4차전을 맞이했다. 5차전 또한 생각해야 하기에 유현을 오프너로 기용할 수 없었다.

필승조가 3회까지 막아 준 뒤 앤디 프리먼이 4회부터 등판, 남은 이닝을 안정적으로 틀어막아 주는 가운데 타선이 넉넉한 득점 지원을 해 준다.

이것이 콜로라도 로키스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4차전의 경기 흐름이었지만…….

어찌 모든 일이 예상처럼만 되겠는가.

오수완을 비롯한 필승조들은 3회까지 안타 하나만을 허용하며 이닝을 잘 틀어막아 줬다. 전날 불타오른 강태영과 J.D.마르티네즈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초반에 분위기를 넘겨주지 않았다.

그리고 4회 말부터 올라온 앤디 프리먼의 구위는 역시나 명불허전이었다. 다소 추운 보스턴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100마일을 뻥뻥 뿌리며 구위로 보스턴 레드삭스 타선을 압도했다.

4회 말.

강태영과 J.D.마르티네즈가 하이 패스트볼에 연속으로 삼진을 당한 뒤 헛웃음을 내뱉을 정도로 구위가 살아 있었다.

다시 한 번 뻔하디뻔한 오프너 전략을 꺼내든 게 맞아 가는 것처럼 보였다.

문제는 타선이었다.

안타는 만들어 냈지만 좀처럼 득점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4차전 승리에 사활을 걸고서 필승조를 총동원한 보스턴 레드삭스의 마운드를 좀처럼 무너트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운드에서의 전략은 맞아 떨어졌으나 타석에서의 전략이 어긋나 버린 것이다.

콜로라도 로키스 벤치가 고민에 빠졌다.

오늘 앤디 프리먼의 컨디션은 좋았다. 구위로 보스턴 레드삭스의 물오른 타선을 완벽하게 제압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문제는 앤디 프리먼의 멘탈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라는 데에 있다. 유독 경기 초반에 약한 것도, 한 번 실점을 하면 속절없이 무너지는 경향이 자주 나오는 것도 그래서였다.

반면 한 번 기세를 탔을 때는 유현과 카일 프리랜드가 부럽지 않은 괴물이 되곤 했다.

박빙의 승부는 앤디 프리먼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다. 주자가 출루했을 때 과하게 긴장해서 실투를 던질 가능성이 높았다.

단 1점.

타선이 더도 덜도 말고 1점만 뽑아서 앤디 프리먼이 흔들리지 않게 해 주기를 바랐다.

‘정 안 되면 유현을 대주자로 기용해야 할지도…….’

최악의 경우 주자가 출루했을 때 유현을 대주자로 기용해서 득점을 쥐어짜는 방법 또한 고려하고 있었다.

물론 되도록 사용하고 싶진 않았다.

다만 승기를 잡지 못하는 상황에서 1득점이 간절하다면, 어쩔 수 없이 유현을 대주자로 기용해야만 할지도 몰랐다.

다행히 유현을 대주자로 기용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까진 일어나지 않았다.

5회 초 2아웃 상황.

놀란 아레나도가 11구까지 가는 집요한 승부 끝에 솔로 홈런을 터트리며 균형을 무너트렸다.

그토록 원하던 선취점이 나왔다.

이어진 5회 말.

앤디 프리먼이 2아웃을 잘 잡아 놓고서 2루타를 허용하자 투수코치가 그 즉시 마운드에 올랐다.

그리고 앤디 프리먼에게 한 가지를 주문했다.

투수코치의 요구사항을 들은 앤디 프리먼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결과는 신경 쓰지 말고 최선만 다해.”

투수코치가 마운드데 올라온 이후, 앤디 프리먼은 다음 타자를 삼구삼진으로 잡아내며 실점을 허용하지 않았다.

100마일-99마일-100마일.

압도적인 구위의 포심 패스트볼 세 개로 타자를 찍어 누른 것이다.

6회 말.

다시 마운드에 오른 앤디 프리먼은 세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깔끔하게 삼자범퇴 이닝을 만들었다. 7회 말에 안타 하나를 허용하긴 했지만 삼진 세 개를 잡아내며 실점 없이 가뿐하게 위기를 벗어났다.

결정구는 모두 포심 패스트볼이었다.

알고도 당할 정도로 위협적인 100마일짜리 포심 패스트볼을 전력으로 투구해라. 몇 이닝을 소화할지 생각하지 말라. 힘을 아끼지 말고 최선을 다하다 지치면 신호를 보내라.

투수코치가 앤디 프리먼에게 바란 건 바로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전력투구하는 거였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타선이 강하긴 했지만 보스턴 레드삭스 정도는 아니었다. 솔직한 말로 보스턴 레드삭스 타선은 앤디 프리먼이 완급조절을 하며 막아 낼 만큼 만만하지 않았다.

유현이나 카일 프리랜드라면 모를까, 앤디 프리먼의 경우 경험이 적어 완급조절이 능숙하지 않기도 하고 말이다.

괜히 완급조절을 한답시고 위기에 몰려 멘탈이 나가느니 할 수 있는 데까지 전력투구를 해서 할 수 있는 데까지 확실하게 이닝을 틀어막아 주기를 바랐다.

9회 말.

1아웃을 잘 잡아낸 앤디 프리먼은 연속 안타를 허용하며 1사 1․2루 위기를 자초한 채 강태영과의 승부를 앞두게 됐다.

벤치의 지시에 따라 강태영을 고의사구로 거르고 1사 만루 상황이 된 직후.

앤디 프리먼이 모자 끝을 만지는 걸로 벤치에 신호를 보냈다.

“슬슬 준비해야겠다.”

“네. 그럴 줄 알고 야금야금 몸 풀어 놨어요.”

대화를 나눈 투수코치가 투수교체를 위해 마운드를 방문해 앤디 프리먼과 짧게 대화를 나눴다.

“나이스 피칭이었어.”

“9회까지 다 책임지고 싶었는데…….”

“자책할 필요 없어. 실점 없이 여기까지 끌고 온 것만으로도 네 역할을 충분히 다 한 거야.”

“마무리는 아까 말씀하셨던 대로…….”

“응. 이제 준비하고 나올 거야.”

그즈음.

더그아웃에 있던 투수가 점퍼를 벗어 던지더니 그대로 마운드를 향해 걸어갔다.

우우우우!

동시에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수준의 지독한 야유가 쏟아졌다. 보스턴 레드삭스 팬들이 마운드에 오르는 투수에 대한 격렬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허…….”

볼넷으로 1루 베이스로 밟은 강태영 또한 어이없는 상황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투수가 마운드에 올랐다.

“현이가 여기서 왜 나와?”

유현.

콜로라도 로키스는 4차전 승리를 위해 남은 2개의 아웃카운트를 유현에게 맡기기로 결정했다.

* * *

콜로라도 로키스 입장에서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필승조와 앤디 프리먼만으로 4차전을 승리하는 거였다.

만약 득점 지원이 넉넉했다면 앤디 프리먼이 9회까지 책임지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은 불펜투수들을 원 포인트 릴리프로 투입해서 조금이라도 이닝을 책임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총력전을 선언한 보스턴 레드삭스 벤치는 5차전 선발로 예고된 크리스 세일을 제외한 모든 투수들을 총동원할 듯한 기세로 투수를 기용했고, 콜로라도 로키스 타선은 놀란 아레나도의 솔로 홈런으로 인한 1득점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득점 찬스조차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었다.

1점 차 접전에서 잘못된 투수교체는 곧 패배로 직결된다. 콜로라도 로키스 벤치 입장에서는 9회 말 맞이한 위기 상황에서 가장 확실한 투수를 기용할 필요가 있었다.

4차전을 내주면 시리즈 전적 2승 2패가 된다.

덴버로 돌아가지 않고 우승을 확정짓길 바라는 콜로라도 로키스 벤치의 결단은 과감했고, 보스턴 레드삭스 벤치의 예상을 벗어났다.

-제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제 눈에도 함께 문제가 생겼나봅니다. 저도 같은 걸 보고 있는 기분이거든요.

-세상에. 콜로라도 로키스가 유현 선수를 9회 말 1사 만루 상황에서 기용하는 과감한 승부수를 띄웁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확실하게 이기겠다는 뜻으로 보는 게 옳겠죠? 아웃카운트 두 개 정도야 유현 선수가 내일 선발로 등판하는 데엔 큰 문제가 없다고 봤을 수도 있고요. 결과를 봐야 알겠지만, 지금으로선 최선의 선택으로 보입니다. 필승조를 모두 기용한 상황에서 J.D.마르티네즈 선수를 상대할 투수는 유현 선수밖에 없다고 봐야 하거든요.

쏟아지는 격렬한 야유에도 유현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무덤덤한 표정으로 마운드에 올랐다.

동시에 포수 마크 번칠이 자리에서 일어나 야수들의 수비 위치를 조정했다. 유현이 아웃카운트 두 개를 가장 확실하게 잡아낼 수 있는 포지션으로 말이다

전진 수비가 된 상황.

유현 대 J.D.마르티네즈.

1사 만루 상황에서 보스턴 레드삭스의 4번 타자를 상대하게 된 유현이 초구로 선택한 구종은 커터였다.

딱!

J.D.마르티네즈가 스윙을 해 보았지만 커터가 배트 안쪽을 파고들었고, 3루 선상을 벗어나는 파울이 되고 말았다.

우타자의 몸 안쪽으로 날카롭게 파고드는 97마일짜리 커터는 위력적이었다. 절대로 좋은 타구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지기도 했다.

2구 또한 커터였고, J.D.마르티네즈는 다시 한 번 스윙을 했다.

유현이 자신에게 좋은 공을 절대로 주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병살타만 만들지 말자는 생각으로 타구를 최대한 멀리 날려 보내기 위해 힘을 실어봤지만 결과는 다시 한 번 파울이 됐다.

2스트라이크 상황.

절대적으로 투수가 유리한 카운트.

칠 수 있을 테면 쳐보라는 듯 자신감 있게 투구하던 유현은, 마크 번칠의 사인에 고개를 끄덕이며 망설임 없이 3구를 찔러 넣었다.

스트라이크 존 한복판으로 말이다.

스윙을 하는 순간, 공이 스트라이크 존 한복판으로 파고드는 걸 보는 순간 J.D.마르티네즈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아. 이거 스플리터구나.

유현이 미치지 않는 한 스트라이크 존 한복판으로 실투를 던질 리가 없으니까.

문제는 스윙을 멈추기엔 이미 늦었다는 거였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예상대로 유현과 마크 번칠 배터리가 선택한 3구는 스트라이크 존 한복판으로 들어오는 듯하다가 뚝 떨어지는 스플리터였고, J.D.마르티네즈는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그랬다.

애초에 전진 수비는 내야 땅볼을 유도할 것처럼 보이기 위한 행동일 뿐, 애초에 유현은 병살타를 유도할 생각이 없었다.

1사 만루 상황에서 실점을 하용하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내야 땅볼로 인한 병살타가 아닌 삼진 두 개를 잡는 것이다.

내야 땅볼은 변수가 존재하지만 삼진은 변수가 존재하지 않으니까.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앞선 타석에서 무안타로 부진했던 5번 타자를 대신해 대타로 기용된 우타자마저도 3구 삼진으로 깔끔하게 처리하며, 유현이 1사 만루의 위기를 벗어나며 세이브를 기록했다.

‘이제 딱 한 발자국 남았다.’

3승 1패.

월드 시리즈 우승까지 단 1승만이 남은 상황에서, 콜로라도 로키스는 5차전 선발투수로 4차전 세이브를 기록한 유현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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