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월드 시리즈 (3)
콜로라도 로키스는 유현의 호투와 타선의 적절한 득점 지원의 합작을 통해서 월드 시리즈 1차전 승리를 가져갔다.
강태영에게 9회 초 솔로 홈런을 맞은 걸 제외하면 유현의 피칭은 완벽에 가까웠고, 다음 등판에서도 호투를 할 거라 기대하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강태영이었다.
챔피언십 시리즈 4차전 막바지부터 정신 나간 몰아치기를 보여 줬던 강태영의 타격감이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 콜로라도 로키스 입장에서는 적잖게 부담으로 다가왔다.
지난해 월드 시리즈도 그렇고 이번 해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도 그렇고, 강태영을 막아 내지 못한 팀들은 시리즈에서 쓰디쓴 패배를 맛봐야만 했다.
아무리 마운드의 높이가 높아도 미친 타자를 막아 내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는 법.
콜로라도 로키스 벤치는 마운드 운용을 두고서 고민을 거듭했다. 1차전에서 유현에게 홈런을 기록하며 절정의 타격감을 과시한 강태영을 어떻게 막을지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고민 끝에 콜로라도 로키스 벤치는 선택했다.
“주자가 없으면 승부해도 좋아. 주자가 1루에만 있다면 승부해도 좋아. 하지만 스코어링 포지션으로 나갔다면 아웃카운트와 상관없이 절대 승부하지 마.”
“만루면 어떻게 할까요?”
“밀어내기로 1점을 내주는 게 나아. 제일 좋은 건 만루 상황 자체를 안 만드는 거고.”
“혹은 저희가 먼저 대량 득점을 해서 밀어내기에 대한 부담을 가지지 않던가요.”
“그게 베스트지.”
허락된 상황에서만 강태영과 승부를 하고 그 외에는 절대 승부하지 않는다. 특히나 만루에서 극강의 스탯을 보여 주는 강태영이기에, 만루 위기에서는 카운트와 상관없 밀어내기로 1점을 내주는 걸 각오하고서 승부를 피하기로 결정했다.
보스턴 레드삭스 타선이 메이저리그 최고인 건 기록이 증명해 준다. 하지만 그중, 투수들에게 가장 위압감을 주는 건 누가 뭐라 해도 강태영이다.
컨디션이 좋을 때의 강태영은 구종과 코스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공략해 내는 괴물이고, 특히나 단기전에서는 최고의 집중력을 보여 주곤 했다.
콜로라도 로키스 벤치는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가 패배한 결정적인 이유를 강태영의 타격감을 살려 준 거라고 봤다.
4차전 막바지에 강태영의 타격감을 살려 주지만 않았더라도, 여유를 부리지 않은 채 선발투수를 과감하게 투입하기만 했더라도 스윕으로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결국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여유를 부리다가 메이저리그 역사상 두 번째로 7전 4선승제 리버스 스윕의 제물이 됐고,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보스턴 레드삭스는 밤비노의 저주를 깼던 2004년을 떠올리며 3년 연속 월드 시리즈 우승을 정조준 할 수 있게 됐다.
콜로라도 로키스 코칭스태프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달리 방심하지 않았다.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고 우승을 확정짓는 그 순간까지 이길 방법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1차전에서 강태영의 타격감을 죽이는 데에 실패한 콜로라도 로키스 입장에서는 굳이 타격감이 좋은 강태영과 승부해서 위기 상황을 자초할 이유가 없었다.
선발투수 카일 프리랜드의 컨디션이 좋긴 하지만, 유현처럼 보스턴 레드삭스의 타선을 압도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하긴 어려웠다.
1회 초.
테이블 세터를 2루수 직선타와 유격수 앞 땅볼로 잡아낸 카일 프리랜드는, 강태영에게 볼넷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쓴웃음을 흘리며 1루로 걸어 나가는 강태영의 얼굴이 카메라에 잡혔다.
-강태영 선수가 볼넷으로 출루합니다. 썩 기뻐 보이지는 않습니다.
-콜로라도 로키스 배터리가 자신과의 정면 승부를 대놓고 피하고 있다는 걸 느꼈을 겁니다. 보스턴 레드삭스 중심 타선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겠는데요?
-이 볼넷으로 인한 실점 여부가 콜로라도 로키스 입장에선 2차전의 향방을 가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작전이 통한다면 이후에도 강태영 선수와의 승부를 피할 거고, 통하지 않는다면 강태영 선수와 승부를 할 수밖에 없거든요.
카일 프리랜드는 강태영에게 볼넷을 내줬음에도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의도한 바였다는 듯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타자를 상대할 준비를 했다.
당초 콜로라도 로키스는 유현이 강태영을 압도하는 과정에서 타격감이 죽기를 바랐지만, 9회 초에 때려낸 홈런으로 타격감이 죽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보였다.
그래서 계획을 바꿨다.
타석에서 안타를 칠 기회가 줄어들다 보면 아무리 좋은 타자라 해도 결국에는 타격감이 죽어 버릴 수밖에 없다. 결과물을 만들지 못하는데 어떻게 좋은 타격감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강태영을 상대하면서 카일 프리랜드는 절대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공을 집어넣지 않았다. 철저하게 유인구를 바탕으로 승부했고, 속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투구했다.
그 결과 강태영은 단 한 번도 스윙을 하지 않은 채 1루 베이스를 밟게 됐다.
결과적으로 카일 프리랜드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4번 타자 J.D.마르티네즈에게 안타를 허용하며 2사 1․3루 위기를 맞이했지만, 삼진을 잡아내며 실점 없이 위기를 벗어났다.
-강태영 막기라…… 잘 통하려나 모르겠군.
‘통하기를 바라야지. 다행히 오늘 카일의 컨디션이 좋은 거 같아서 괜찮을 것도 같은데?’
-괜찮아야지. 실패하면 2차전을 내줄 테니까.
* * *
카일 프리랜드 대 데이빗 프라이스.
몸값과 이름값은 사이영 상 수상자인 데이빗 프라이스가 압도하지만, 2020시즌 성적은 카일 프리랜드의 압승이었다.
카일 프리랜드는 1점대 방어율을, 데이빗 프라이스는 2.96의 방어율을 기록했으니까.
데이빗 프라이스의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카일 프리랜드가 유현만 없었다면 사이영 상을 노려볼 수 있을 정도로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을 뿐이다.
다른 팀이었으면 에이스였을 카일 프리랜드는, 후반기 유현에게 에이스 자리를 내주고 2선발 역할을 소화하게 됐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2선발로서 해 줘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유현이 만들어 준 좋은 흐름을 이어 가는 것.
카일 프리랜드의 2020시즌 성적이 인상적인 건, 그가 쿠어스 필드에서 1.11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홈에서 강점을 보인 투수이기 때문이었다.
홈에서만큼은 유현이 부럽지 않았다.
콜로라도 로키스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마운드에 오른 프랜차이즈 스타 카일 프리랜드는, 팬들의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피칭을 보여 줬다.
8이닝 5피안타 3사사구 7탈삼진 1실점.
타선이 4득점을 안겨 줘 승리투수 조건을 만족시킨 상황에서 9회 초 마운드를 마무리투수 오수완에게 넘겼다.
결과만 놓고 봤을 때 콜로라도 로키스의 강태영 거르기 작전은 성공적이라고 봐야 했다.
카일 프리랜드는 강태영에게만 볼넷 3개를 내줬지만 J.D.마르티네즈에게 허용한 적시 2루타를 제외하면 실점이 없었고, 별다른 위기 없이 8회까지 이닝을 틀어막아 줬으니까.
9회 초.
마운드에 오른 오수완이 세 타자 연속 탈삼진으로 경기를 매듭지었다.
스코어는 1대4.
2020시즌 홈에서 극강의 모습을 보여 준 콜로라도 로키스가 월드 시리즈 1차전과 2차전을 내리 가져가며 우승에 한 발자국 먼저 다가섰다.
그리고 이어진 3차전.
우우우우우!
시작부터 엄청난 야유가 쏟아졌다. 열성적인 보스턴 레드삭스 팬들은 콜로라도 로키스 선수단을 향해 야유를 쏟아 냈다. 콜로라도 로키스가 3차전부터 5차전까지 내리 내주고 다시 홈으로 돌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1회 말.
존 그레이는 이틀 전 카일 프리랜드와 마찬가지로 2아웃까지 잘 잡아낸 뒤 강태영에게 볼넷을 허용하고 말았다.
여기까지는 2차전과 동일한 시나리오였다.
단, 결과는 전혀 달랐다.
펜웨이 파크에서는 중압감과, 추운 날씨로 인한 컨디션 관리의 어려움을 이겨 내지 못한 탓일까?
존 그레이는 J.D.마르티네즈에게 선취 2점 홈런을 허용하고 말았다. 무브먼트가 밋밋하게 형성된 투심 패스트볼이 한가운데로 몰리면서 홈런으로 연결되고 말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유현은 불안함을 느꼈다.
‘투심 패스트볼의 무브먼트가 너무 밋밋해. 오늘은 좀 위험할지도 모르겠는데…….’
-네 말대로 투심이 평범해. 3차전은 내줘야 할지도 모르겠어.
‘음. 일단 지켜봐야지. 타자들이 점수를 좀 내주면 난타전으로 몰고 가도 되니까.’
1회 말에 얼핏 보인 존 그레이의 컨디션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투심 패스트볼의 구속이 챔피언십 시리즈와 비교했을 때 2마일 정도 떨어지기도 했지만, 더 큰 문제는 무브먼트가 제대로 형성이 안 됐다는 거였다.
존 그레이의 투심 패스트볼은 정확한 제구를 추구하는 유현과 달리, 제구보다는 미쳐 날뛰는 무브먼트로 승부를 본다.
바꿔 말하자면 무브먼트가 제대로 형성이 안 됐을 땐 난타를 당하기도 한다는 뜻이었다.
J.D.마르티네즈에게 2점 홈런을 허용한 것처럼 말이다.
유현은 존 그레이가 2회 말부터는 페이스를 되찾아서 3차전도 이기기를 바랐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백투백 홈런! 강태영 선수와 J.D.마르티네즈 선수가 존 그레이 선수에게 백투백 홈런을 선물해 줍니다! 스코어는 0대4! 펜웨이 파크가 지진이 난 것처럼 크게 요동칩니다!
-콜로라도 로키스 입장에서는 존 그레이 선수의 투심 패스트볼 무브먼트가 밋밋한 게 아쉬움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빠르게 교체하기에도 애매한 상황입니다.
-맞습니다. 홈런 세 방을 제외하면 나름 잘 버티고 있다고 봐야 하거든요.
-가장 좋은 건 존 그레이 선수가 6~7회까지 버텨 주면서 그사이 타선의 힘으로 점수 차이를 좁혀 놓는 겁니다.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입니다. 불펜을 빨리 가동했다가 경기를 패배하면 4차전과 5차전에서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여차하면 3차전을 포기하고 가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필승조를 아끼고 내일 있을 4차전에 사활을 거는 거죠.
3회 말.
존 그레이는 2아웃까지 잘 잡아놓고서 강태영과 J.D.마르티네즈에게 백투백 홈런을 허용하고 말았다.
스코어가 0대4로 벌어졌다.
그럼에도 콜로라도 로키스는 필승조를 가동하지 않았다. 존 그레이를 다독이며 최대한 길게 이닝을 책임져 주기를 부탁했다.
“100구까지, 가능하겠어?”
“안 돼도 되게 해야죠.”
“실점은 상관없으니까 길게 버티자.”
“6회까지는 해볼게요.”
콜로라도 로키스의 뜻은 명확했다.
3차전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필승조를 아끼고 4차전을 가져가겠다는 계산이었다.
계산대로만 된다면 3차전을 포기하더라도 4차전과 5차전 중 하나를 이기고, 강점이 있는 홈으로 돌아가며 쐐기를 박으면 된다.
굳이 3차전에 목을 맬 필요가 없다.
조급한 건 자신들이 아니라 보스턴 레드삭스다. 2패를 떠안은 상황에서 3차전만은 반드시 잡아야만 하는 입장이다.
만약 3차전마저 내줬다가는 남은 경기를 모두 잡아야 하는 부담이 생기니까.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지나친 여유가 방심으로 이어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방심마저 사라진 채 조급함을 느끼다 자멸하고 말았다.
하지만 콜로라도 로키스는 달랐다.
2007시즌 이후 어렵사리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고, 당시 굴욕을 안겨준 보스턴 레드삭스에게 복수하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했다.
한 경기를 내주더라도 전력상 우위를 바탕으로 최종 승자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이 존재했다.
존 그레이는 6회에도 솔로 홈런 한 방을 내줬지만, 7회 말 2아웃까지 꿋꿋하게 잡아내며 117구를 투구한 뒤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6과 3분의2이닝 7피안타 4피홈런 2사사구 5실점으로, 투심 패스트볼의 무브먼트가 밋밋했음에도 팀이 요구를 충족시켜 준 좋은 투구였다.
그리고 남은 이닝.
콜로라도 로키스는 필승조를 투입하지 않은 채 추가 3실점을 허용하며 3대8로 패배, 포스트시즌 연승이 9연승에서 중단되고 말았다.
월드 시리즈 전적 2승 1패가 된 상황.
콜로라도 로키스는 4차전 선발투수로 마무리투수 오수완을 예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