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월드 시리즈 (1)
월드 시리즈를 준비하는 콜로라도 로키스 감독은 평온했다.
보스턴 레드삭스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중 어느 팀이 올라오더라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두 팀을 위한 맞춤형 전략은 일찌감치 준비되어 있었으니까 말이다.
결국 보스턴 레드삭스가 기적적인 리버스 스윕으로 월드 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었다.
그 직후 콜로라도 로키스 감독은 언론들로부터 수많은 인터뷰 제안을 받았다. 월드 시리즈를 앞두고 있는 만큼 기삿거리를 하나라도 더 찾기 위해 기자들은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콜로라도 로키스 감독은 기자들을 쿠어스 필드로 불렀다. 선수들의 연습을 지켜보면서 인터뷰를 처리해버릴 생각이었다.
‘온갖 날선 질문들이 쏟아지겠군.’
아니나 다를까.
첫 질문부터 묵직한 스트레이트가 들어왔다.
“보스턴 레드삭스가 2004년에 이어 다시 한 번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리버스 스윕을 달성했습니다.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레드삭스를 상대하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따로 준비한 전략이 있습니까?”
“전략은 디비전 시리즈와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보여 줄 대로 보여 준 거 같습니다. 월드 시리즈에서는 기존의 전략들을 가지고 정면 승부를 할 예정입니다. 변칙보단 정공법이 옳다고 봅니다.”
“오프너가 또 나올 수도 있습니까?”
“상황을 봐야 알 거 같습니다. 단, 앤디 프리먼 선수는 경기 초반에 마운드에 오르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프너는 만능 전략이 아니다.
오프너가 최고의 전략이었다면 모든 팀이 매 경기 오프너 전략을 사용하며 선발투수가 1회부터 최대한 긴 이닝을 책임진다는 야구의 트렌드 자체를 바꿔 버렸을 테니까.
오프너로 경기 초반에 등판한 투수가 이닝을 확실하게 틀어막아 줄 거란 보장도, 경기 중반에 등판한 투수가 초반을 벗어났다고 해서 흔들리지 않을 거란 보장도 없다.
결국에는 결과론이다.
결과가 좋으면 성공한 전략으로, 결과가 나쁘면 실패한 전략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콜로라도 로키스가 챔피언십 시리즈 4차전에서 보여 준 오프너 전략은 대단히 성공적인 것이었다.
유현이 3회까지를 완벽하게 틀어막아 줬고, 4회부터 마운드에 올라온 앤디 프리먼은 세 번째 투수가 필요 없게 만들어줬으니까 말이다.
어찌 보면 뻔한 전략일지도 모른다.
이미 노출된 전략이기에 보스턴 레드삭스가 오프너를 예상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럼에도 콜로라도 로키스의 오프너가 위협적인 건, 그 전략이 챔피언십 시리즈 4차전의 향방을 가를 만큼 제대로 적중했기 때문이었다.
오프너에 대한 질문 이후, 기자들은 보스턴 레드삭스의 전력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주로 선발진과 타선을 놓고 비교를 했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원투펀치는 2019시즌 사이영 상을 수상한 크리스 세일과, 2012시즌 사이영 상을 수상했던 데이비드 프라이스이다.
이름값만으로 따지면 메이저리그 최고 수준인 사이영 듀오는, 2020시즌 40승을 합작하며 보스턴 레드삭스의 정규 시즌 1위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유현-카일 프리랜드-존 그레이로 이어지는 콜로라도 로키스의 1~3선발은 2020시즌 메이저리그 최고의 트리오라고 보는 게 맞았다.
거기에 4회 이후이긴 하지만 압도적인 포스를 보여주는 앤디 프리먼도 있고 말이다.
선발진은 분명 콜로라도 로키스가 우위였다.
다만 타선은 누가 보더라도 보스턴 레드삭스가 압도적인 우위였다.
메이저리그 전체 타율 1위, 홈런 1위를 기록한 막강한 타선을 보유하고 있으니까.
기자들이 하고 싶은 말은 간단했다.
선발이 우위인 콜로라도 로키스와 타선이 우위인 보스턴 레드삭스 중에서 누가 더 강할까?
이에 대한 콜로라도 로키스 감독의 답변은 단순명료했다. 그는 역으로 기자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레드삭스에는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한 선발투수가 있습니까? 1점대 방어율을 기록한 투수를 2선발로 밀어낸 괴물이 있습니까?”
타선?
보스턴 레드삭스가 더 강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보스턴 레드삭스에는 단기전에서 가장 중요한 압도적인 에이스가 없다. 1점대 방어율을 기록한 선발투수를 2선발로 밀어낸 0점대 방어율의 괴물 선발투수를 보유하지 못했다.
“우린 있습니다. 그것이 로키스가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필승 전략입니다.”
기승전 유현.
콜라로도 로키스가 월드 시리즈를 앞두고 준비한 베스트 전략이었다.
* * *
선발투수가 248이닝 투구하면 0.55의 방어율을 기록했다는 건, 대부분의 팀이 그 투수를 공략하는 데에 실패했다는 뜻이다.
보스턴 레드삭스도 마찬가지였다.
인터리그 당시 보스턴 레드삭스는 유현을 공략하지 못했다. 타격감이 좋은 강태영 외에는 유현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결국 강태영에게 고의사구를 지시하자 보스턴 레드삭스 타선은 생각보다 무기력하게 농락당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말았다.
유현은 분명 명실상부 2020시즌 메이저리그 최고의 선발투수이자 히트 상품이었다.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콜로라도 로키스를 상대하게 된 팀들은 유현을 두고 그렇게 생각했다.
단기전은 다를 수도 있다, 어쩌면 유현이 단기전에서는 흔들릴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럴 일 따윈 없었다.
관중이 많을수록 더 심장이 강해지는 타입인 유현의 장점은 단기전에서 더욱 확실하게 드러났다.
디비전 시리즈에서도, 그리고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도 유현은 완벽에 가까운 투구를 보여 줬다. 오히려 정규 시즌보다도 더 위협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투구 내용이 좋았다.
챔피언십 시리즈 이후.
짧은 준비 기간 동안 보스턴 레드삭스의 전력분석원 중 절반 이상이 유현에게 매달렸다.
유현을 공략하지 못하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처럼 콜로라도 로키스의 전략에 시종일관 끌려다니다가 허무하게 시리즈를 내줄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분석 끝에 나온 결과는 최악이었다.
“실투를 던지기를 바라거나, 타자들이 유현 선수의 구위를 이겨 낼 정도로 좋은 스윙을 하는 거 말고는 답이 없습니다. 구위, 제구, 투구 패턴까지, 유현 선수는 모든 게 완벽합니다.”
약점이 없는 완벽한 투수.
결국 유현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타자들이 좋은 스윙을 해주기를 바라는 것밖에 없었다.
* * *
쿠어스 필드.
월드 시리즈 1차전 선발로 예고된 유현이 일찌감치 나와 루틴대로 몸을 풀었다. 봉식이는 모처럼 스칼렛과 함께 있지 않고 유현의 머리 위에 올라탄 채 훈련 과정을 지켜보았다.
‘스칼렛은 어디에 두고 모처럼 내 머리 위에서 한량처럼 있어?’
-긴장돼 가지고 현장에서 못 보겠데. 난 혹시 모르니까 현장에서 지켜보기로 한 거고.
‘혹시 모르기는 무슨. 아직도 날 잘 몰라?’
-크흐흐. 잘 알지. 그나저나…… 드디어 여기까지 올라왔군.
‘그러게.’
대만에서 처음 만난 이후.
봉식이는 틈만 나면 유현에게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를 끼워야 한다고 말했다. 사이영 상은 당연히 받는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결과적으로 유현은 정규 시즌에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하며 내셔널리그 사이영 상 수상이 확정적이었다. 만장일치냐 아니냐의 문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디비전 시리즈와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전승 가도를 내달리며 마침내 꿈에 그리던 월드 시리즈 1차전 선발 등판을 앞두게 됐다.
유현이 미소를 지었다.
월드 시리즈가 끝나면 봉식이가 한국으로 돌아갈 테지만, 지금은 이별에 대한 아쉬움보단 월드 시리즈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마지막으로 봉식이에게 최고의 선물을 안겨 주고 싶었다.
‘한국으로 가기 전에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를 선물로 줄 테니까 기대해.’
훈련이 끝난 뒤.
마크 번칠은 불펜에서 유현의 공을 받기를 자청했다. 등판을 앞두고 유현의 컨디션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각각 2구씩만 던져볼게.”
팡! 팡! 팡!
포심 패스트볼, 투심 패스트볼,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 커터, 그리고 스플리터까지.
유현은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구종을 2구씩 던져보았다. 컨디션 점검 차원에서 던지는 거기에 전력투구를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구속은 93마일 정도가 나왔다.
“나이스! 오늘 공 좋아요!”
“베스트는?”
“투심이랑 스플리터요.”
“흐음. 나쁘지는 않겠네.”
“다른 공들도 다 좋으니까 타자의 성향에 따라 배합을 가져가면 될 거 같아요.”
모든 구종이 제구도 나쁘지 않았고 무브먼트도 살아 있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좋은 구종은 투심 패스트볼과 스플리터였다.
투심 패스트볼과 스플리터를 주로 구사하며, 다른 구종들 또한 타자들의 성향에 따라 적절하게 배합하며 경기를 풀어나가기로 했다.
특정 구종에 목을 맬 필요가 없었다.
컨디션이 좋은 날의 유현은 특종 구종을 고집하지 않고, 상대 타자의 약점을 후벼 파는 피칭을 할 때 더 위력적인 모습을 보이곤 했으니까.
그렇게 시작된 월드 시리즈 1차전.
와아아아아아!
유현이 마운드에 오름과 동시에 쿠어스 필드를 가득 채운 관중들이 자리에서 일어난 채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일부 보스턴 레드삭스 팬들만이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귀가 아플 정도로 격렬한 환호성에 유현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혔다.
“오늘따라 격렬하네. 월드 시리즈가 그런가.”
관중이 많을 때, 환호성이 클 때 긴장하는 투수는 생각보다 많다. 큰 무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몸이 굳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콜로라도 로키스가 유현을 영입하면서 높게 평가했던 이유 중 하나가, 유현이 타고나 강심장이라는 데에 있었다.
두 차례의 한국 시리즈에서 보여 준 유현의 맹활약이 콜로라도 로키스 수뇌부의 마음을 확실하게 사로잡았다. 월드 시리즈에 진출할 수만 있다면 유현이 창단 첫 월드 시리즈 우승을 안겨 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월드 시리즈 1차전.
팡!
“스트라이크!”
유현이 자신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초구 몸쪽 하이 패스트볼로 스트라이크를 잡으며 월드 시리즈의 시작을 알렸다.
전광판에 기록된 구속은 98마일.
4차전 이후 푹 쉰 유현의 컨디션은 좋았고, 보스턴 레드삭스의 선두타자는 초구에 스윙을 해보았지만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2구 째.
딱!
다시 한 번 몸쪽으로 파고든 포심 패스트볼에 어렵사리 타이밍을 맞추긴 했지만, 맞추는 데에 급급한 스윙이다 보니 힘이 실리지 않았다. 결국 3루 선상을 힘없이 벗어나는 타울이 되고 말았다.
이어진 3구째.
유현과 마크 번칠 배터리가 결정구로 선택한 건 스플리터였다.
몸쪽으로 포심이 두 개 들어온 상황에서, 유현이 결정구로 던진 확률이 가장 높은 구종은 삼진을 잡기에 최적화된 스플리터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선두타자로서 해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스플리터를 예상하고 스윙을 했지만…….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예상보다 더 크게 낙폭을 그린 스플리터에 시원하게 헛스윙을 하고 말았다.
‘Danm it.’
속으로 나지막하게 욕지기를 내뱉은 선두타자가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타석에서 직접 느낀 유현의 컨디션을 가감없이 말해 줬다.
“포심이 힘은 있는데 무브먼트가 베스트까지는 아닌 것 같고, 스플리터가 미쳤어. 스플리터는 노리기 힘들 것 같아.”
“오늘의 베스트는 스플리터인가?”
“쉽지 않겠는데?”
“스플리터를 머릿속에서 지워. 좋은 구종을 억지로 공략하려고 할 필요 없어.”
베스트 구종을 제외하고 노리자.
보스턴 레드삭스의 타자들은 그것이 유현을 공략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이라고 판단했다.
쉽지는 않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컨디션이 좋은 날 유현이 던지는 베스트 구종은 사실상 공략이 불가능하다고 봐야 하니, 차선으로 다른 구종을 노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2번 타자마저 스플리터에 헛스윙 삼진을 당하고 더그아웃으로 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강태영이 타석에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