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계획대로 되고 있어 (4)
보스턴 레드삭스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게 챔피언십 시리즈 1차전부터 3차전까지를 내리 내주는 수모를 겪고 말았다.
더 뼈아픈 건 세 경기 모두 고작 1점 차로 패배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3연속 1점 차 패배는 보스턴 레드삭스 선수들을 멘탈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선수들은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선수들은 2004년을 이야기했다.
뉴욕 양키스에서 1차전부터 3차전까지 내리 내줬지만, 기적적인 리버스 스윕으로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고 밤비노의 저주를 깼던 그때를 말이다.
4차전.
남은 경기를 무조건 다 이겨야 하는 상황에서 반전의 계기를 만들어야 했지만 쉽지 않았다.
경기 초반부터 선발이 무너져 버렸으니까.
1과 3분의 1이닝 3피안타 5사사구 2피홈런 7실점, 1회 말에 이어 2회 말에도 사사구를 남발하다가 홈런으로 자멸하는 모습을 보여 주자 보스턴 레드삭스는 선발투수를 교체했다.
타선이 1회와 2회에 도합 4득점을 낸 상황, 3점 차 정도면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예상한 대로 득점이 계속해서 나오긴 했다.
문제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또한 타선이 대폭발하며 매 이닝 득점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9대 16.
7점 차로 점수가 벌어진 상황에서 보스턴 레드삭스가 9회 초 마지막 공격 기회를 잡게 됐다.
“아직 경기 끝난 거 아니야. 포기하지 말자. 7점? 그까짓 꺼 홈런 두 방이면 따라 잡을 수 있는 점수 차이잖아.”
“태영 말이 맞아. 아직 포기하긴 일러,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잖아.”
“인디언스도 투수를 쓸 만큼 썼어. 찬스 한 번만 잘 만들면 무너트릴 수 있을지도 몰라.”
보스턴 레드삭스 선수단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웃카운트 세 개를 내주면 경기가 끝나는 상황에서도 역전을 노렸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오늘 경기에서 필승조를 모조리 끌어다 쓴 상황, 3번 타자 강태영으로부터 타순이 시작되는 만큼 한 번 불만 제대로 붙으면 7점 차를 따라잡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봤다.
그리고 강태영은 2루타를 치며 희망의 불씨를 살리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안타-안타-외야 플라이-안타-안타-볼넷-헛스윙 삼진-볼넷.
9회 초 2아웃에서 공격이 끝나지 않은 채 타순이 한 바퀴 돌아 선두타자였던 강태영이 다시 타석에 들어서게 됐다.
스코어는 13대 16까지 따라잡은 상황, 2사 만루 찬스가 강태영에게 찾아왔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선수단은 긴장했고, 보스턴 레드삭스 선수단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난 채 강태영만을 바라보았다.
강태영이 득점을 만들어 내 줄 거라 믿었다.
KBO리그에서 유독 만루에 강한 모습을 보여 줬던 강태영은, 메이저리그 진출한 이후에도 여전히 만루에서 미쳐 날뛰었다.
메이저리그에서 두 시즌을 뛰는 동안 만루에서의 통산 타율이 정확히 5할인 이 괴물을 상대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벤치는 고민에 빠졌다.
정면 승부를 해야 할까, 아니면 밀어내기로 한 점을 더 내주더라도 승부를 피해야 할까?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선택은 정면 승부였다.
오늘 강태영은 6타수 1안타를 기록하고 있었다. 직전 타석에서 실투를 공략해 만든 2투타 외에는 앞선 타석에서는 모두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며 고전하는 모습을 보여 줬었다.
4차전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1차전부터 3차전까지, 강태영이 기록한 안타의 합은 총 3개였다.
2019시즌 포스트시즌에서 맹타를 휘둘렀던 것과 비교했을 때 초라한 성적이었다.
디비전 시리즈에서는 맹타를 휘둘렀지만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갑자기 타격 슬럼프가 찾아왔고, 아예 타석에서 타이밍 자체를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때문에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코칭스태프는 정면 승부를 지시한 거였다.
아무리 만루에서의 통산 성적이 비정상적으로 좋다고 한들, 오늘 강태영의 컨디션으로는 좋은 결과물을 만들지 못할 거라고 본 것이다.
예상대로 강태영은 빠른 공에 헛스윙을 두 번이나 하며 제대로 타이밍을 잡지 못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어진 3구째.
딱!
강태영이 뚝 떨어지는 스플리터를 그대로 걷어 올렸다. 큼지막한 포물선을 그린 타구는 한참을 날다가 프로그레시브 필드 우측 펜스를 훌쩍 넘어가 버렸다.
그랜드 슬램.
만루의 사나이 강태영이 17대16으로 경기를 뒤집는 데에 성공했다.
* * *
“이걸 뒤집는다고?”
월드 시리즈 진출을 기념해 파티를 하고 있는 와중에 유현은 TV로 보스턴 레드삭스 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챔피언십 시리즈 4차전을 몇몇 선수들과 함께 보고 있었다.
샴페인을 터트리긴 했지만 술을 진탕 마시는 선수는 없었다. 아직 월드 시리즈를 앞두고 있기에 기분만 낸 정도였고, 가볍게 술 한두 잔을 마시며 기쁨을 만끽하는 데에 그쳤다.
선수들의 관심은 월드 시리즈에 진출한 것보다, 자신들과 월드 시리즈에서 맞붙을 팀이 누가 되느냐였다.
대부분 선수들은 보스턴 레드삭스가 월드 시리즈 파트너가 되기를 바랐다.
Roctober.
2007시즌 당시 디비전 시리즈와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7연승을 거두며 창단 첫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지만, 월드 시리즈에서 스윕패를 안겨 주며 전승 준우승에 머물게 했던 상대 팀이 바로 보스턴 레드삭스였으니까.
다시 한 번 보스턴 레드삭스와 맞붙어서 이번에는 이기고 싶은 마음이 컸다.
2007시즌 당시 선수 생활을 했던 선수들은 대부분 팀을 떠났거나 은퇴했지만, 기록은 자부심이자 아킬레스건이 되어 선수들에게 남아 있다.
2007시즌의 기적적인 행보를 재현했지만 반쪽짜리일 뿐이다. 월드 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
보스턴 레드삭스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두 팀 중 누가 올라올지는 알 수 없지만, 이왕이면 쓰디쓴 아픔을 되갚아 주기 위해서라도 보스턴 레드삭스가 올라오기를 바랐다.
3전 3패로 몰린 4차전.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타선의 대폭발과 강태영의 만루 홈런으로 보스턴 레드삭스가 7점 차를 역전하고 9회 말을 맞이하자, 콜로라도 로키스 선수단은 혹시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러다 또 리버스 스윕 하는 거 아니야?”
“리버스 스윕이 어디 쉽나. 7전 4선승제에서 리버스 스윕 나온 게 한 번뿐이지 않나?”
“혹시 모르지. 그 리버스 스윕을 만들었던 게 레드삭스잖아.”
“맞아. 밤비노의 저주를 깰 때였지 아마?”
“한번 달아오르면 걷잡을 수 없는 팀이니까 어떻게 될지 지켜봐야지.”
17대16으로 기적적인 역전을 만들고 맞이한 9회 말, 보스턴 레드삭스의 선택은 선발투수를 마운드에 올리는 거였다.
그것도 1차전 선발로 마운드에 올랐던 에이스 크리스 셰일을 말이다.
중간계투 중에는 9회를 믿고 맡길 만한 투수가 없었다. 어중간한 투수를 내보냈다가는 4차전에서만 무려 16득점을 만들어 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타선을 막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지금은 물불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일단 4차전을 이겨야 5차전이 존재한다. 기용할 수 있는 전력은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기용해 승리를 쟁취해야만 했다.
결국 보스턴 레드삭스는 강태영의 역전 그랜드 슬램과 크리스 셰일의 터프 세이브를 앞세워 4차전 승리를 가져왔다.
* * *
보스턴 레드삭스가 4차전 승리를 쟁취한 상황에서도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가 월드 시리즈에 진출할 거라고 봤다.
다분히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보스턴 레드삭스는 4차전을 이기기 위해 에이스 크리스 셰일을 등판시킨 반면,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4차전을 내주더라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전력을 아낀 감이 있었으니까.
문제는 보스턴 레드삭스가 5차전 선발로 에이스 크리스 셰일을 예고했고, 크리스 셰일이 63구를 투구하며 6회까지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호투했다는 거였다.
그리고 그사이.
보스턴 레드삭스의 달아오른 방망이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마운드를 폭격했다.
보스턴 레드삭스 타선은 2019시즌에 이어 2020시즌에도 팀 홈런 1위와 팀 타율을 1위를 기록한 화끈한 타격의 팀이었다.
강태영의 부진으로 챔피언십 시리즈 1차전부터 3차전까지는 다소 고전하는 모양새였지만, 그랜드슬램을 계기로 주춤했던 강태영의 방망이에 제대로 불이 붙고 말았다.
1회와 3회, 연타석 홈런을 때려낸 것이다.
강태영의 연타석 홈런을 앞세운 보스턴 레드삭스는 6회까지 무려 12득점을 뽑아내며 투수들의 어깨를 가볍게 만들어 줬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마운드 높이는 그리 높지 않았다. 확실한 원투펀치와 필승조를 갖추고 있는 건 맞지만, 3~5선발과 중간계투 투수들의 기복이 심한 편이다 보니 딱 메이저리그 평균 수준의 마운드 높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복이 심하더라도 타선이 대량 득점을 만들어 주는 날에는 안정감을 보여 주곤 했다. 확실한 득점 지원 앞에서는 흔들리지 않는 채 안정감을 뽐냈다.
결국 4차전에 이어 5차전마저도 보스턴 레드삭스가 잡아내자, 전문가들의 생각 또한 조금이 달라지기 생각했다.
일부이긴 하지만 분위기가 달아오른 보스턴 레드삭스가 펜웨이 파크로 돌아가서 두 경기를 모두 잡을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그렇게 펜웨이 파크로 돌아와 치르게 된 6차전.
딱!
와아아아아아!
강태영이 1회 말부터 3점 홈런을 기록하며 클리블랜드 마운드를 다시 한 번 폭격했다.
그러자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벤치는 강태영에게 고의 사구를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어떤 상황이건 상관없었다. 설사 만루 위기라 하더라도 과감하게 강태영을 걸렀다.
제대로 달아오른 강태영을 상대하느니 밀어내기로 1점을 내주는 게 낫다고 판단했지만…….
문제는 강태영 뒤에 있는 타자들 또한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거였다.
6차전은 5대9, 7차전마저도 초반부터 마운드를 폭격하며 2대7로 앞서나가자 펜웨이 파크에서는 함성이 그칠 줄을 몰랐다.
3차전을 패배할 때만 하더라도, 4차전에서 9회 초를 맞이할 때만 해도 보스턴 레드삭스의 탈락이 유력해 보였다.
세 경기 연속 1점 차 패배는 큰 점수 차이로 패배한 것보다 더 뼈아팠고, 메이저리그 역사상 7전 4선승제에서 리버스 스윕을 나온 건 지금껏 단 한 번밖에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보스턴 레드삭스는 해냈다.
밤비노의 저주를 깰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려는 것처럼, 자신들의 장점을 살리고 상대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물고 늘어졌다.
9회 초.
4차전 구원 등판에 이어 다시 한 번 마운드에 오른 에이스 크리스 셰일이 세 타자 연속 탈삼진으로 아웃카운트를 모조리 지워 버린 그 순간.
펜웨이 파크에서는 사람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귀에다 대고 속삭여도 대화를 주고받기 어려웠다.
엄청난 환호성이 펀웨이 파크를 뒤덮었으니까.
기적적인 리버스 스윕.
콜로라도 로키스와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 반지를 놓고 겨루게 될 팀은 보스턴 레드삭스였다.
* * *
-결국 레드삭스가 올라오는군.
‘난 솔직히 인디언스가 올라올 줄 알았어. 누가 봐도 인디언스가 올라올 만한 상황이었잖아.’
-인디언스의 패착은 4차전 9회 초에 총력전을 하지 않은 거야. 막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어. 안일하게 생각하다가 제대로 역공을 당한 거지.
‘인디언스가 올라왔더라면…….’
-레드삭스보다는 더 쉬웠겠지.
콜로라도 로키스의 입장에서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가 월드 시리즈에 더 좋은 그림이었을 테지만, 보스턴 레드삭스라고 해서 나쁠 건 없었다.
기적적인 리버스 스윕을 만드는 과정에서 투수들의 피로감은 쌓일 대로 쌓였을 테니까.
반면 콜로라도 로키스 투수들은 충분한 휴식을 취했고, 디비전 시리즈와 챔피언십 시리즈를 치르는 과정에서 결코 무리를 하지 않았다.
타격은 보스턴 레드삭스가 앞서지만, 콜로라도 로키스도 한번 달아오르면 막을 수 없을 만큼 분위기를 타는 팀이기도 하고.
전체적인 전력은 콜로라도 로키스가 우세를 점한다고 보는 게 맞았다.
무엇보다…….
‘월드 시리즈에서 맞붙자고 한 농담이 정말로 실현되게 될 줄이야.’
강태영과 최고의 무대에서 맞대결을 한다는 게 유현을 들뜨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