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145화 (145/155)

145화 계획대로 되고 있어 (1)

‘Son of bitch!’

송구 실책이 나온 순간 존 치프먼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입 밖으로 욕을 꺼내진 않았지만 얼굴이 잔뜩 붉어진 상태였고, 6회 말까지 이어 오던 평정심이 무너지고 말았다.

무사 2루 상황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투수코치가 마운드에 올랐다. 존 치프먼의 컨디션을 체크하고 평정심을 되찾아 주기 위해서였다.

“최악의 경우 1실점을 내줄 수도 있다 생각하고 투구해. 오늘 네 공이 좋아서 로키스 놈들도 쉽게 공략하지 못할 거야. 재수 없었다 생각하고 이번 이닝까지 확실하게 막자.”

“Damn it. 지난번에도 느낀 건데, 유현이랑 만날 때마다 경기가 안 풀리는 느낌이에요.”

“머리가 좋은 스타일의 투수야. 적절한 선에서 상대를 자극할 줄도 알아. 말려들어 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 차분하게 네 공을 던져. 만약 여기서 네가 흥분하면, 지난번처럼 녀석이 원하는 대로 놀아나는 골이야.”

“알아요. 알고 있다고요.”

존 치프먼은 지난 맞대결에서 유현의 자극에 말려들며 흥분해서 스스로 자멸하고 말았다.

그 후 존 치프먼은 마운드 위에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의 가장 큰 단점이 마운드 위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란 걸 제대로 인지했고, 마인드 컨트롤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덕분에 어느 정도 성과를 봤다.

유현의 기습 번트에 이은 실책으로 무사 2루를 허용했을 때, 속으로 욕이 나오고 얼굴이 붉어지긴 했지만 잠시뿐이었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3루수에게 괜찮다고 제스처를 취한 뒤, 심호흡을 통해 감정을 다스리며 흔들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1차전을 내주면 남은 시리즈를 허무하게 내줄 수도 있어. 무조건 내가 버텨 줘야 한다.’

투구 수 때문이라도 존 치프먼이 버틸 수 있는 건 7회가 한계다. 존 치프먼은 7회까지라도 완벽하게 이닝을 틀어막고 싶었다.

그래야 팀이 콜로라도 로키스를 상대로 1차전을 가져올 확률이 높으니까.

단기전에서 1차전의 중요성은 수백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나 콜로라도 로키스처럼 상승세를 타면 막기 힘든 팀을 상대로는, 1차전에서 분위기를 가져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에이스 존 치프먼을 2차전이 아닌 1차전에 투입하며 유현과 맞대결을 하도록 놔뒀다.

어차피 1차전을 잡지 못하면 남은 시리즈도 불리한 흐름이 이어질 거라 판단한 것이다.

존 치프먼이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체력이 떨어질 시점임에도 좋은 공을 던지기 위해 있는 힘을 모두 쥐어짰다.

더도 덜도 말고 아웃카운트 3개만 확실하게 잡자는 생각으로 투구했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아웃카운트를 가장 확실하게 잡을 수 있는 방법은 삼진을 잡아내는 것이고, 존 치프먼의 슬라이더는 삼진에 최적화된 구종 중 하나였다.

존 치프먼은 포심 패스트볼과 슬라이더만으로 두 개의 아웃카운트를 삼진으로 잡아냈다.

7회 말 2아웃까지 무려 14개의 삼진을 잡을 정도로 그의 컨디션은 좋았다. 한계 투구 수에 임박했음에도 구위가 살아 있었다.

이제 남은 아웃카운트는 하나.

딱 하나만 더 잡아내면 에이스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마운드에서 내려가는 거라 생각했다. 지칠 대로 지쳤지만 다시 한 번 투지를 끓어 올리며 찰리 블랙몬을 상대할 준비를 했다.

2스트라이크 1볼 카운트.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기 위해 113구째에 위닝 샷으로 선택한 건 하이 패스트볼이었다.

존 치프먼이 투구를 하는 순간, 유현은 2루에서 스타트를 끊었다. 카운트가 몰린 상황이다 보니 결과와 상관없이 뛰는 게 옳은 판단이었다.

딱!

찰리 블랙몬이 하이 패스트볼을 받아쳤지만 구위에 밀리는 바운드가 크게 뒤는 유격수 앞 땅볼이 되고 말았다.

워낙 바운드가 크게 튀어 유격수가 타구를 잡아내는 데에 시간이 제법 걸렸고, 그사이 유현은 3루를 돌아 홈을 향해 내달렸다.

그 순간 유격수는 고민에 빠졌다.

바운드가 튀는 사이 제법 베이스러닝을 한 찰리 블랙몬과, 3루를 돌아 홈을 향해 내달리고 있는 유현 중에 누구를 선택해야 할까?

유격수의 선택은 홈이었다.

침착하게만 수비한다면 홈에서 유현을 잡아낼 수 있는 상황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문제는…….

유격수가 공을 한 번 더듬으면서 곧장 송구를 하지 못하며 시간이 끌렸다는 것이다.

다행히 송구가 비교적 정확하게 홈으로 향했고, 포수는 곧장 유현에게 태그를 시도했다. 유현은 태그를 피하기 위해 몸을 튼 채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시도했다.

그 결과.

-세이프! 유현 선수의 베이스 터치가 포수의 태그보다 빨랐습니다! 몸을 튼 덕분에 태그가 늦게 됐습니다!

-유격수가 공을 한 번 더듬은 게 치명적이네요. 정상적인 타이밍에 승부했더라도 제아무리 유현 선수라 해도 홈에서 살지 못했을 겁니다.

-맞습니다. 유현 선수 입장에서는 아웃에서 2스트라이크로 몰렸다 보니 달린 걸로 보입니다만, 결과적으로 일찌감치 스타트를 끊은 게 최고의 결과로 이어지게 됐습니다.

-존 치프먼 선수 입장에서는 아쉬울 거 같습니다. 두 번의 실책으로 점수를 내주게 됐으니까요. 콜로라도 로키스의 선발투수가 유현 선수라는 걸 감안하면 더더욱 말이죠.

-거기가 유현 선수는 투구 수 관리도 잘했습니다. 컨디션에 문제가 없는 한 9회까지 마운드를 지킬 가능성이 높습니다.

유현의 빠른 발이 균형을 무너트렸다.

* * *

결국 존 치프먼은 화를 참지 못했다.

실책을 저지른 3루수와 송구를 한 차례 더듬어서 유현을 잡아내지 못한 유격수에게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더그아웃에 들어와 글러브를 집어던지는 것으로 말을 대신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현은 투수코치와 대화를 나누며 미소를 지었다.

‘좋아. 계획대로 되고 있어.’

에이스는 절대 흔들려선 안 된다.

컨디션 난조로 인해 좋은 피칭을 할 때라도 당당해야 한다. 피칭 내용이 엉망이라고 한들, 상대에서 얕보여서는 안 되고 동료들의 기세를 꺾어서는 안 된다.

분명 존 치프먼은 이전과 달리 마운드에서 흔들리지 않았다.

계속해서 단점으로 지적됐던 다혈질적인 면모를 어느 정도 개선한 걸로 보였고, 3루수의 실책이 나왔을 때도 아주 잠깐 얼굴이 붉어지긴 했지만 투수코치의 마운드 방문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유현의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남는 반응이었다.

그가 원한 건 자신의 출루로 인해 존 치프먼의 멘탈이 흔들리는 거였다. 이전처럼 존 치프먼을 흔들어서 손쉽게 승리를 얻어내길 바랐다.

결국 유현은 목적을 이뤘다.

당연히 해야 할 플레이에 상대의 실책이 더해지며 득점으로 이어졌고, 그로 인해 존 치프먼이 결국 감정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존 치프먼은 분명 좋은 투수고, 한 팀의 에이스가 될 자격이 충분했다.

문제는 동료들이었다.

지난 맞대결에서 유현에게 제대로 농락을 당했고, 오늘 경기에서도 6회까지 유현의 연기에 제대로 농락을 당하고 말았다.

거기에 단기전이라는 부담감까지.

실점이 나오면 경기를 패배할 수밖에 없는 압박이 실책으로 이어졌다.

0대1.

고작 한 점일 뿐이지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입장에서는 넘을 수 없는 벽으로 느껴졌다.

6회까지 힘을 아낀 유현은 7회부터 98마일짜리 포심 패스트볼을 뻥뻥 뿌려 댔고,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타자들은 유현의 구위에 밀려 좋은 타구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결국 유현은 마지막 아웃카운트까지 자신의 손으로 잡아내며 팀에게 챔피언십 시리즈 1차전의 승리를 안겨 줬다.

9이닝 8피안타 무사사구 6탈삼진 무실점.

세인트루이스 입장에서는 단순히 1차전을 내준 걸 넘어, 시리즈 전체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치명적인 패배를 하고 말았다.

에이스 존 치프먼을 내세우고도 패배를 했고,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과정 속에서 필승조 또한 소모했으니까.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유현의 투구 수가 고작 78구에 불과하다는 거였다.

체력을 아낀 유현이 어쩌면 4차전에서도 선발로 등판할지도 모른다. 유현이 1․4․7차전에서 선발로 등판하는 게 콜로라도 로키스가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준비한 전략이 아닐까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유현이 1차전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컨디션이 안 좋은 척 연기를 할 이유가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만약 유현이 4차전과 7차전에서도 등판한다고 가정해보자.

“유현을 상대로 승리를 가져올 수 있겠는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코치들은 감독의 질문에 그 누구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시즌 중에도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던 유현은 포스트 시즌에 들어오니 전략전인 면모까지 더해지며 악랄한 괴물이 됐다.

유현을 상대로 득점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한들 1~2점일 가능성이 높았고, 그 점수만으로는 승리를 확실하기 어려웠다.

아니.

1~2점마저도 내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단기전에서의 유현은 정규 시즌과 전혀 달랐다. 조금도 방심하지 않은 채 철저하게 무실점에 초점을 맞추고 피칭을 이어나갔다.

유현이 선발로 등판한다면 그 경기는 승기를 가져오기 힘들다고 봐야 한다.

결국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코칭스태프가 내린 결론은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동시에 실현시키기 어려운 것이었다.

유현이 선발 등판하지 않는 모든 경기에서 승리해야 한다. 그래야지 월드 시리즈에 진출할 수 있다.

자신들의 판단이 콜로라도 로키스가 원하는 것이라는 것도 모른 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2차전을 이기기 위해 전의를 불태웠다.

* * *

봉식이는 유현에게 자주 말하곤 했다.

단기전을 치르면서 특정 경기를 포기하다는 건 이길 생각이 없는 것과 같다고, 상대가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 수 있다면 단기전에서 승리할 확률이 배 이상 높아진다고 말이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이다.

승리에 대한 부담은 선수들을 긴장하게 만든다.

긴장을 하면 제 기량을 발휘하기도 힘들거니와, 실책이 나올 가능성도 높아진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챔피언십 시리즈 1차전을 패배한 과정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유현이 등판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2․3․5․6차전에서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건, 승리에 대한 부담이 그만큼 커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챔피언십 시리즈 2차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타자들은 조급했다. 타석에서 침착하게 공을 보지 못한 채 결과물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노리는 코스와 비슷한 궤적으로 공이 들어오면 일단 스윙을 하고 봤다.

문제는 콜로라도 로키스의 2선발인 카일 프리랜드가 훌륭한 그라운드 볼러라는 거였다.

급한 스윙은 범타로 이어졌고, 카일 프리랜드는 좀처럼 타구가 내야를 넘어가는 걸 허락하지 않은 채 철벽을 세웠다.

-이거 경기가 너무 쉬운 거 아닌가 모르겠네.

‘내가 4차전이랑 7차전에도 선발로 등판할 거라 생각하는 거겠지?’

-그게 아니라면 고작 1차전을 내줘놓고 저렇게 조급해 할 이유가 없겠지. 4차전과 7차전을 제외하고 남은 경기를 무조건 다 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거야.

‘그게 함정카드인지도 모른 채 말이야.’

유현이 1차전에서 노린 건 크게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완급조절을 하다가 7회 초부터 베스트 컨디션으로 투구하며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타자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것, 두 번째는 멘탈이 약한 존 치프먼을 어떻게든 흔드는 것, 마지막으로 자신이 4차전과 7차전에서 선발로 등판할 거라는 인상을 심어 주는 거였다.

결과적으로 세 가지 목표를 모두 달성했다.

함정에 빠진 줄도 모르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선수단은 유현의 계획에 제대로 놀아났다.

거기에 유현은 인터뷰를 통해 쐐기를 박았다.

“유현 선수. 6회까지 구속이 떨어진 것처럼 보이다가 7회부터는 정상 컨디션을 되찾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투구 수를 많이 아꼈고요. 의도한 피칭이었습니까?”

“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타자들의 스윙을 유도하기 위해 의도했습니다.”

“완봉승을 거뒀지만 투구 수는 78구에 불과합니다. 혹시 베일에 싸인 4차전 선발이 유현 선수입니까?”

“팀이 원한다면 언제 어느 순간이건 등판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4차전 선발이라…… 결정은 감독님이 하시겠지만 전 자신 있습니다. 오늘처럼 완봉할 자신 말이죠.”

나 4차전에 선발로 등판할 거야.

유현이 대놓고 광고를 하며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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