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Roctober (5)
일부 언론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유현을 상대로 정면 승부를 피할 거라 예상한 것과 달리, 1차전 선발은 에이스 존 치프먼이었다.
설사 1차전에서 패배하더라도 경기를 쉽게 내주면 절대로 시리즈를 가져올 수 없다, 힘들더라도 어떻게든지 비벼 보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1회 말.
우우우우우우!
You suck! You suck!
존 치프먼이 마운드에 오르자마자 쿠어스 필드가 야유에 휩싸였다. 일전에 유현을 향해 빈볼을 던졌던 존 치프먼을 향해, 콜로라도 로키스 팬들은 야유와 함께 차마 입에 담지 못할 거친 욕설마저 서슴없이 뱉어 냈다.
‘Fucking rockies. 언제까지 욕할 수 있나 보자고. 마운드 위에서 마지막까지 서 있는 건 유현이 아니라 나일 테니까.’
존 치프먼은 야유를 크게 쓰지 않았다.
원정 경기에서 상대 팀 에이스가 욕을 먹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거니와, 일전에 있었던 빈볼 문제로 인해 쿠어스 필드에서 심각한 수준의 야유가 쏟아질 거라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욕설이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피칭에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오늘 존 치프먼의 컨디션이 좋았다.
그 어떤 타자를 상대라도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을 얻을 정도였다. 연습 피칭을 하면서 공의 무브먼트가 살아 있는 게 느껴졌다.
홈 팀 팬들의 야유 속에서 끝까지 마운드를 지키고 팀의 승리를 이끼는 것, 존 치프먼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그림이었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존 치프먼이 세 타자를 모두 탈삼진으로 돌려세우며 기분 좋게 첫 이닝을 시작했다.
-오늘 존 치프먼 선수의 공이 좋습니다. 포심 패스트볼과 슬라이더의 무브먼트가 살아 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입니다.
-이런 날의 존 치프먼 선수는 탈삼진 머신이 되곤 하거든요. 반면 유현 선수의 컨디션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1차전 결과가 모두의 예상과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컨디션이 안 좋은 유현 선수를 효율적으로 공략할 수 있다면 말이죠.
2회 초.
유현이 마운드에 올랐다.
자신감 넘치는 존 치프먼과 대조적으로 유현의 얼굴은 평소와 달리 경직된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럴 만도 했다.
1초 포심 패스트볼의 최고 구속이 96마일에 머물 정도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으니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휴식일이 긴 게 악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고, 모종의 이유가 컨디션에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 확실한 건 최고 구속이 2마일이나 떨어질 정도로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거였다.
유현의 컨디션은 2회 초에도 나아지지 않았다.
초구로 던진 포심 패스트볼의 구속이 95마일에 머물렀고, 생각보다 무브먼트가 밋밋해 중전 안타를 허용하고 만 것이다.
이후 유현은 포심 패스트볼을 봉인했다.
가뜩이나 쿠어스 필드에서 사용하기 까다로운 구종인데 컨디션마저 안 좋다. 안타를 허용한 이상 굳이 사용할 이유는 없었다.
투심 패스트볼, 커터, 그리고 싱커 위주로 범타 유도에 신경을 쓰며 피칭을 이어 나갔다.
다행히 2회 초 실점은 없었다.
투심 패스트볼을 결정구로 땅볼 유도를 하면서 위기를 벗어났다. 다만 투심 패스트볼의 구속도 최고 구속이 95마일에 머물 정도로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게 확연히 눈에 띄었다.
어렵사리 이닝을 틀어막은 유현이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굳은 표정으로 투수코치와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눴다.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는 선수들 또한 덩달아 표정이 굳어 있었다.
아니, 굳은 척하려고 노력했다.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가는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으니까.
“현. 시즌 끝나면 뭐 할 거야?”
“구단에서 받을 월드 시리즈 보너스로 코치님 머리 심어 줄까 고민하고 있어요.”
“Damn it. 다음부터 마운드에 올라갈 때마다 대머리들의 분노를 담아 네 머리카락을 한 움큼씩 뽑아 주겠어.”
“그럼 전 매 경기 완봉을 해야겠네요. 코치님처럼 대머리가 될 순 없잖아요.”
“세계 대머리 협회가 널 가만 두지 않을 거야.”
굳은 표정과는 달리 두 사람은 유쾌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만약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선수 중 한 명이라도 이 대화를 들었다면 유현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투수가 이런 대화를 나눌 정도로 여유가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곧 결론에 도달했으리라.
어쩌면 유현의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게 아니라, 좋지 않은 척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결론 말이다.
그랬다.
유현은 컨디션이 안 좋은 게 아니었다. 컨디션이 안 좋은 척 연기를 하고 있는 거였다.
보통 투수들이 컨디션이 나쁠 땐 구속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제구가 흔들리면서 실투가 자주 나온다는 거다.
평소보다 위력적이지 않은 공이 실투가 되다 보니 문제가 되는 거다.
하지만 유현은 제구가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구속은 떨어질지언정 제구만큼은 멀쩡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보더라인 구석구석을 잘 찌르며 타자들을 까다롭게 만들었다.
이쯤 되면 세인트루이스 타자들도 눈치챌 법 하건만, 그들은 유현의 구속이 떨어져 있고 안타를 허용한다는 것에 눈이 멀어 유현의 제구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콜로라도 로키스 벤치와 유현이 노린 바였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진실을 깨달았을 땐, 이미 경기가 걷잡을 수 없는 분위기로 흘러간 이후일 가능성이 높았다.
컨디션 나쁜 척하기.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농락하기 위해, 빈볼을 맞았던 걸 제대로 복수해 주기 위해 유현이 성심성의껏 준비한 전략이었다.
* * *
컨디션의 좋은 날의 유현은 1점조차도 행운이 따르지 않으면 쥐어짜는 게 불가능한 괴물이다.
유현이 더 무서운 건, 그가 정규 시즌 대부분의 경기에서 좋은 컨디션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도 최소한의 실점만을 하며 긴 이닝을 틀어막는 모습을 보여 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컨디션이 좋을 때의 괴물 같은 포스를 보여 주진 못했다.
만약 유현이 챔피언십 시리즈 1차전에서 베스트 컨디션으로 경기에 임했다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타자들은 일찌감치 전의를 상실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컨디션이 좋은 유현은 타자들에게 있어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반면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잘하면 공략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은 투수가 된다.
다들 그 공략에 실패했지만 말이다.
문제는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였다. 맞춰 잡기에 특화된 두 구종으로 인해 무너트릴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무너트리지 못하는 모습이 자주 나왔다.
세인트루이스 타선은 자신들은 다를 거라고, 다른 팀과는 달리 메이저리그 전체 3위에 오른 화끈한 타격으로 흔들리는 유현을 무너트릴 수 있을 거라고 확신을 품었다.
물론 헛된 기대였다.
그들의 확신은 곧 유현의 노림수였다.
컨디션이 안 좋은 자신을 공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품게 만들어 적극적으로 스윙을 유도하는 것, 그로 인해서 효율적으로 투구 수 관리를 하는 것.
그게 챔피언십 시리즈 1차전에 임하는 유현이 내세운 목표였다.
물론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구속을 떨어트린 상황에서도 타자들을 제압할 수 있는 수준급 제구력이 필요하고, 주자가 출루를 했을 때도 떨어진 구속을 유지할 배짱까지 있어야 가능하다.
중요한 건 유현이 그 두 가지를 모두 갖춘 투수라는 사실이다.
유현은 구속을 낮추더라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타자들을 제압할 자신이 있었고, 실력으로 그 사실을 증명해보였다.
6회까지 안타를 무려 8개나 허용했지만 그 과정에서 단 1실점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즈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타자들은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눈치를 못 채는 게 바보였다.
피안타를 8개나 허용했음에도 실점이 없었고, 무엇보다 투구 수가 고작 46개에 불과했으니까.
“……뭔가 이상하지 않아?”
“어쩌면 오늘 유현은 컨디션이 안 좋은 게 아닐지도 몰라. 구속은 조금 떨어지지만 주자가 출루했을 때 한정으로 제구가 안정적이야.”
“구속을 떨어트린 게 유현이 의도한 거라고?”
“맞춰 잡을 생각일 수도 있지.”
“그게 가능해?”
“저 괴물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그게 아니라면 지금 이 상황, 설명이 불가능하잖아.”
어쩌면 유현이 일부러 구속을 떨어트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일순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타자들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구속이 떨어진 유현을 상대로도 6회까지 점수를 내지 못했는데, 만약 7회부터 유현이 정상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면?
득점을 만들어 내는 게 불가능하다.
존 치프먼이 호투를 하고 있긴 하지만, 6회 말까지 투구 수가 96구에 육박했다. 사실상 7회가 마지막이라고 봐야 한다.
메이저리그 평균 수준의 불펜으로 콜로라도 로키스 타선을 상대로 실점이 하지 않는 게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 의문부호가 붙었다.
그렇게 이어진 7회 초.
와아아아아아!
유현이 마운드에 올라 초구로 98마일짜리 몸쪽 꽉 찬 포심 패스트볼을 던지자, 쿠어스 필드가 다시 한 번 환호성으로 뒤덮였다.
그리고 더그아웃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봉식이는 잔뜩 신이 났다.
-또 속냐 바보들아!
-확실히 유현 씨는 머리가 좋은 거 같아요. 자신의 능력을 120퍼센트 활용할 줄 아는 투수는 드문데 말이죠.
-저 자식 머리 나쁜데요. 저거 다 제가 가르쳐 준 거예요. 상대 팀을 어떻게 방심하게 만들지, 어떻게 하면 약점을 확실하게 후벼 팔 수 있을지 항상 고민하게 만들었거든요.
-그럼 봉식 씨 머리가 좋은 건가요?
-흠흠. 제 입으로 자랑하기는 뭐하지만 제가 대한민국에 있는 땅의 정령 중에서 가장 머리가 좋죠.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100년 전쯤에…….
봉식이를 만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유현은 머리가 좋은 스타일의 선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봉식이를 만난 뒤 달라졌다.
끝없는 주입식 교육을 통해 상대의 약점을 어떻게 하면 잘 후벼 팔 수 있을지를 계속해서 고민하고 실행에 옮기는 투수가 됐다.
봉식이의 주입식 교육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챔피언십 시리즈 1차전에서 제대로 빛을 발했다.
컨디션이 안 좋은 척 철자하게 연기를 하며 투구 수를 관리했고, 눈치를 채기 시작할 7회 초부터는 컨디션이 좋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타자들의 멘탈을 박살 내기 위한 움직임을 보여 줬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세 타자 연속 탈삼진으로 7회 초를 확실하게 틀어막은 유현이 어퍼컷 세레모니를 한 뒤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이어진 7회 말.
6회 말까지 투구 수 96구를 기록한 존 치프먼이 다시 한 번 마운드에 올라 선두타자 유현을 상대하게 됐다.
-유현 선수가 세 번째 타석에 들어섭니다. 오늘 유현 선수는 앞선 두 타석에서 전혀 스윙을 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타석에서는 다를 수도 있습니다. 6회까지와 달리 7회 초에는 98마일을 기록하며 컨디션에 문제가 없다는 걸 보여 줬거든요. 양 팀이 무득점 이닝을 이어 오고 있는 상황에서, 유현 선수가 팀을 득점을 위해 움직일지도 모릅니다.
유현은 집요하게 존 치프먼을 괴롭혔다.
배트를 절반만 잡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짧게 쥔 뒤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들어오는 공은 어떻게든지 쳐냈고, 존 밖으로 빠지면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스윙을 참아 풀 카운트를 만들어 냈다.
존 치프먼은 승부를 피하지 않았다.
투수에게 볼넷을 내주느니 안타를 맞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스트라이크 존 안에 포심 패스트볼과 슬라이더를 과감하게 집어넣었다.
그렇게 이어진 10구째.
딱.
유현이 풀카운트에서 상황에서 기습 번트를 대는 과감한 선택을 했다.
만약을 대비해 전진 수비를 하고 있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3루수가 빠르게 앞으로 튀어 나오며 타구를 잡아냈다.
그리고 1루를 향해 송구를 했지만…….
-OMG! 3루수 앤드류 윌턴 선수의 송구가 빠지고 맙니다! 유현 선수가 그대로 2루를 향해 내달립니다. 1루수가 다급히 타구를 잡아 2루로 송구해 보지만…… 유현 선수가 더 빨랐습니다!
-아. 여기서 치명적인 실책이 나옵니다. 주자가 유현 선수라는 걸 감안했을 때, 방금 이 실책은 실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유현이 워낙 스타트를 빨리 끊은 탓에 1루에서 접전이 예상됐고, 마음이 급한 3루수가 다급히 송구를 하며 실책이 나오고 말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무사 2루의 찬스.
콜로라도 로키스 선수단은 챔피언십 시리즈 1차전을 가져올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