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Roctober (3)
LA다저스의 감독은 한 시즌을 놓고 봤을 때 괜찮은 선수단 운영을 보여준다. 다만 단기전에서의 운영과 전략은 정규 시즌에 비해서 아쉬운 부분이 많다는 평가를 받곤 했다.
정확히는 정규 시즌에서의 전략을 포스트시즌에서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뻔한 전략이 상대 팀들에게 공략을 당하며 월드 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지목된 게 사실이다.
2020시즌 LA다저스 대 콜로라도 로키스의 내셔널리그 디비전 시리즈 1차전은 LA다저스의 뻔한 전략의 단점이 그대로 드러난 경기였다.
트레버 스토리를 대타로 기용할 때, 콜로라도 로키스 벤치는 LA다저스 벤치가 상대 전적이 좋지 않은 여환진을 내리고 우완투수를 올릴 거라고 확신했다.
오늘 여환진의 컨디션은 좋았다.
쿠어스 필드에서 그저 그런 통산 성적을 기록했음에도, 과감하게 포심 패스트볼을 내려놓고 범타 유도 위주의 피칭을 통해서 7회 말 2아웃까지 실점을 허용하지 않았으니까.
방심한 탓에 유현에게 2루타를 허용하고 말았지만 컨디션은 여전히 괜찮았다.
그럼에도 LA다저스 벤치는 투수교체를 단행했다. 상대전적에서 열세라는 이유로 트레버 스토리를 잡기 위해 우완투수를 기용했다.
해당 투수 또한 트레버 스토리를 상대로 통산 2할 9푼 5리의 피안타율을 기록하고 있다는 걸 망각한 채 말이다.
결과적으로 최근 다섯 경기에서 무실점 호투를 보여줬던 우완투수는 트레버 스토리에게 2점 홈런을 허용하고 말았고, 홈런을 기점으로 후끈 달아오른 콜로라도 로키스의 타선을 막지 못한 채 2사 1․2루 위기까지 자초한 뒤 고개를 숙인 채 마운드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LA다저스 벤치의 판단이 나쁘지 않았다.
여환진의 뒤를 이어 마운드에 올린 우완투수의 최근 컨디션은 분명 좋았고, 여환진은 트레버 스토리와의 통산 상대전적이 최악이기에 교체 자체는 일리 있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야구는 결과로 말하는 법이다.
결과가 안 좋으면 결국 실패한 작전이다.
투수교체 한 번으로 인해 LA다저스는 무려 6실점을 하며 디비전 시리즈 1차전을 허무하게 내줄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여환진을 그대로 놔뒀더라면?
아니면 다른 투수를 기용했더라면?
아쉬운 가정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상대 벤치에게 뻔한 작전이 간파당한 후유증이 컸다.
더 이상 팽팽한 균형 따윈 남아있지 않았다.
8회 초.
마운드에 오른 유현은 LA다저스 타자들의 기세가 완전히 꺾인 것을 느꼈다.
‘오늘 경기는 포기한 건가?’
6점을 내준 다음 이닝에서 마운드에 오른 투수가 0점대 방어율의 선발투수라면, 타자들의 입장에서는 기가 꺾이는 게 당연하다.
추격 의지를 불태우려고 해도 무려 6점 차이인 상황에서 0점대 방어율의 선발투수를 마주하고 있자니 몸이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유현은 의욕이 꺾일 대로 꺾인 LA 다저스 타자들을 비교적 손쉽게 요리했다. 작정하고 삼진을 잡기 위해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포심 패스트볼을 찔러 넣어도 대처하지 못했고, 스플리터에는 연신 헛스윙을 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결국 콜로라도 로키스는 LA다저스를 상대로 0대6으로 디비전 시리즈 1차전에 승리했다.
* * *
콜로라도 로키스는 디비전 시리즈 2차전에서도 승리를 쟁취하며 챔피언십 시리즈 진출까지 단 1승만을 남겨두게 됐다.
적어도 7회 말 2아웃까지는 팽팽했던 1차전과 달리, 2차전은 경기 초반부터 콜로라도 로키스 쪽으로 승기가 기우는 모양새였다.
LA다저스 투수진은 한 번 달아오른 콜로라도 로키스 타선을 막아내지 못했다. 4회까지 무려 11실점을 하며 무너지고 말았다.
반면 이번 시즌 20승과 1점대 방어율을 동시에 달성했음에도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한 팀 동료에게 밀려 사이영 상 수상이 사실상 좌절된 카일 프리랜드는, 8회까지 단 1실점만을 허용하며 LA다저스 타선을 완벽하게 틀어막았다.
혹자들은 단기전에서 가장 중요한 건 투수력이라고, 더 정확히는 선발투수들이 호투를 해주는 거라고 말하곤 한다.
콜로라도 로키스는 선발투수들의 호투가 단기전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디비전 시리즈 1차전과 2차전에 제대로 보여줬다.
1차전은 유현의 9이닝 무실점 완봉승으로 승리를 챙겼고, 2차전은 카일 프리랜드의 8이닝 1실점 호투를 통해 승리를 챙겼다.
두 경기를 잡는 데에 기용한 투수는 세 명 뿐이었고, 실점은 고작 1점에 지나지 않았다.
실점 자체가 워낙 적다 보니 타자들의 입장에서는 대량 득점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부담이 적었고, 이는 오히려 타자들이 타석에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됐다.
부담이 없으니 좀 더 차분하게 공을 보며 원하는 구종을 노려 치는 게 가능했던 것이다.
게다가 LA다저스 벤치의 투수 교체 타이밍과 기용 선수가 뻔하기도 했고 말이다.
어쨌거나 콜로라도 로키스는 2연승을, LA다저스는 2연패를 한 채 LA로 넘어가게 됐다.
그리고 두 팀 모두 3차전 승리를 바랐다.
콜로라도 로키스 입장에서야 3연승으로 챔피언십 시리즈에 진출하면 체력 관리에 용이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반면 LA다저스는 챔피언십 시리즈 진출에 대한 희망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무조건 3차전을 잡고, 기세를 몰아 리버스 스윕을 노려야만 했다.
3차전에서 LA다저스는 에이스 워커 뷸러를 기용했다. 에이스의 호투를 바탕으로 반드시 3차전을 잡겠다는 계산이었다.
반면 콜로라도 로키스는 미리 예고했던 로테이션을 바꾸지 않았다. 유현과 카일 프리랜드의 뒤를 이어 존 그레이가 디비전 시리즈 3차전 선발투수로 마운드에 올랐다.
정규 시즌에서의 무게감만 보자면 워커 뷸러 쪽이 조금 더 우세였지만, 그렇다고 존 그레이의 정규 시즌 성적이 엄청나게 부족한 건 아니었다.
부활에 성공하며 사이영 상도 노려볼 수 있을 만한 기량을 보여주고 있지만, 컨디션에 따른 기복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투수.
존 그레이에 대한 세간의 평가였다.
컨디션이 좋은 날의 존 그레이는 사이영 상을 수상한 투수들에게 비견될 정도의 기량을 보여줬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는 평범한 투수로 전락하는 날이 많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투심 패스트볼이 있었다.
디비전 시리즈 3차전.
존 그레이의 투심 패스트볼은 퍼펙트게임을 달성했던 그날처럼 무브먼트가 미쳐 날뛰었다.
제구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존 안에만 집어넣는다 생각하고 던지면 됐다. 던지는 투수도 공을 받는 포수도 공을 쳐야 하는 타자도 어디로 튈지 예상하지 못하는 움직임을 보여주곤 했으니까.
다른 공들은 투심 패스트볼의 위력을 강화해주기 위한 조연에 지나지 않았다.
존 그레이가 결정구로 투심 패스트볼을 던질 거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투심 패스트볼을 제대로 공략하는 타자는 없었다.
LA다저스 팬들의 일방적인 응원 속에서도 존 그레이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공을 믿고 마운드에서 묵묵하게 공을 던질 뿐이었다.
유현과 카일 프리랜드는 대부분의 경기에서 제 몫을 해냈다. 컨디션이 좋건 나쁘건 선발투수로서 해줘야 할 역할에 충실했다. 두 투수가 등판할 때면 선수단도 팬들도 반드시 이길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는 한다.
디비전 3차전에서 존 그레이가 마운드 위에서 보여준 모습은, 유현과 카일 프리랜드가 항상 보여주던 든든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존 그레이와 맞대결을 하게 된 워커 뷸러가 부진한 것도 아니었다.
1회부터 6회까지.
단 두 개의 안타만 허용하면서 콜로라도 로키스 타선을 완벽하게 틀어막은 것이다.
양 팀이 6회까지 득점을 만들어 낼 제대로 된 기회조차 잡지 못한 팽팽한 투수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콜로라도 로키스 감독은 투수코치를 불러서 조용히 속삭였다.
“유현을 준비시켜야 할 것 같군.”
* * *
팽팽한 투수전이 이어질 때 승리를 가져오기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빠른 발을 이용해 마운드의 집중력을 분산시켜주는 것이다.
어차피 많은 점수가 필요한 게 아니다.
투수전에서는 기껏해야 1~2점이 승부의 향방을 가른다. 당연한 말이지만 선취점을 만들어 낸 팀이 유리한 게 사실이다.
7회 초.
찰리 블랙몬이 출루하자마자 몸을 풀고 있던 유현이 더그아웃에서 나왔다.
‘내 차례인 것 같네.’
-홈 베이스를 못 밟으면 더그아웃으로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마라!
‘당연히 밟아야지. 느낌 상 1점만 뽑으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일단 득점을 뽑으면 불펜을 총동원해서 틀어막기에 들어가면, 웬만해서는 이긴다고 봐야지 그래서 네 역할이 더 중요하다.
‘걱정하지 마. 작전 성공시키고 올 거니까.’
찰리 블랙몬의 발이 크게 느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상대 배터리를 흔들어 줄 정도로 빠르지도 않았다. 확실한 득점을 위해서는 발이 빠르고 도루 센스가 뛰어난 주자가 필요했다.
이를 테면 정규 시즌에 39번 도루 시도를 해서 38번 성공시킨 한국인 투수처럼 말이다.
찰리 블랙몬은 1루 베이스를 밟자마자 더그아웃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해서 채운 건 불과 3일 전 디비전 시리즈 1차전에서 선발투수로 등판했던 유현이었다.
-찰리 블랙몬 선수가 출루에 성공하자마자 콜로라도 로키스 벤치는 유현 선수를 대주자로 기용하는 승부수를 띄웠습니다. 확실하게 득점을 뽑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봐야겠죠?
-그렇습니다. 유현 선수의 대주자 기용은 어느 정도 예정된 수순이긴 합니다. 점수를 쥐어짜야 할 때 유현 선수보다 더 믿음직한 대주자가 콜로라도 로키스에는 없거든요.
-메이저리그 전체를 보더라도 비교 대상이 몇 없을 것 같습니다만.
-동의합니다. 유현 선수는 최고의 투수이자 최고의 대주자입니다.
우우우우우!
유현이 대주자로 기용되는 걸 확인하자마자 다저스타디움이 야유로 가득 찼다.
디비전 시리즈 1차전에서 완봉승을 기록한 지구 라이벌 팀의 에이스가 선취점이라는 확실한 목적을 지닌 채 대주자로 기용됐다. LA다저스 팬들 입장에선 야유를 쏟아내는 게 당연했다.
물론 유현은 야유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원정 경기에서의 야유는 에이스의 숙명이기도 하다. 특히나 팬들이 극성이기로 유명한 일부 구단에서는 그냥 마운드에 서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투구에 집중하기 힘들 정도로 야유를 쏟아내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KBO리그에서도 원정을 가면 가끔씩 야유를 받기도 했고 말이다.
오히려 유현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었다.
야유를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리드 폭을 넓게 잡은 채, 언제든지 2루로 뛰어갈 수 있다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줬다.
마운드 위의 투수가 도저히 견제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움직임이었다.
LA다저스의 포수가 이를 악물었다.
‘Fucking rockies. 이미 노출된 전략이 포스트시즌에서도 먹힐 거 같아? 투수를 대주자로 기용한 걸 후회하게 만들어주겠어.’
LA다저스는 유현을 철저하게 분석했다.
결국 마운드 위의 유현을 공략하는 데에 실패하기는 했지만, 주요 상황에서 유현이 대주자로 기용될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 가능한 범주였다.
정규 시즌에서 유현이 LA다저스를 상대로 만들어 낸 도루는 무려 11개였다. 11번을 시도해서 11번 모두 성공했다.
이번만큼은 다를 거라고, 철저하게 분석한 만큼 도루를 하지 못하게 만들 거라고 LA다저스의 포수는 각오를 다졌다.
물론······.
-유현 선수가 1스트라이크 1볼 상황에서 2루 베이스를 훔칩니다. 피치아웃이 나왔는데도 결국에는 도루에 성공하네요.
-타이밍이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스타트가 빨랐고, 과감한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이 돋보였습니다. 결국 LA다저스는 유현 선수의 빠른 발을 봉쇄하는 데에 실패했습니다.
-사실 LA다저스뿐만 아니라 모든 팀들이 유현 선수의 도루를 막지 못했습니다. 유현 선수가 뛸 거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말이죠. 유현 선수의 빠른 발과 확실한 판단 능력은 알고 있다 해서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맞습니다. 타자로서 풀타임을 소화했다면 100도루 이상도 거뜬할 거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닙니다.
안다고 다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유현은 피치아웃에도 불구하고 2루 베이스를 훔치면서 결국 스코어링 포지션에 들어갔다.
‘무리해서 3루까지 갈 필요는 없겠지?’
베이스를 훔치긴 했지만 타이밍이 아슬아슬했다. LA다저스 배터리가 도루에 대한 대비를 잘하고 왔다는 게 느껴졌다.
3루를 시도한다면 잡힐 가능성이 높았다. 무사 2루 찬스를 잡았는데 굳이 무리해서 3루 도루까지 시도할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무엇보다 유현은 동료들을 믿었다.
유현이 출루했을 때, 홈으로 불러들이는 건 콜로다로 로키스 타자들이 정규 시즌 내내 지겹도록 성공시켰던 작전 중 하나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