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역사에 남기 위해 (3)
시즌 최종전에서 콜로라도 로키스의 테이블 세터인 헨리 곤잘레스와 랜디 오스틴은 단 한 번도 출루를 하지 못하며 고전했다.
찰리 블랙몬과 놀란 아레나도가 도합 6안타를 기록했음에도 득점으로 이어지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밥상이 차려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반드시 득점이 필요한 상황.
콜로라도 로키스 벤치는 클러치 능력이 확실한 트레버 스토리를 선택했다.
그 순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는 투수 교체를 단행했다. 트레버 스토리를 잡아내기 위해 우투수를 기용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봉식이는 혀를 찼다.
-저러다가 동점 허용하면 답도 안 나올 텐데. 막을 자신이 있다는 건지, 어쩔 수 없어서 저런 선택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네요.
-어쩔 수 없는 거 아닐까요? 뒷일까지 생각하기보단 지금 당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나쁜 판단은 아니지만, 문제는 로키스 벤치에게 그 판단이 다 읽히고 있다는 거죠. 어떻게든지 동점을 만들 수만 있다면, 오늘 경기는 결국 로키스가 이길 거예요.
8회까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는 7명의 불펜투수를 기용했다. 적절한 투수 교체를 통해서 실점 위기를 막아내긴 했지만, 투수력이 약한 그들 입장에서는 불펜투수를 7명이나 기용했다는 건 분명한 부담이다.
그리고 콜로라도 로키스의 연속된 대타 작전은 상대의 약점을 후벼 파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일단 유현을 출루시킨 뒤 트레버 스토리를 대타로 기용하면, 장타를 의식해서라도 우투수를 기용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예상한 대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는 우투수를 마운드에 올렸고, 기용 가능한 불펜투수는 단 한 명밖에 남지 않게 됐다.
만약 승부가 연장전까지 가게 된다면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는 남은 불펜투수 한 명이 버티는 동안 다시 한 번 승부를 뒤엎거나, 혹은 선발투수를 등판시켜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고 만다.
따라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출루를 한 유현이 홈을 밟지 못하게 한 채 경기를 끝내는 거였다.
반면 콜로라도 로키스 입장에서는 무조건 유현을 홈으로 불러들여야만 했다. 득점이 나오지 않으면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니까.
출루에 성공한 유현은 리드 폭을 크게 잡으며 언제든지 2루로 뛸 수 있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며 투수를 흔들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이 통한 걸까?
피치아웃이 두 번이나 나오며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배터리는 유현의 빠른 발을 의식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우타자인 트레버 스토리를 막기 위해 올라온 투수가, 트레버 스토리가 아니라 유현에게 신경이 분산되고 만 것이다.
문제는 그 와중에도 유현이 결국 도루에 성공했다는 거지만 말이다.
-1스트라이크 2볼, 유현 선수가 빠르게 스타트를 끊었습니다. 포수가 송구를 포기할 정도로 타이밍을 제대로 뺏었습니다.
-트레버 스토리 선수는 유현 선수가 도루를 하는 걸 보고 아예 스윙조차 하지 않네요.
-유현 선수가 베이스를 훔칠 수 있다고 확실하니까 저럴 수 있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유현 선수는 스코어링 포지션에 들어갔고, 콜로라도 로키스는 다시 한 번 절호의 찬스를 잡게 됐습니다.
유현이 도루에 성공하며 무사 2루 찬스를 잡은 상황, 트레버 스토리는 2스트라이크 2볼 카운트에서 타구를 외야로 날려 보냈다.
타격을 하는 순간 확신했다.
잘 맞긴 했지만 안타가 되지 못할 거라고, 실제로 우익수 정면으로 가는 타구가 나오면서 어렵지 않게 아웃카운트 하나가 올라갈 거로 보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애초에 트레버 스토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안타를 치는 게 아니라, 유현이 도루에 성공하면 3루까지 갈 수 있도록 진루타를 만드는 거였다.
안타를 칠 수 있다면 더 좋았겠지만 괜찮았다. 어쨌거나 주어진 임무는 완수했고, 다음 타석에는 작전 수행능력이 뛰어난 랜디 오스틴이 들어설 테니까 말이다.
* * *
득점력이 아쉬운 상황에서도 콜로라도 로키스는 결코 경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카일 프리랜드가 7회까지 든든히 마운드를 지켜 준 덕분에 불펜 운용에 숨통이 트인 상황이라는 것과, 1점 차 정도야 얼마든지 따라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콜로라도 로키스는 벤치는 다른 팀에서는 구사할 수 없는 작전을 통해서 결국 9회 말에 1득점을 만들어 냈다.
세상에.
어느 팀이 투수를 대타로 기용해서 출루시키고, 도루까지 성공시킨 뒤에 두 번의 외야 플라이를 통해서 홈으로 불러들이겠는가.
유현을 보유하고 있는 콜로라도 로키스이기에 가능한 기가 막힌 작전이었다.
어쨌거나 작전은 성공했고 콜로라도 로키스는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가는 데에 성공했다.
그렇게 맞이한 10회 초.
와아아아아아아!
다시 한 번 쿠어스 필드가 후끈 달아올랐다. 마운드에 오른 투수를 보고서 콜로라도 로키스 팬들이 단체로 기립해 함성을 내질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전날 시즌 28승째를 완봉승으로 수확하고, 9회 초에는 대타로 타석에서 들어서 볼넷을 얻은 뒤 도루까지 해내며 결국 팀의 동점 득점을 만들어 낸 선수였으니까.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더그아웃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유현이 마운드에 오른 걸 보고서 다들 당혹감을 금치 못하는 눈치였다.
투수 타석에서 대타로 기용되긴 했지만 마운드에 오를 거라고 예상하기는 어려웠다. 전날 완봉승을 거든 투수가 구원 등판을 할 거라고 그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유현 저 자식이 왜 마운드에 올라? 팔 갈리려고 작정한 거 아냐?”
“우리 입장에서는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어. 전날 완봉승을 한 투수의 컨디션이 정상일 리가 없잖아. 저건 로키스 벤치가 판단을 잘못한 거야.”
“유현이 마운드에서 박살 나는 걸 보고 나서야 자신들이 뭘 잘못했는지 알게 되겠지.”
당혹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전날 완봉을 한 투수가 오늘 마운드에 올라서 호투를 할 가능성이 얼마나 있을까?
이번 시즌 28승을 수확하고 유일한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한 선발투수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유현의 구원등판은 콜로라도 로키스 벤치의 자충수라고 봐야 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말이다.
중요한 건 유현이 봉식이의 축복 덕분에 수월하게 체력 관리를 한다는 것, 그리고 전날 유현이 마운드에서 기록한 투구 수가 고작 79구뿐이라는 거였다.
심지어 연습 투구도 딱 3구만 던진 채 생략했고, 그 흔한 견제조차도 하지 않고 오로지 투구에만 집중하며 힘을 아꼈다.
바로 오늘 마운드에 오르기 위해 말이다.
사실 유현은 자신이 최종전에서 마운드에 오르는 걸 바라지 않았다. 자신이 마운드에 오른다는 건 팀이 최종전에서 접전을 치른다는 뜻이니까.
물론 그렇다고 마운드에 오르는 걸 거절하거나 몸을 사릴 생각은 없었다.
전날 투구 수를 아낀 덕분에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고, 오늘 구원등판을 하면 디비전 시리즈 1차전 때까지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동료들과 함께 수립할 수 있는 대기록을 위해 등판을 하는 건 지금의 유현에게는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팡!
“스트라이크!”
유현이 던진 초구 포심 패스트볼이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는 순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벤치는 뭔가가 단단히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느끼지 못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전광판에 기록한 유현의 초구 포심 패스트볼의 구속이 97마일, 베스트 컨디션에 그리 떨어지지 않는 수준이었으니까.
타석에 선 타자는 더욱 당황스러웠다.
전날 선발 등판해서 완봉승을 기록해 놓고 수직 무브먼트가 미쳐 날뛰는 포심 패스트볼을 던지다니, 뭐 이런 괴물이 다 있단 말인가.
-유현 선수의 초구 포심 패스트볼이 97마일을 기록합니다. 공에 힘이 남아돕니다. 타자가 당황하는 게 눈에 띌 정도에요.
-전날 유현 선수는 79구 완봉승을 기록했습니다. 투구 수를 적게 기록해서 그런지 몰라도 컨디션이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입장에서는 유현 선수가 원망스러울 겁니다. 전날 완봉승을 거둔 걸로도 모자라 대타로 투입돼서 동점 득점을 올리더니, 이제는 구원 등판까지 하다니요.
-어쩌면 오늘 이 모습이, 콜로라도 로키스가 포스트시즌에서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전략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현의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최고 구속이 97마일로 1마일 떨어지긴 했지만 구위 자체는 괜찮은 편이었고, 무엇보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타자들이 위축돼 있었다.
그리고 유현은 상대 타자가 약점을 보여 줬을 때 확실하게 후벼 팔 줄 아는 투수였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세 타자 연속 헛스윙 삼진.
단 11구로 10회 초를 완벽히 틀어막은 유현이 팬들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더그아웃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은 채 동료들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아. 혹시 저 11회에도 등판해야 돼요? 다들 걱정하지 마요. 전 오늘 20회까지도 던질 수 있으니까, 새벽 3시쯤에 결승 득점을 올려도 돼요.”
“크흐흐. 이번에 끝낼 테니까 걱정하지 마.”
“좋아요. 11회에 등판하지 않는다면 와일드카드 결정전 때 다들 저희 집에 초대할게요. 바비큐 파티 하면서 어느 팀이 디비전시리즈에서 맞붙을지 구경하자고요.”
“난 매운 고기가 좋아. 쌀로 만든 그 우유 색 술도 좋고.”
“제육볶음이랑 막걸리요? 좋아요. 테이블 하나를 제육볶음과 막걸리로만 채워 놓을게요.”
“바비큐 파티가 기대되는걸?”
콜로라도 로키스 더그아웃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애초에 나쁠 이유가 없었다.
메이저리그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는 대기록에 도전하는 경기이긴 하지만, 패배하더라도 이번 시즌 콜로라도 로키스의 행보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보너스 게임이라고 봐야 한다.
득점이 나오지 않을 때도, 먼저 실점을 내줬을 때도 콜로라도 로키스 선수단은 여유로웠다.
이번 시즌을 치르며 116승을 거뒀다.
수많은 승수를 쌓으며 선수들은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는지를 깨달아 갔다.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선수단 사이에 확신처럼 심어졌다.
그리고 그들이 이기는 경기에서는 항상 유현이 존재했다. 유현이 등판하는 경기에서, 그들은 단 한 번을 제외하고 모두 이겼다.
오늘 경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타 기용과 구원 등판을 자처한 유현을 위해 동료들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팀의 시즌 117승과 유현의 시즌 29승이었다.
반면…….
연장전으로 온 데다가 유현에게 가로막혀 득점을 내지 못하게 되자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더그아웃의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남은 불펜투수는 한 명.
시즌 방어율이 4.81인 평범한 투수에게 오늘 4타수 3안타를 기록한 놀란 아레나도를 상대하게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선발투수를 끌어 써야 하나 고민됐지만, 결국 벤치의 선택은 마지막 불펜투수를 10회 말에 기용하는 거였다.
일단 기용을 해 본 뒤에 안타를 허용하면 상황을 봐서 선발투수를 끌어 쓰며 어떻게든지 물고 늘어지겠다는 계산이었지만…….
딱!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게는 투수 교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놀란 아레나도가 번개 같은 스윙으로 초구 체인지업을 받아쳐 타구를 경기장 밖으로 날려 버렸으니까.
놀란 아레나도가 타격을 하는 그 순간.
콜로라도 로키스 더그아웃에 있던 모든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뛰어나왔다. 베이스를 돈 뒤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려는 놀란 아레나도를 둘러싸고 기분 좋게 세레모니를 했다.
117승 45패.
콜로라도 로키스가 한 시즌 팀 최다승 기록을 갈아치우며 메이저리그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유현의 시즌 29승은 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