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138화 (138/155)

138화 역사에 남기 위해 (2)

무난한 마운드, 무난한 타선.

2020시즌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였다.

투타 모두 무난하다는 건 나쁠 건 없지만 좋을 것도 없는, 지구 우승에 도전하기는 힘든 그저 그런 전력이란 해석 또한 가능했다.

실제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시즌 성적은 무난하다는 말이 딱 어울렸다.

긴 연승도 긴 연패도 없었다.

꾸준하게 와일드카드를 노릴 수 있는 수준의 성적을 유지하면서 한 시즌을 끌어왔다.

그랬던 그들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메이저리그 전체 1위를 확정 짓고 한 시즌 최다승까지 노리고 있는 콜로라도 로키스와 정규 시즌 막바지에 맞붙게 된 것이다.

3연전 중 최종전을 남겨두고 1승 1패를 기록한 상황에서, 와일드카드 경쟁을 하고 있는 LA다저스와 승패가 똑같았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와일드카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최고의 플랜은 시즌 최종전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문제는 메이저리그 한 시즌 팀 최다승 신기록에 단 1승만을 남겨 둔 콜로라도 로키스 입장에서도 최종전에 임하는 각오가 남다르다는 거였다.

양 팀 모두 총력전을 선언했다.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팀의 2선발을 내보냈다. 기용 가능한 불펜투수들을 모두 대기시키며 언제든지 투입할 각오를 내비췄다.

일단 경기 초반의 분위기는 투수전이었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전형적으로 잘 풀리는 흐름으로 가지 못한 채 한 끗이 아쉬운 분위기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선발 카일 프리랜드는 호투를 해 줬다.

7회까지 단 1실점도 하지 않은 채 적절한 땅볼 유도를 통해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타선을 효율적으로 틀어막았다.

문제는 타선이었다.

7회까지 그들은 단 1점도 내지 못했다.

득점 찬스가 없었던 건 아니다. 3회부터 7회까지 매 이닝 선두타자를 출루시키며 찬스를 잡았으니까.

문제는 찬스를 잡았을 뿐 결국 득점으로는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는 선발투수가 흔들리자 4회 말 무사 만루의 실점 위기에서 과감하게 불펜을 가동하더니, 위기 때마다 신들린 투수 교체를 보여 주며 위기를 벗어났다.

이것이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강점이었다.

불펜 평균자책점은 메이저리그 전체 16위로 딱 평균 수준이지만, 반드시 잡아야 할 경기에서는 신들린 듯한 투수 교체를 통해 실점을 최소화하며 승수를 쌓아 나간 것이다.

일단 시즌 최종전 분위기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게 웃어 주는 듯한 모양새였다.

양 팀 모두 7회까지 득점을 만들어 내지 못한 건 똑같았지만, 득점 찬스가 번번이 무산된 콜로라도 로키스의 분위기가 더 가라앉을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었으니까.

그리고 이어진 8회 초.

딱!

-호오오옴런! 폴 골드슈미트의 솔런 홈런! 앞던 두 타석에서 삼진을 당하며 찬스를 무산시켰던 걸 만회합니다! 스코어는 1대0! 마침내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가 승기를 잡았습니다!

-지금 이 시간, LA다저스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게 7대3으로 밀리고 있습니다. 9회 말 공격만을 남겨 둔 시점에서 반전이 없다면 패배를 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가 타이브레이커 없이 와일드카드 결정전에 진출할 절호의 찬스를 잡았습니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불펜이 분주합니다. 기용 가능한 투수들을 모두 준비시키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점 없이 아웃카운트 6개만 잡아낸다면 와일드카드 결정전 진출이 확정됩니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입장에서는 당연한 판단입니다. 선발투수 한 명만 남겨 두고 모두 투입해서라도 승리를 쟁취하고 싶을 겁니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철벽 불펜이 무너졌다.

폴 골드슈미트의 솔로 홈런 한 방에 팽팽하던 경기의 무게추가 기울었다.

실점이 나오자마자 콜로라도 로키스의 더그아웃이 잠시 소란스러워졌다. 투수코치가 직접 한 선수에게 다가가서는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눴다.

이내 선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가면 되는 거죠?”

“부탁할게. 어떻게든지 놈들을 흔들어 줘.”

“걱정하지 마세요. 상대 팀 흔드는 건 KBO리그에서 뛸 때도 지겹도록 해봤거든요.”

2018시즌과 2019시즌.

대전 펠컨스는 유현을 이용한 불펜 시위 전략을 더러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한 유현이 불펜에서 몸을 푸는 것만으로도 상대 팀에게는 위협이 되곤 했으니까.

그리고 콜로라도 로키스는 경기가 1대0으로 불리하게 흘러가자 유현에게 불펜에서 몸을 풀도록 지시했다.

두 가지 목적이 있는 지시였다.

첫 번째 목표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타자들이 불펜에서 몸을 푸는 유현을 의식하게 만들어 타석에서 집중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 두 번째 목표는 유현의 불펜 대기를 통해 선수단의 분위기를 고무시키는 거였다.

일단 첫 번째 목표는 이뤄졌다.

결과적으로 유현이 불펜에서 몸을 풀기 시작하며 콜로라도 로키스는 8회에 추가 실점을 하지 않고 위기를 벗어났다.

다만 두 번째 목표는 이뤄지지 않았다.

8회 말에 다시 한 번 선두타자가 출루하며 득점 기회를 잡았음에도 끝끝내 득점을 만들어 내지 못한 것이다.

9회 초.

콜로라도 로키스는 여전히 유현이 불펜에서 몸을 푸는 가운데 마무리투수 오수완을 투입하는 초강수를 뒀다.

경기가 지고 있는 상황에서 오수완을 투입했다는 건, 콜로라도 로키스가 추가 실점을 하지 않는 가운데 9회 말 최소 동점을 노려보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거였다.

오수완은 9회 초를 삼자범퇴로 깔끔하게 막아낸 뒤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동시에 양 팀의 더그아웃이 분주해졌다.

남은 아웃카운트는 고작 세 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입장에서는 승리를 위해 어떻게든지 실점 없이 아웃카운트를 잡아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반면 콜로라도 로키스 입장에서는 9번부터 타순이 시작하는 상황, 대타 기용을 통해서라도 어떻게든지 득점을 쥐어짜야만 했다.

“컨디션 난조로 오늘 경기에서 빠져 있는 랜디 오스틴을 대타로 기용할 가능성이 높아. 22홈런을 기록한 루키를 출루시켜서 어떻게든지 한 점을 쥐어짜려고 하겠지.”

“트레버 스토리만 잘 막아 내면 돼. 오늘 테이블 세터의 컨디션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으니까. 굳이 컨디션이 좋은 찰리 블랙몬이나 놀란 아레나도까지 승부를 끌고 가서는 안 돼.”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는 종아리 근육통으로 인해 선발 라인업에서 빠져 있는 트레버 스토리가 대타로 기용될 거라고 봤다.

그리고 시작된 9회 말.

‘뭐야. 저 자식이 왜 타석에…….’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가 예상한 대로 콜로라도 로키스는 대타를 기용했지만, 타석에 들어선 선수는 그들이 예상한 것처럼 트레버 스토리가 아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선수였다.

심지어 타자조차 아니었다.

-콜로라도 로키스가 투수를 대타로 기용했습니다. 대타로 기용할 타자가 여럿 있고, 심지어 트레버 스토리 선수가 더그아웃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상황인데 말이죠.

-다른 선수였다면 경기를 포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할 만한 상황이지만 이 선수는 아닙니다. 콜로라도 로키스가 확실하게 득점을 만들어 내겠다는 의지를 보여 줬다고 봐도 되겠죠?

-물론입니다. 출루율이 타율보다 1할이나 높은 선구안 좋은 선수를 대타로 기용했다는 건, 반드시 출루를 해서 득점을 만들어 내고야 말겠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심지어 이 투수는 이번 시즌 38도루를 기록했을 정도로 발이 빠릅니다.

-쿠어스 필드가 들썩이고 있습니다. 콜로라도 로키스 에이스, 유현 선수가 배트를 짧게 쥔 채 타석에서 들어섭니다.

트로트 노래와 함께 타석에 들어선 건 바로 콜로라도 로키스의 에이스 유현이었다.

* * *

유현이 대타로서 타석에 들어섰을 때, 미국 현지 야구팬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갈렸다.

트레버 스토리의 몸 상태가 얼마나 안 좋으면 유현이 대타로 기용되는 걸까, 이왕 나온 거 출루에 성공해서 빠른 발을 이용해 득점을 올려줬으면 좋겠다.

반면 대한민국 야구팬들의 반응은 달랐다.

전날 유현이 인터뷰하는 뉘앙스를 통해 어떤 식으로든 최종전에 모습을 보일 거라 예상했고, 실제로 불펜 시위를 통해 유현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유현이 대타로 기용되니 대부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사실 콜로라도 로키스의 대타 기용은 그리 나쁜 선택이 아니긴 했다.

단 1점을 쥐어짜기 위한 최선은 홈런이고, 차선은 빠른 발을 지닌 타자를 출루시켜서 베이스를 훔치는 것이니까.

-와. 이게 꿈이냐 생시냐. 메이저리그에서 유현이 불펜 시위하고 대타로 기용되는 걸 보게 될 줄이야. 이거 실화냐?

-이제 10회 초에 구원 등판해서 승리투수가 되면 완벽하겠네.

-가볍게 세 타자 연속 탈삼진 예상합니다.

-세 타자 연속 유격수 앞 땅볼도 괜찮을 거 같지 않냐? 다이아몬드백스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쪽이 더 열 받을 거 같은데.

-그 전에 득점이 먼저 아니냐? 왜 다들 로키스가 동점 만들 거라고 생각하는 거임?

-심지어 1점만 뽑을 거라 생각하는 게 더 웃김.

-왜긴 왜야. 유현이니까 그렇지.

-ㅇㅇ맞음. 유현이니까 믿고 보는 거지.

-2점 이상은 안 됨. 무조건 1점만 뽑아야 함. 그래야 그림이 나오지.

팽팽한 경기에서 균형을 무너트리기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상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작전을 성공시키는 것이다.

콜로라도 로키스 입장에서는 위험하지만 효과가 확실한 도박수를 던진 거라고 봐야 했다.

그리고 그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유현은 배트를 평소보다 짧게 쥔 채 타석에 들어섰다.

‘괴롭히는 게 뭔지 제대로 보여 줄게.’

마운드에 있는 상대 투수는 최고구속 99마일에 달하는 포심 패스트볼과 폭포수 커브를 주 무기로 삼는 투 피치다.

힘 대 힘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면 최선이겠지만 유현에게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힘이 아닌 기술로 승부를 봐야 한다.

유현이 타자로서 지닌 유일한 장점은 선구안이다. 부족한 타격 스킬과 힘을 선구안을 통해 보충하는 게 타자로서의 유현이다.

그래서 유현은…….

딱! 딱! 딱! 딱! 딱!

존 안으로 들어오는 공을 모조리 걷어 내고, 존에서 빠지는 하이 패스트볼과 커브에는 배트를 휘두르지 않았다.

타자의 구위가 좋은지 유현은 타이밍을 맞추는 것조차도 급급해 보였고, 타구를 만들더라도 힘에서 밀리는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그럼에도 유현은 계속해서 커트를 하며 투수를 집요하게 괴롭혔다.

승부는 14구째가 돼서야 갈렸다.

유현이 보더라인에 걸친 포심 패스트볼을 공략했지만 구위에 밀렸고, 타구가 3루수를 향해 느리게 굴러간 것이다.

3루수가 재빨리 앞으로 내달리며 타구를 잡으려고 했지만, 불규칙 바운드가 튀면서 의도치 않게 시간이 지체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사이.

유현은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조차 하지 않고 비교적 여유롭게 1루 베이스를 밟았다.

타자로서 유현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인 빠른 발을 이용해 결국 출루에 성공한 것이다.

콜로라도 로키스 벤치가 유현을 대타로 기용하면서 가장 바라던 그림이 만들어졌다.

동시에 유현이 리드폭을 크게 잡았다.

빈틈이 보이면 당장에라도 2루 베이스를 훔칠 것처럼 말이다.

투수의 입장에서는 견제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리드폭이었고, 견제를 하는 만큼 타석에 선 타자에게 집중을 하기 어려웠다.

‘좋아. 더도 덜도 말고 일단 1점만 내자고. 연장으로 가면 무조건 우리가 이길 테니까.’

이어진 헨리 곤잘레스의 타석.

쿠어스 필드가 다시 한 번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이날 경기 내내 더그아웃에서 목청껏 응원을 하던 트레버 스토리가, 유현이 출루한 직후 대타로 기용된 것이다.

점수를 쥐어짜기 위해 콜로라도 로키스 벤치가 두 타석 연속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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