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137화 (137/155)

137화 역사에 남기 위해 (1)

유현의 빈볼 투혼 이후 상승세를 제대로 탄 콜로라도 로키스를 그 어느 팀도 막지 못했다.

간간이 패배도 하고 때론 짧은 연패도 하긴 했지만 이전과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패배를 하더라도 파이팅이 넘쳤고, 언제 졌었냐는 듯 훌훌 털고 일어나 차곡차곡 승수를 쌓아 나갔다.

결국 시즌 종료를 10경기 남겨 둔 시점.

콜로라도 로키스는 110승 42패를 기록하며 보스턴 2위인 보스턴 레드삭스의 잔여 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메이저리그 전체 1위를 확정 지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유현이 있었다.

10경기를 남겨 둔 시점에서 220이닝을 소화하며 25승 1패 211탈삼진 17사사구 방어율 0.53을 기록하며 2020시즌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높은 fWAR을 기록한 선수로 우뚝 섰다.

그뿐만 아니라 유현은 타석에서도 투수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좋은 성적을 냈다.

타율은 2할 5푼 1리에 불과했지만 출루율은 3할 4푼 3리로 좋은 선구안을 여실히 보여 줬고, 38도루로 등판한 경기에서 평균 1도루 이상을 기록하는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유현의 호투와 열정적인 주루 플레이는 콜로라도 로키스를 변화시켰다.

콜로라도 로키스 타자들은 유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비브라늄으로 무장한 우리 에이스는 타석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출루를 하면 결과와 관계없이 최선을 다해 베이스러닝을 합니다. 어떻게든 팀의 승리에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만약 우리가 베이스러닝을 소홀히 하고 타석에서 집중하지 않는다면, 부끄러워서 그를 쳐다보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노력하는 겁니다.”

쿠어스 필드의 이면에 가려져서 그렇지, 사실 콜로라도 로키스는 타격 성적이 그리 좋은 팀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꾸준히 좋은 타자를 배출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콜로라도 로키스 프랜차이즈 타자들은 대부분 홈과 원정의 타격 지표 차이가 컸고, 산에서 내려간 이후로는 대부분 좋은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한 채 커리어를 이어 나갔다.

그래서 로키스는 더욱 좋은 투수에 집착했다.

타격이야 홈에서만큼은 구장의 도움을 받아 나쁘지 않은 수준을 유지하는 게 가능했지만, 투수진의 경우는 쿠어스 필드에 특화된 선수들이 아니면 난타를 당하기 일쑤였으니까.

그러나 2020시즌만큼은 달랐다.

찰리 블랙몬-놀란 아레나도-트레버 스토리의 클린업 트리오, 루키 시즌을 화려하게 보내는 있는 헨리 곤잘레스와 랜디 오스틴, 수비형 포수에서 공격 또한 수준급으로 끌어 올린 마크 번칠, 수비 하나 믿고 기용했더니 타격에서 잠재력이 터진 이안 세비지까지, 이전만큼 홈과 원정에서의 지표 차이가 크지 않으면서도 전체적인 성적마저 좋아진 타선을 완성시킨 것이다.

거기에 투수진은 명불허전이다.

잔여 10경기를 남겨 둔 시점에서 20승 5패 방어율 1.91 181탈삼진을 기록한 카일 프리랜드가 2선발이고, 17승 7패 방어율 2.69 143탈삼진을 기록한 존 그레이가 3선발이다.

두 선수를 재치고 1선발을 차지한 유현은 메이저리그 유일의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하고 있는 선발투수이고 말이다.

불펜의 경우 리드를 잡고 있는 상황에서 8회 이후 단 한 번도 블론세이브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 말인 즉, 선발투수가 7이닝을 버텨 주고 타선이 리드를 안겨 준다면 그게 몇 점이든 반드시 지켜냈다는 뜻이다.

투타의 안정적인 조화.

투수들도 타자들도, 등판을 할 때마다 정신 나간 투혼을 보여 주며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유현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죽어라 노력했다.

유현의 투혼이 바꿔 놓은 콜로라도 로키스가 2020시즌 메이저리그 전체 1위를 확정 지은 시점에서, 언론의 관심은 메이저리그 한 시즌 최다승 기록을 갱신할지에 집중됐다.

116승.

잔여 10경기에서 6승4패를 기록하면 한 시즌 최다승 타이기록을, 7승 3패 이상을 기록하면 신기록을 수립할 수 있다.

쉽지는 않지만 이번 시즌 콜로라도 로키스의 성적과 기세를 보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잔여경기 중 4경기는 지구 5위인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3경기는 지구 4위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남은 3경기는 지구 3위인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 치른다.

LA다저스와 1경기 차이로 와일드카드를 놓고 2위 경쟁을 하고 있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가 위협적일 뿐,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는 콜로라도 로키스가 손쉽게 우위를 점할 가능성이 높다.

콜로라도 로키스 감독의 입장은 확실했다.

포스트시즌을 대비해서 무리는 하지 않겠지만 신기록에 도전할 거라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중간에 휴식이 있으니 유현이 도합 세 차례 선발 등판을 할 거라고 밝혔다.

유현이 3승을 챙기고 남은 7경기에서 4승 3패를 하는 게 목표였다.

잔여 10경기 중 첫 번째 경기.

유현이 마운드에 올라서자 쿠어스 필드의 만원 관중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2020시즌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가 마운드에 오릅니다. 그는 이번 시즌 25승을 거두는 동안 0.53의 방어율을 기록할 정도로 현대 야구 역사상 다시 나오기 힘든 완벽한 모습을 보여 줬습니다. 이 선수가 다음 시즌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는 알 수 없지만, 이번 시즌의 맹활약은 메이저리그의 역사에 남을 겁니다.

-휴식을 부여하지 않았다면 30승도 가능했을 거란 말까지 나오고 있을 만큼 완벽합니다. 실제로 유현 선수는 다른 투수들과 달리 선발 로테이션을 중간중간 건너뛰며 휴식을 취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220이닝을 소화했습니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불펜투수들이 그러더군요. 유현 선수가 등판하는 날에 휴식을 취하다 보니 다른 경기에서 더 집중할 수 있다고요.

-하하하. 완투를 밥 먹듯이 하고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거죠. 이번 시즌, 유현 선수는 26경기 중 19경기에서 완투를 했습니다. 현대 야구에서 다시 보기 힘든 미친 기록입니다.

이제는 콜로라도 로키스 팬들에게 승리의 상징이자 팀의 상징이 된 유현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마운드에 올라 투구를 시작했다.

빠각!

그리고 타자의 몸쪽으로 파고드는 커터를 던져 초구부터 배트를 박살내 버렸다.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은 타구는 유격수 트레버 스토리의 앞쪽으로 힘없이 굴러가고, 트레버 스토리가 여유롭게 1루로 송구하며 첫 번째 아웃카운트가 순식간에 올랐다.

전광판에 기록된 구속은 97마일.

와아아아아!

콜로라도 로키스 팬들이 다시 한 번 환호성을 내질렀다. 목청껏 유현의 이름을 외쳤다.

다른 팀이나 언론들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콜로라도 로키스 팬들만큼은 확신하고 있었다.

잔여 10경기 중 3경기에서 유현이 확실하게 승리를 만들어 줄 거라고 말이다.

* * *

9이닝 4피안타 1사사구 5탈삼진 1실점.

9이닝 5피안타 무사사구 8탈삼진 무실점.

9이닝 7피안타 1사사구 11탈삼진 1실점.

유현은 잔여 10경기 중 세 경기에 등판해서 모두 완투를 하며 승리투수가 됐다.

그리고 콜로라도 로키스는 잔여 10경기 중 9경기에서 6승 3패를 기록하며 일단 메이저리그 한 시즌 팀 최다승 타이기록을 달성할 수 있었다.

정규시즌 마지막 선발등판을 끝마친 유현은 팬들 앞에서 기쁨과 아쉬움이 반반 섞인 기분을 느끼며 인터뷰를 했다.

“제 시즌 기록에서 1패가 너무 아쉽습니다. 제가 그날 경기에서 팀에게 승리를 안겨 줬더라면 팬 여러분이 마지막 경기까지 마음을 졸이며 지켜볼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요.”

“28승을 기록했음에도 아쉬움이 남습니까?”

“네. 개인 성적이 아니라 팀의 승리를 책임지지 못했다는 게 아쉬운 겁니다. 개인 성적은 더없이 만족합니다. 어쩌면 현대 야구에서 다시 나올 수 없는 기록을 세우지 않았습니까.”

“0점대 방어율을 말하는 거군요.”

“네. 어쩌면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다시는 나오지 못할 대기록을 수립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정규 시즌 선발 등판을 모두 끝마친 상황에서 유현의 시즌 방어율은 0.55였다.

어쩌면 현대 야구에서 다시는 나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대기록을 세웠다. 시즌 성적에 만족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1패가 아쉽다고 한 건 메이저리그 전체 1위를 확정했음에도 시즌 최종전까지 조마조마하게 경기를 지켜볼 팬들에게 미안해서이지, 개인 성적에 대한 아쉬움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인터뷰 말미.

유현은 무덤덤하게 시즌 최종전과 관련해서 코멘트를 남겼다.

“선수단 모두 힘을 합쳐 신기록을 세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인터뷰를 본 콜로라도 로키스 팬들은 정규 시즌 선발 등판을 끝마친 유현이 더그아웃에서 동료들을 응원하며 힘을 불어넣어 주길 바랐다.

반면…….

대한민국의 야구팬들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유현 불펜에서 시위한다는 데에 한 표.

-유현 대주자로 투입돼서 도루한다는 데에 한 표.

-다들 상상력이 왜 이렇게 부족함? 투수 타석에서 대주자로 투입되고, 다음 이닝에 그대로 마운드에 오른다에 한 표.

-둘 다 하는 게 제일 그럴 듯한 듯.

-ㅇㅇ. 유현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그 자식이 불펜 시위할 때마다 이가 갈렸는데, 메이저리그 진출하고 나니까 불펜 시위하는 모습 한 번 보고 싶긴 하네. 상대 팀 멘탈 박살날 듯?

-당연히 박살나지. 0점대 방어율 선발투수가 불펜으로 투입되는데 멘탈이 남아날 리가 있나.

-근데 불펜으로 나오기 힘들지 않으려나? 오늘 선발로 완투하고 내일 불펜으로 투입되는 건 아무리 유현이라도 무리인 것 같은데.

-오늘 유현 투구 수 보고 말하삼.

-투구 수?

-78구밖에 안 던짐.

-ㅁㅊ. 안타 많이 맞아서 투구 수 많을 줄 알았는데 78구? 이거 실화냐ㅋㅋㅋㅋㅋㅋㅋㅋ.

-작정하고 맞춰 잡던데? 피안타는 많지만 병살타가 여섯 개 나와서 투구 수 관리를 잘한 거라고 봐야지 내. 생각에는 내일 불펜 투입도 고려하고 그런 거 아닐까?

대한한국의 야구팬들은 예상했다.

만약 최종전에서 승부가 팽팽하게 진행되거나 불리할 때, 유현은 대타나 대주자는 물론이거니와 불펜으로 마운드에 오르는 것 또한 서슴없이 할 거라는 걸 말이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시즌 최종전.

콜로라도 로키스에게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게도 이겨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경우 일찌감치 메이저리그 전체 1위를 확정 지었지만, 최종전에서 승리하면 한 시즌 팀 최다승 기록을 갈아치울 수 있다.

최다 연승 기록을 놓쳤던 콜로라도 로키스 입장에서는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라도 한 시즌 팀 최다승 기록에 욕심이 나는 게 당연했다.

반면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경우 LA다저스와 와일드카드 경쟁 중이며, 현재 두 팀은 나란히 시즌 최종전을 앞둔 시점에서 승패가 똑같은 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즉, 시즌 최종전에 결과에 따라 와일드카드 자리를 차지할 팀이 결정이 난다는 뜻이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입장에서 최선은 시즌 최종전에서 무조건 이기는 것이다. 그래야 LA다저스의 시즌 최종전 결과와 관계없이 최소 타이브레이커는 확보하는 것이니 말이다.

만약 패배한다면?

LA다저스가 패배하기를 바라야만 했다.

간절함으로 따지면 와일드카드 결정전이 달린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쪽이 조금 더 간절한 게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콜로라도 로키스가 경기를 느슨하게 준비한 건 아니었다.

콜로라도 로키스는 최종전에서 기용 가능한 모든 선수들을 준비시켰다. 상황에 따라 베스트 전력을 가동해 반드시 승리를 쟁취하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드러냈다.

그렇게 시작된 콜로라도 로키스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시즌 최종전.

쿠어스 필드를 가득 채운 관중들이 목청껏 응원을 하는 가운데, 경기는 치열한 투수전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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