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에이스의 품격 (4)
빈볼이 나온 순간.
콜로라도 로키스 코칭스태프는 유현을 교체하기로 마음먹었다. 호투도 좋지만 일단은 유현을 병원으로 보내 정밀검사를 받게 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수 보호를 위해 당연한 해야 할 행동이었다.
한편으로는 빈볼을 던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게 보복구를 던질 준비 또한 했고 말이다.
하지만.
벤치의 계획은 유현의 만류에 의해서 무산되고 말았다. 유현이 끝끝내 1루까지 걸어 나가더니, 비교적 멀쩡한 상태로 마운드에 오르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이다.
유현은 콜로라도 로키스의 에이스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감독은 선수들의 의사를 대체적으로 존중해 주는 스타일이고, 특히나 에이스라면 볼배합부터 시작해 마운드에서 내려오는 시점까지 대부분 원하는 대로 해 주려고 노력했다.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겉으로 봤을 때 유현의 몸 상태는 빈볼을 맞았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멀쩡했고, 선수 본인이 멀쩡하다고 주장하니 지금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자고 하기에도 뭐했다.
그래서 결국 6회 초 등판을 허용해 줬다.
그 대신 한 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만에 하나 조금이라도 이상 증세가 보일 경우 곧장 교체할 것이고, 그 즉시 병원으로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말이다.
이에 유현은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 멀쩡해요.”
호언장담한 것과 달리 유현의 6회 초 피칭은 위태로워 보였다. 계속해서 빠지는 공을 던지며 카운트가 불리해졌고, 맞춰 잡으며 어렵사리 위기를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다.
제구가 안 되는 건 물론이거니와 평균 구속마저 2마일 정도 떨어진 상황, 몸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게 벤치의 판단이었다.
따라서 콜로라도 로키스 벤치는 유현의 의지와 상관없이 선수 보호를 위해서라도 교체를 할 생각이었다.
불펜을 가동시키려는 찰나.
유현과 대화를 하고 마운드에서 내려온 마크 번칠의 입가에 미소가 맺혀 있는 걸 확인한 더그아웃에 혼란이 찾아왔다.
정말로 유현의 상태가 좋지 않은 거라면 마크 번칠이 미소를 지을 리가 없었다. 아니, 짧은 경력에 비해 포수로서 갖출 건 다 갖췄고 심리전마저 뛰어난 마크 번칠이라면 유현의 상태가 안 좋은 걸 숨기려고 웃었을 가능성도 존재했다.
페이크인 걸까?
아니면 정말로 유현에게는 문제가 없는 걸까?
6회 초가 끝난 뒤, 마크 번칠이 더그아웃에 들어오고 나서야 코칭스태프는 어떻게 된 일인지 전후사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동시에 투수코치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세상에.
빈볼을 맞고 멀쩡하게 투구하는 것도 놀라운데, 보복구 대신에 상대 타자들을 괴롭히려고 일부러 위협구를 던지는 거라니?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나 싶었다.
물론 그 미친놈이 상대 팀이 아니라 같은 팀이라서 좋았다. 괜히 팬들이 유현만 있으면 월드 시리즈 우승이 가능하다고 벌써부터 설레발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느꼈다.
유현.
그는 야구에 미친 괴물이었다.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빈볼 맞은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말이 돼?”
“머리에 맞아 놓고 멀쩡한 거 보면, 현은 진짜 사람이 아니라 외계인일지도 몰라.”
“정밀검사 받는 김에 외계인 검사도 받아 보는 건 어때? CIA에 연락해 놓을 테니까.”
“저 멀쩡하거든요?”
“농담하는 거 맞지?”
“현이 요즘 유머가 늘었다니까.”
“내가 최근에 들은 농담 중에 제일 재밌었어. 감독님이 우린 아직 약팀이라고 인터뷰한 거 다음으로 웃겼다니까. 정말이야.”
“젠장. 다들 절 뭐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두개골이 비브라늄으로 만들어진 야구에 미친 괴물?”
유현이 빈볼을 맞았을 때만 하더라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선수들을 모두 마운드 앞에서 머리만 내놓고 묻어 버릴 것만 같은 기세였던 콜로라도 로키스 선수단은, 유현이 완전히 멀쩡하다는 걸 확인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분위기가 좋아졌다.
그 와중에도 대부분의 표정은 심각했다.
보복구 대신 위협구로 갚아 주겠다는 유현의 뜻에 따라, 유현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처럼 포장을 하기 위해서였다.
계획은 잘 먹혀들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유현의 컨디션이 안 좋다는 판단 아래 투심 패스트볼이나 커터에도 적극적으로 스윙을 했고, 덕분에 유현은 출루를 허용하긴 했지만 그리 어렵지 않게 8회까지 이닝을 틀어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9회 초.
유현이 언제 그랬냐는 듯 98마일짜리 포심 패스트볼을 찔러 넣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더그아웃이 술렁였다. 타석에 선 타자의 얼굴에는 대놓고 당혹감이 묻어났다.
8회 초까지만 하더라도 최고 구속이 96마일에 머물더니, 갑자기 98마일을 기록했다. 타자의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운 게 당연했다.
혹시나 전광판이 잘못된 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지만 아니었다.
유현이 초구에 이어 같은 코스로 던진 포심 패스트볼 또한 98마일을 기록했으니까.
‘뭐야. 갑자기 왜 98마일을 던져? 혹시 8회까지는 일부러…….’
8회까지 일부러 컨디션이 안 좋은 척 연기를 하며 타자들의 적극적인 스윙을 유도했을 수도 있고, 9회가 돼서야 안 좋았던 컨디션이 원래대로 돌아왔을 수도 있다.
전자건 후자건 한 가지는 확실했다.
컨디션이 좋은 지금의 유현을 상대로 4점차를 극복하고 역전을 꿈꾸는 건 불가능했다.
위협구에 겁을 먹은 상황에서도 어떻게든지 유현을 공략하려고 했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대한민국 중계진은 지난 시즌, 유현이 서울 나인테일즈의 한 시즌을 통째로 박살 냈던 경기를 떠올렸다.
-지금 이 상황,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요?
-기분 탓이 아닙니다. 저도 지난해에 이런 비슷한 상황을 본 것 같거든요. 서울 나인테일즈를 상대로 위협구를 던지던 유현 선수가 어느 순간 귀신같이 안정감을 되찾았고,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났었죠.
-당시에 제라드 캠프 선수의 부상에 화가 난 유현 선수가 고의로 위협구를 던졌다는 이야기가 더러 나왔습니다만, 결국 결론이 나지 않았죠. 그리고 오늘 유현 선수는 6회부터 8회까지 시도 때도 없이 위협구를 던졌습니다. 빈볼이 아니었다면 진즉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났을 정도죠. 이 상황, 유현 선수가 의도했다고 보십니까?
-의도한 건지 아닌지는 유현 선수만이 알고 있겠죠.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6회부터 8회까지의 위협구를 고의라 판단하고 벤치 클리어링을 일으킨다면, 그들은 소중한 선수를 부상으로 잃게 될 거라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유현이 9회에 98마일을 던지고 안정적으로 제구하는 걸 보면서도 벤치 클리어링을 일으키지 않았다.
애초에 빈볼을 던진 건 그들이다.
유현이 멀쩡해 보여서 그렇지 선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는 최악의 행위를 했고, 유현의 상태와 별개로 그들의 행동은 지탄받을 것이다.
그 와중에 벤치 클리어링을 일으킨다면?
감당할 수 없는 비난이 쏟아질 게 분명했다. 때문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위협구의 진실 문제와 별개로 몸을 사렸다.
그리고 유현은 그 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기껏 축복을 받아 몸을 바위처럼 단단하게 만들어 놓았는데 쓸 일이 없었다.
‘쩝…… 아쉽네. 벤치 클리어링 일으키면 두세 놈 정도는 일부러 시비를 걸어서 몇 군데 부러트려 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얼마나 좋아. 난 그냥 방어만 해도 자기들이 알아서 다치는 거잖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알지 못했다.
몸을 사리기로 한 그들의 선택이 주전 선수 몇 명의 부상을 막았다는 걸 말이다.
* * *
존 치프먼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맞췄을 때, 유현은 메이저리그에 헤드샷으로 인한 퇴장 규정이 없는 게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헤드샷 관련 퇴장 규정이 있었다면 원하는 대로 분위기를 끌고 가지 못했을 테니까.
유현이 헤드샷 이후에도 투혼을 보여 준 건 포스트시즌에서 만날 가능성이 높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기를 제압해 놓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연패에 빠져 있는 동료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콜로라도 로키스는 강팀이다.
지난해까지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분명 월드 시리즈 우승을 노려봐도 될 정도로 강팀이 된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콜로라도 로키스 선수단의 상당수에게는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었다. 루키 시즌을 보내고 있는 선수와 잠재력이 폭발한 지 얼마 안 된 선수들이 있다 보니 자신감이 뒤떨어진다.
분위기가 좋을 때야 모두 들떠 있고 어떤 팀을 만나도 다 이길 것처럼 굴지만, 분위기가 가라앉으면 싱글A 팀을 데려다 놔도 영봉패를 당할 것처럼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 준다.
지금이야 괜찮다.
문제는 포스트시즌이다.
포스트시즌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 주면 곧 탈락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메이저리그 전체 1위로 시즌을 끝마친 팀을 중에 월드 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지 못한 팀이 많다는 걸 생각해 보면, 콜로라도 로키스 또한 이번 시즌 월드 시리즈 우승을 확답할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월드 시리즈 우승에 한 발자국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팀이 전력이 120퍼센트 활용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유현이 내린 해답은 단순했다.
분위기가 가라앉는 게 문제라면, 가라앉을 일이 없도록 만들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분위기를 살리는 건 유현이 전문이었다.
마운드 위에서는 항상 최고의 피칭을 보여 주고, 일단 출루만 했다 하면 상대 투수의 멘탈을 박살내 버리는 퍼포먼스를 보여 준다. 에이스의 맹활약은 곧 팀의 긍정적인 분위기로 이어지곤 했다.
거기에 유현이 헤드샷을 맞은 후에도 마운드 위에서 호투를 보여 주자, 콜로라도 로키스 더그아웃의 분위기는 고무되는 걸 넘어 툭 건드리면 폭발할 지경에 이르렀다.
유현의 투혼이 4연패로 인해 가라앉아 있던 팀의 분위기를 180도 바꿔 놓은 것이다.
결국 이날 경기는 콜로라도 로키스가 0대4로 승리했고 유현은 완봉승을 거뒀다. 동시에 유현을 향해서 기자들은 온갖 질문을 쏟아 냈다.
가장 많이 나온 질문은 빈볼을 맞았는데 괜찮냐, 병원 안 가도 되냐는 거였다.
이에 유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제 머리가 튼튼한 건지 존 치프먼의 공이 솜털처럼 가벼운 건지 몰라도 1루로 걸어 나간 이후에는 생각보다 멀쩡했습니다. 계속해서 조금 어지럽긴 하더군요. 아. 9회에 마운드에 오르니 어지럼증이 사라지긴 했습니다. 정밀검사를 받아 봐야 알겠지만 멀쩡한 것 같습니다.”
“빈볼을 맞았는데도 완봉승을 하는 투혼을 보여 줬지만, 6회부터 8회까지 위협구가 계속해서 나왔습니다. 일각에서는 9회 초의 호투를 보고 위협구를 고의로 던진 게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 있습니다. 진실은 무엇입니까?”
“어지럼증이 살짝 남아 있어서 제구가 흔들린 게 진실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9회가 돼서야 어지럼증이 사라졌고요. 95마일짜리 패스트볼에 머리를 맞았는데 멀쩡할 리가 없잖습니까.”
“어지럼증 정도면 멀쩡한 거 아닙니까?”
“하하하. 그렇게 해석된다면 멀쩡한 게 맞습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감독이 경기 후 공개적으로 빈볼에 대해 사과를 했습니다. 사과를 받아들이실 겁니까?”
“사과와 별개로 사무국에서 빈볼에 대한 징계가 있기를 바랍니다. 고의였던 아니건 빈볼은 선수 생명을 중단시킬 수도 있는 위험한 행위입니다.”
“오늘 경기에서 팬들이 유독 유현 선수의 이름을 목청껏 외쳐줬습니다. 마지막으로 팬들을 위해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인터뷰 끝나고 바로 병원 가서 정밀검진 받고 SNS에 결과 올리겠습니다.”
정밀검사 결과.
유현에게는 그 흔한 뇌진탕 증상조차 발견되지 않았고, 빈볼을 맞았다는 게 거짓이라 생각될 정도로 몸 상태가 멀쩡하다는 게 판명 났다.
심지어 빈볼을 맞은 자리에 타박상조차 없을 정도로 최고의 몸 상태였다.
이에 유현은 SNS에 환자복을 입은 사진과 검사 결과를 올리며 코멘트를 덧붙였다.
-두개골이 비브라늄이라 95마일짜리 패스트볼로는 흠집도 안 나니 걱정 안 해도 된다. 쓰러지더라도 월드 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뒤에 쓰러질 테니 열심히 응원해 달라.
그리고 다음 날.
유현의 투혼이 각성의 계기가 된 건지 모르겠지만, 콜로라도 로키스는 타선의 대폭발을 앞세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1대13으로 꺾었다.
3차전은 더 심했다.
무려 2대22로 마운드가 완전히 박살났다.
결국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상대 팀 에이스 투수에게 빈볼을 던졌다는 비난에 시달린 걸로도 모자라, 두 경기 연속 두 자릿수 실점으로 3연패를 기록하며 온갖 조롱을 당했다.
그리고 지구 2위 시카고 컵스에게 2경기 차로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