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에이스의 품격 (3)
존 치프먼은 무사 1․2루의 위기에서 찰리 블랙몬과 놀란 아레나도에게 연속으로 외야 플라이를 허용하며 1실점을 하고 말았다.
트레버 스토리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2사 3루의 위기를 벗어나긴 했지만, 이미 4실점을 한 상황에서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유현이 거슬렸다.
유현만 아니었다면, 저놈이 타석에서 기분 나쁘게 하지만 않았더라면 더 좋은 투구를 할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이 남았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마운드에 있는 동안 다시 한 번 유현이 타석에 들어선다면 적절한 대가를 치르게 해줄 생각을 굳혔다.
이닝이 끝난 뒤.
더그아웃으로 들어온 유현의 머리 위로 올라타며 봉식이가 말을 걸었다.
-너 몸 사려야 할 거 같은데?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상대 팀 투수가 널 쳐다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아서 그래. 다음 타석에서 무조건 몸쪽으로 하나 날아올걸? 재수 없으면 날아오는 방향이 머리일 수도 있잖아.
‘거 도루 조금 했다고 너무하네.’
-너 같으면 상대 투수가 연속 도루하고 번트 대서 출루하는데 안 거슬리겠어?
‘거슬리지. 그래도 맞추는 건 좀 아니지 않냐.’
-기분 나쁘다는데 어쩌겠어? 만약 진짜로 존 치프먼이 널 맞춘다면 어떻게 할 거야?
‘저놈의 머리통을 날려 버릴 수는 없겠지만, 어쨌거나 복수를 해줘야지.’
-혹시 내가 생각하는 그거?
‘응. 네가 생각하는 그거. 그래서 말인데, 도와주면 안 될까?’
-참교육을 시키겠다면야 얼마든지 도와주지.
유현과 봉식이가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KBO리그에서 활동할 당시 유현에게 시비를 거는 선수들이 몇몇 있었고, 유현을 흔들기 위해 저열한 수법을 쓰는 팀마저 존재했다.
그리고 유현은 그중 한 구단을 상대로 제대로 된 참교육을 보여 줬었다.
그들이라고 어찌 예상했겠는가.
유현에게 시비를 건 게, 심사를 뒤틀리게 한 것이 결과적으로 한 시즌을 통째로 날려 버리는 계기가 될 거라고 말이다.
뭐…….
단장 교체 및 코치진 대거 물갈이라는 강수를 뒀음에도 2020시즌에 9위에서 머물고 있는 거 보면 유현이 아니었더라도 2019시즌에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겠지만, 중요한 건 유현과의 충돌을 계기로 한 팀이 망가졌다는 거였다.
만약 존 치프먼이 거슬린다는 이유로 정말로 자신을 맞춘다면…….
유현은 KBO리그의 팀들이 어째서 자신을 무서워했는지, 왜 자신의 앞에서 지레 겁을 먹은 채 지고 들어갔는지를 보여 줄 생각이었다.
* * *
5회 말.
유현이 세 번째 타석에 들어선 그 순간, 존 치프먼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맞추더라도 고의성이 드러나면 안 된다. 중요한 건 티가 고의인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는 거다.
스코어는 0대4.
오늘 유현의 피칭을 보면 타선이 4득점을 만들어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차라리 자신이 비난받더라도 유현을 맞춰서 흐름을 끊어 주는 게 나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킨 존 치프먼이 카운트를 2스트라이크 3볼로 만들었다.
6구째.
존 치프몬은 몸쪽에 붙이는 척하면서 유현을 향해 던졌다. 공이 살짝 빠진 척 연기를 하기 위해 노력했다.
원하는 대로 공은 유현을 향해 날아갔다.
다만 그가 원했던 팔이나 다리 쪽이 아닌, 머리를 향해 날아간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빡!
스윙을 하려던 유현이 뒤늦게 몸을 움직였지만 공은 그의 머리를 직격했다.
커다란 소리가 나며 유현이 쓰러졌다.
‘Damn it! 그걸 왜 맞고 난리야! 피하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잖아!’
존 치프먼이 유현을 맞추려고 한 건 맞지만, 머리를 맞출 생각은 없었다. 그냥 적당히 맞춰서 다시는 타석에서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못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문제는 정말로 제구가 살짝 안 되면서 공이 머리로 향했고, 유현이 그 공에 머리를 제대로 통타당했다는 거였다.
뭔가에 홀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마치 유현의 머리가 공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존 치프먼이 의도한 것과 전혀 다른 궤적을 그렸다.
유현은 공에 맞자마자 그대로 쓰러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더그아웃이 유현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고, 유현은 고통을 호소하며 좀처럼 몸을 가누질 못했다.
더그아웃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스칼렛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봉식이를 바라보았다.
-봉식 씨. 제대로 축복해 준 거 맞아요? 유현 씨가 고통스러워하고 있잖아요!
-축복은 녀석이 원하는 대로 완벽하게 됐어요.
-근데 유현 씨가 왜 저래요?
-저 자식 지금 연기하고 있는 거예요.
-……연기요?
-네. 저래야지 마운드 위에서 제구가 흔들린 척을 해도 문제가 없으니까. 아. 참고로 머리를 맞은 것도 녀석이 원한 거예요. 제가 몸쪽으로 오는 공을 딱 1번 머리에 맞게 해줬거든요.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요?
-이유? 당연히 있죠.
봉식이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유현의 피칭 스타일을 정립시킨 게 봉식이다. 유현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정도야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시비를 걸면 열 배로 되갚아 줘야 하고, 포스트시즌에서 만날 가능성이 있는 팀은 확실하게 기를 죽여 놔야 하는 법이거든요. 아. 공교롭게도 카디널스는 두 가지 모두 해당되네요. 카디널스는 오늘 저 녀석에게 시비를 건 걸 앞으로 두고두고 후회하게 될 거예요.
* * *
투수의 패스트볼은 흉기다.
최고구속 158마일에 평균 분당회전수 2557의 포심 패스트볼이라면 타자의 입장에서는 몸쪽으로 붙었을 때 위축되지 않을 수가 없다.
실제로 유현이 몸쪽 승부를 즐겨하는 것 또한 타자들이 자신의 포심 패스트볼에 위축된다는 걸 알고 하는 거였다.
하지만…….
만약 이 흉기가 제구가 되지 않는다면?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이후 유현은 단 한 명의 타자도 맞추지 않았고, 메이저리그 선발투수들 중 가장 적은 사사구를 허용하며 안정적인 제구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타자들은 유현이 몸쪽으로 포심 패스트볼을 던질 때마다 맞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을 느끼곤 했다.
제구가 되지 않는다면 공포감은 더욱 극심해질 것이고, 이것이 원하는 거였다.
서울 나인테일즈가 의도적으로 제라드 캠프를 맞춰서 부상을 입혔을 때, 유현은 일부러 제구가 안 되는 척 서울 나인테일즈 타자들을 괴롭혔다.
이번에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유현이 존 치프먼이 던지 공에 머리를 맞았다는 것과, 자신이 원해서 머리를 맞았다는 것 정도였다.
-위대하신 땅의 정령님이 당신을 축복합니다.
-오늘 쿠어스 필드에서 야구가 끝나기 전까지 당신의 몸에 가해지는 모든 물리적인 데미지가 무효화됩니다.
-자석 효과가 발동됩니다. 타석에 서있을 때, 상대 투수가 맞출 의도를 가지고 투구할 경우 무조건 머리에 맞습니다.
-당신의 몸이 바위처럼 단단해집니다. 18대1로 싸워도 맞기만 하면 모두 이길 수 있습니다.
봉식이는 유현에게 세 가지 축복을 줬다.
데미지 무효화, 자석 효과, 그리고 몸이 바위처럼 단단해지는 것.
자석 효과를 통해 존 치프먼의 공이 머리에 맞도록 유도했고, 데미지 무효화를 통해서 눈곱만큼의 부상도 입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픈 척 연기를 했다. 한참 동안 타석에서 일어나지 못하다가 부축을 받은 채 어렵사리 1루로 이동했다.
교체를 하려는 코칭스태프에게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틈틈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래야 겁도 없이 자신을 맞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게 복수해 줄 수 있으니까.
존 치프먼 혼자서 계획한 것이건 벤치의 허락이 있었건 중요하지 않았다. 존 치프먼이 유현을 맞춘 건 명백한 사실이니까.
유현이 몸에 맞는 볼로 출루를 했음에도 득점으로 이어지지 않은 채 6회가 시작됐다.
그리고 유현은 초구와 2구를 모두 타자의 몸쪽으로 빠지게 던졌다. 타자가 피할 수는 있지만 위협을 느낄 정도로 말이다.
그러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직전 이닝에서 머리에 공을 맞은 것 때문에 제구가 안 되는 척, 의도하고 몸쪽으로 빠진 게 아니라는 걸 어필하는 척을 했다.
그러면서도 아웃카운트는 잘 잡아냈다.
유격수 앞 땅볼 2루수 라인드라이브로 아웃카운트 두 개를 처리한 상황에서, 유현은 몸쪽으로 빠지는 공을 세 개 연속으로 던지며 3볼로 카운트가 몰리고 말았다.
항상 안정적인 투구를 보여주는 유현이기에 완전히 빠지는 볼을 세 개 연속으로 던지는 걸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었다.
결국 포수 마크 번칠이 마운드를 방문했다.
“괜찮아요? 지금이라도 벤치에 불펜 가동하라고 사인 보낼까요?”
“괜찮아. 일부러 그러는 거야.”
“일부러 그러는 거라고요?”
“어. 카디널스 새끼들 엿 먹이려고 그러는 거고, 제구에는 아무 문제없어. 머리에 맞았다는 이유로 바로 보복구를 던지면 싸우자는 거밖에 더 되겠어? 그것보단 언제 맞을지 모른다는 인상을 받게 하는 게 훨씬 더 무서울 거 아냐.”
순간 마크 번칠은 할 말을 잃었다.
보복구를 던지는 게 아니라 반복적으로 위협구를 던지는 걸로 복수를 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괜찮은 방법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제구에 자신이 있는 유현이라면, 몸쪽으로 빠지게 위협구를 던지면서도 타자가 맞지 않는 내에서 괴롭혀 줄 수 있을 테니까.
“카디널스 놈들, 차라리 벤치 클리어링 일어나는 걸 더 바랄 수도 있겠는데요? 그럼 보복구는 없는 거예요?”
“어. 8회까지만 괴롭히고 9회는 깔끔하게 막아서 자신들이 엿 먹었다는 걸 가르쳐주자고.”
“흐흐흐. 알겠습니다.”
유현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쉽게 용서하고 넘어가 줄 생각이 없었다.
봉식이의 도움을 받은 유현이니까 멀쩡한 거지, 다른 투수였다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위협적인 공에 맞았다.
부위가 중요한 게 아니다.
투수가 별 것도 아닌 이유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같은 투수를 맞추려 했다는 게 중요했다.
존 치프먼에게 복수를 해준다?
그럴 수는 없었다.
존 치프먼의 타석에서 대타가 나오며 그의 역할은 5회 말까지라는 게 확실해졌고, 적어도 오늘 경기에서 직접적으로 복수할 기회는 없다.
설사 다음에 만나서 복수할 기회를 얻는다고 해도 투수를 맞춘다는 건 싸우자는 말밖에 안 된다.
실제로 콜로라도 로키스의 더그아웃은 유현이 몸에 맞았을 때 격양됐고, 몇몇 선수들은 당장에라도 그라운드로 뛰어 나올 기색이었다.
유현이 너무 고통스러워했고, 어느 정도 상황이 수습된 이후에는 괜찮다는 제스처를 보내서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나지 않은 것뿐이다.
자신이야 봉식이 덕분에 다칠 일은 없다지만 다른 선수들은 아니다. 메이저리그 전체 1위로 순항을 하고 있는데 괜한 벤치 클리어링으로 누군가가 부상을 입는 걸 바라지 않았다.
복수는 위협구를 던지는 걸로 충분했다.
6회부터.
유현은 계속해서 제구가 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고, 땅볼 유도를 통해 어렵사리 이닝을 틀어막긴 했지만 제구가 확연하게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고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선수들은 확신했다. 머리에 공을 맞은 것 때문에 유현의 컨디션에 문제가 생겼다고 말이다.
실제로 빈볼 이후 포심 패스트볼의 최고 구속도 98마일에서 96마일로 줄어 있었고 말이다.
지금이라면 공략할 수 있다.
미안한 마음도 있고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흔들리는 투수를 눈앞에 놔두고 공략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타자들은 카운트가 유리한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스윙을 했고, 그 과정에서도 7회와 8회에 각각 안타를 만들어 냈다.
다만 아쉽게도 유현의 거듭된 땅볼 유도로 인해 득점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유현이 흔들리는 것만큼은 확신했다.
9회 초.
또 다시 유현이 올라오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타자들은 이번 이닝에야말로 득점을 올릴 수 있다고, 유현을 무너트리고 빅 이닝을 한 번 만들어 보자고 다짐했다.
팡!
“스트라이크!”
유현이 초구로 몸쪽 보더라인에 완벽하게 걸친 98마일짜리 포심 패스트볼을 던지기 전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