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134화 (134/155)

134화 에이스의 품격 (2)

-Wow! 유현 선수가 카디널스의 배터리를 완전히 흔들어 놓습니다! 예술에 가까운 도루 실력을 보여 주며 자신이 어째서 오늘 1번 타자로 배치됐는지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만약 유현 선수가 타자로서 풀타임을 소화하면 100도루는 거뜬할 거란 이야기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죠.

-맞습니다. 유현 선수의 도루 능력은 투수라고 얕보다가 정신을 차려 보면 3루를 뺏길 정도로 위협적입니다. 투수가 아니라 최정상급의 대주자라고 보는 게 맞습니다.

-카디널스 입장에서는 경기가 꼬일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같은 투수가 무사 볼넷으로 출루하고 연속 도루로 무사 3루를 만들어 버리면, 마운드에 있는 투수의 멘탈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더 큰 문제는 오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선발투수 존 치프먼 선수가 방어율 2.71을 기록하고 있긴 하지만, 감정 기복에 따라 성적이 극과 극으로 차이난다는 겁니다. 마운드 위에서 흥분했을 때, 그는 리그 평균 수준의 선발투수들보다도 못한 모습을 보여 주곤 했습니다.

멘탈이 약한 투수를 공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나지 않는 수준에서 적절하게 자극을 해주는 것이다.

콜로라도 로키스는 그 점을 제대로 노려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공략하기로 했다.

일단 투수가 선두타자로 나온 것부터가 상대 투구를 자극하기에 더없이 좋다.

심지어 그 투수가 이번 시즌에 타율 2할 5푼, 출루율 3할 5푼에 도루를 31개나 기록하고 있다면 말할 것도 없다.

일단 타석에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거슬린다.

거기에 번트 모션을 통한 카운트의 우위, 4연속 파울에 이은 볼넷으로 출루, 연속 도루로 3루 베이스를 훔치기까지 한다면?

멘탈이 박살나는 건 기정사실이다.

유현이 3루 베이스를 훔친 그 순간, 마운드 위에 있는 투수의 얼굴이 잔뜩 달아올랐다. 같은 투수에게 휘둘려 무사 3루를 허용한 게 적잖게 열 받은 듯한 눈치였다.

그렇다고 포수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1회 말 투구를 주도한 건 빌어먹을 햇병아리 포수를 믿지 않고 지겹도록 고개를 내저으며 직접 사인을 낸 자신이었으니까.

결국 투수코치가 마운드에 올랐다.

“진정해. 흥분하면 놈들의 전략에 말려들 뿐이야. 유현 저 자식이 홈에 들어온다 하더라도 고작 1실점이야. 타선을 믿고 과감하게 승부해. 네가 1~2점 내주더라도 따라잡아 줄 수 있으니까.”

“젠장. 알겠어요. 침착하게 투구할게요.”

“절대 흥분하지 마. 놈들이 원하는 건 네가 흥분해서 오늘 경기를 망치는 거야. 조급한 건 우리가 아니라 로키스 놈들이란 걸 잊지 말고.”

투수코치의 말이 맞았다.

아무리 유현이 등판했다 하더라도 조급한 자신이 아니라 콜로라도 로키스다. 자신들은 연승, 상대는 연패를 하고 있는 상황이니까.

침착하게만 경기를 풀어 나간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황이다.

‘후우. 릴렉스하자. 그래. 흥분하지만 않으면 돼. 차분하게 내 피칭을 할 수 있다면 로키스라고 해서 이기지 못할 건 없어.’

투수가 애써 화를 가라앉았다.

지금은 화를 내기보단 유현이 홈으로 들어오는 걸 가정하고서, 1실점 외엔 추가 실점을 막는 데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타선의 침체로 4연패를 한 팀에게 굳이 분위기 반전의 기회를 줄 필요는 없었다.

딱!

멘탈을 다잡은 투수 존 치프먼이 2번 타자 랜드 오스틴에게 3구째에 커터를 찔러 넣어 유격수 앞 땅볼을 유도하는 데에 성공했다.

빠르게 날아오는 타구를 잡아낸 찰나의 순간.

유격수는 고민에 빠졌다.

타구를 확인하자마자 홈 베이스를 향해 전력질주하고 있는 유현과, 마찬가지로 1루를 향해 전력질주하고 있는 랜디 오스틴.

둘 중 누구를 잡아야 하는 걸까?

유현의 경우 타이밍이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잡아내기만 한다면 실점을 막을 수 있고, 랜디 오스틴의 경우 1실점을 하더라도 확실하게 아웃카운트 하나를 잡아낼 수 있다.

유격수는 유현을 선택했다.

타이밍이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송구만 제대로 한다면 홈에서 유현을 잡아낼 수 있다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유격수가 강한 어깨를 자랑하며 포수의 미트로 정확하게 송구를 했다. 포수는 송구를 받자마자 자연스럽게 팔을 내리며 유현을 태그했다.

태그 과정 자체가 매우 자연스러웠고, 유현이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통해 홈 베이스를 터치하는 것과 태그가 거의 비슷한 타이밍에 이뤄졌다.

그리고 결과는…….

“세이프!”

세이프였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벤치에서는 곧장 비디오 판독을 신청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유현의 손이 홈 베이스에 닿는 게 태그보다 미세하게나마 빠르다는 게 확인됐다.

“Damn it!”

흥분한 투수가 욕지기를 내뱉으며 유격수를 향해 뭐라고 한참 동안 말을 해댔다.

만약 유격수가 찰나의 순간 망설이지 않았더라면, 지체하지 않고 곧장 홈으로 송구했다면 유현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가정일 뿐이다.

결과만 놓고 봤을 때 유격수의 판단은 콜로라도 로키스에게 1점을 안겨 준 걸로도 모자라 랜디 오스틴을 1루 주자로 만들어 버렸다.

발 빠른 주자인 랜디 오스틴은 풀카운트 상황에서 찰리 블랙몬이 헛스윙을 하는 타이밍에 가뿐하게 2루 베이스를 밟았다.

힘들긴 하지만 아웃카운트 하나를 잡아냈다.

어쨌거나 아직까지는 1실점일 뿐이다. 랜디 오스틴이 홈 베이스를 밟지 못하게 한다면 1실점으로 나름 선방한 거라고 봐야 한다.

놀란 아레나도만 넘을 수 있다면 말이다.

8월까지 47홈런을 기록하며 내셔널리그 홈런왕을 정조준하고 있는 이 괴물은, 팀이 4연패를 하는 기간 동안에도 17타수 6안타로 제법 괜찮은 활약을 보여 줬다.

다만 안타 중에서 장타가 하나도 없다 보니 그 역시 슬럼프를 겪는 게 아닌가 하는 시선 또한 존재하는 게 사실이었다.

놀란 아레나도를 잡는다.

그를 잡아내고 위기를 벗어난 다음, 팀이 유현을 상대로 득점을 만들어 주기를 기다린다.

계획은 그럴듯했지만…….

딱!

-홈오오오옴런! 놀란 아레나도 선수가 이번 시즌 48호 홈런을 기록합니다! 몸쪽으로 파고드는 커터를 제대로 받아쳤습니다!

-방금 전 공은 제구가 완벽했습니다. 그걸 받아쳐서 홈런을 만든 건, 그냥 놀란 아레나도 선수의 컨디션이 좋은 거라고 봐야 합니다. 존 치프먼 선수의 멘탈이 크게 흔들리겠는데요?

-반면 콜로라도 로키스는 이 홈런 한 방으로 기세가 살아날 것 같습니다. 유현 선수가 선발 등판했다는 걸 감안할 때 1회 말부터 3점을 만들어냈다는 건 의미가 큽니다.

-추가 득점이 없어도 이길 확률이 높지만, 관중석을 꽉 채운 팬들 입장에서는 연패를 끊는 김에 타선이 살아나기를 바라겠죠.

하필이면 놀란 아레나도에게 던진 초구 커터가 홈런으로 연결되고 말았다.

분명 제구가 잘 된 공이었다. 몸쪽으로 잘 파고들었는데 놀란 아레나도가 잘 받아쳤다.

이후 아웃 아웃카운트 두 개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추가 실점을 하진 않았지만, 1회부터 3실점을 한데다가 투구 수도 32개나 됐다.

쾅!

더그아웃으로 들어온 존 치프먼은 잔뜩 얼굴을 붉힌 채 끼고 있던 글러브를 내던지고 쓰레기통을 걷어찼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화가 나서 포수의 멱살이라도 잡을 것만 같았다.

포수가 잘못이 없다는 건 알고 있다.

투구를 주도한 건 자신이었고 포수는 묵묵히 공을 받아줬을 뿐이다. 도루 견제가 아쉽긴 했지만 실점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건 아니었다.

가장 결정적이었던 건 자신이 놀란 아레나도에게 홈런을 맞은 거였고, 1회부터 3실점이나 했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었다.

“Fucking rockies!”

존 치프먼은 한참 동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채 욕설을 내뱉었다. 투수코치가 다가와서 멘탈을 다잡아 주려고 노력했지만 쉬워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습은 카메라에 모두 잡혔다.

맞은편 더그아웃에 있는 콜로라도 로키스 선수들에게도 훤히 보였고 말이다.

* * *

사실 유현은 에이스로서의 책임감을 느낄 만한 일이 거의 없었다.

데뷔 시즌부터 부상을 입기 전까지는 중간계투로 맹활약을 했고, 부상 이후 봉식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저 그런 투수일 뿐이었으니까.

포텐셜이 폭발한 2018시즌에는 팀이 전체적으로 할 수 있다는 분위기이다 보니 에이스 한 명의 무게감보다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더 중요했다.

그리고 2019시즌의 경우 대전 펠컨스는 명실상부한 강팀이었고, 유현은 이미 KBO리그에서 감당할 수 있는 투수가 아니기에 책임감을 느낄 만한 상황 자체가 거의 없었다.

그나마 꼽으라고 한다면 10이닝 투구를 했던 것과 팀을 위해 불펜 대기를 자처했던 것 정도를 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에서는 달랐다.

전반기에야 로테이션상 카일 프리랜드가 에이스였다지만, 후반기에는 로테이션마저 바뀌며 유현이 명실상부 에이스가 됐다.

그때부터 유현은 에이스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에이스란 무엇일까?

정확한 답을 찾기 어려운 질문을 듣고서 봉식이는 그럴 듯한 대답을 해줬다.

-항상 팀의 기대에 부응하는 피칭을 하는 것, 마운드에 오르면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어주는 것, 그게 바로 에이스야.

유현이 생각하는 에이스는 봉식이가 말한 거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됐다.

바로 매 경기, 모든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며 동료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거였다.

지금 유현이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유현은 1회부터 3회까지 안타 두 개를 허용하긴 했지만 실점을 허용하지 않으며 한껏 달아오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타선을 잘 막아 냈다.

마운드에서 팀의 기대에 부응하는 피칭을 했다.

유현의 활약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3회 말 찾아온 두 번째 타석, 상대투수인 존 치프먼을 흔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무사 1루 상황에서 유현은 번트 모션을 취했다.

상식적으로 투수의 타석이니만큼 번트를 댄다고 보는 게 맞지만, 문제는 타석에 있는 투수가 비정상적인 놈이란 거였다.

1회 말에도 그러지 않았던가.

번트를 댈 것처럼 해놓고 배트를 거둬들이며 카운트를 유리하게 가져간 뒤, 결국에는 볼넷을 얻어내며 출루에 성공했다.

이번에는 그렇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반드시 유현을 잡아서 콜로라도 로키스가 상승세를 타는 걸 막아야만 했다.

오늘 경기를 지더라도 남은 경기를 생각하면, 그리고 포스트시즌에서 만날 수도 있다는 걸 감안한다면 유현에게 휘둘려선 절대로 안 됐다.

고민 끝에 존 치프먼은 초구를 존 밖으로 살짝 뺐다. 유현이 어떤 식으로 나오는지 확인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예상대로 유현은 배트를 거둬들었다.

그리고 2구째.

딱!

다시 한 번 번트 모션을 취하고 있던 유현은 재빨리 스윙으로 전환하며 유격수 방향으로 타구를 만들어 냈다.

1루 주자 이안 세비지는 일찌감치 스타트를 끊은 상황, 런 앤 히트 작전이 나온 것이다.

문제는 불규칙 바운드가 튀는 타구가 만들어지며 송구가 살짝 지연됐다는 것, 그리고 유현의 발이 미치도록 빠르다는 거였다.

거침없는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으로 내야 안타를 만드는 데에 성공한 유현이, 별일 없었다는 듯 가뿐하게 일어서며 마운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는 런 앤 히트 작전을 제대로 수행해 준 이안 세비지를 바라본 거지만, 존 치프먼는 유현이 자신을 바라본다고 생각했다.

차분한 상황이었다면 별일 아닌 걸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고, 실제로 동료들끼리 시선을 주고받는 별일 아닌 일이었다.

하지만 유현의 첫 번째 타석에서 제대로 꼬였고, 두 번째 타석에서도 출루를 허용하고 만 존 치프먼은 조금 다르게 받아들였다.

유현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자극하고 있다고 받아들인 거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유격수 앞 땅볼을 치고 배트를 던진 것마저도 거슬렸다. 유독 요란하게 던지는 게 홈런이라도 치는 모양새라서 기분이 나빴는데, 그게 다 의도한 건가 싶었다.

물론 이는 존 치프먼의 생각일 뿐이었다.

유현은 그저 베이스 러닝을 하기 위해 가볍게 배트를 손에서 놓듯이 던진 거에 불과했다.

으드득.

존 치프먼이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동양인 자식. 감히 날 놀려? 다음 타석에서 네놈의 머리통을 두 동강 내주마.’

존 치프먼은 다음 타석에서 유현에게 참교육을 시켜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 모른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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