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에이스의 품격 (1)
“돌아간다고?”
-언제까지 미국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 너도 알다시피 난 대전 일대를 관리하는 땅의 정령이니만큼 대전을 오래 비울 수는 없어서 말이야.
“그래서 축복을 딱 3년만 준 거야? 메이저리그 진출 첫 해까지 보고 돌아갈 생각으로?”
-어느 정도 의도하긴 했지.
봉식이는 유현에게 3년 동안만 축복을 줬다. 유현이 받은 축복은 이번 시즌이 끝나면 더 이상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어째서 3년일까?
하고 많은 햇수 중에 왜 굳이 3년인 걸까?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게 됐다.
공교롭게도 유현의 포텐셜이 폭발하는 시기에 포스팅 제도가 개선되며 두 시즌을 KBO리그에서 뛴 뒤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수 있었다.
봉식이를 만나고 메이저리그 첫 시즌을 소화하면 3년이 끝난다.
어쩌면 봉식이는 자신의 손으로 키워 낸 투수가 메이저리그를 지배하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한 뒤 대전으로 돌아가려고 한 게 아니었을까?
유현이 복잡한 눈빛으로 봉식이를 바라보았다. 정작 봉식이는 별일 아니라는 듯 열심히 갈비를 갉아먹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다. 시간이 돼서 돌아가는 거고, 평생 못 볼 것도 아니잖아.
“뭐, 그렇긴 하지.”
-나에 대해 걱정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좋은 피칭을 할 수 있게 노력하도록. 아직 시즌 안 끝났다. 조금만 방심하면 어느새 방어율 앞자리가 달라져 있을지도 모르지.
“걱정하지 마.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니까.”
현재 유현은 메이저리그에서 유일하게 0점대 방어율을 사수하고 있는 선발투수다. 1점대 방어율의 선발투수가 두 명이 있긴 하지만, 두 선수와 유현의 방어율은 1이 넘게 차이난다.
컨디션이 좋을 때를 제외하면 작정하고 삼진을 잡지 않다 보니 탈삼진 순위는 어중간했지만, 그 외에 모든 지표에서는 압도적 1위였다.
말 그대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 주고 있다.
중요한 건 아직 시즌이 끝나지 않았고, 유일한 0점대 방어율 선발투수가 사라질 가능성이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오버 페이스를 한 투수가 시즌 막바지에 컨디션 난조를 겪는 경우가 어디 한두 번이던가.
물론 유현은 봉식이의 덕분에 컨디션 난조를 겪을 일이 적었고, 그 낮은 확률마저도 철저한 컨디션 관리를 통해 극복할 생각이었다.
적어도 이번 시즌이 끝날 때까지는 말이다.
월드 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릴 때까지는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대전으로 돌아갈 녀석에게 근사한 선물 하나 정도는 줘야 하지 않겠어?’
월드 시리즈 우승.
유현이 다시 한 번 목표를 상기시켰다.
* * *
유현의 퍼펙트게임으로 기세 좋게 20연승을 내달렸던 콜로라도 로키스는, 애석하게도 21연승을 기록하진 못했다.
카일 프리랜드가 컨디션 난조로 인해 5이닝 4실점을 기록했고, 타선에선 고작 2득점을 지원해 주는 데에 그치며 모처럼 투타가 조화를 이루는 데에 실패한 것이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 경기에서 존 그레이가 8이닝 1실점 호투를 했지만 타선이 단 1득점도 만들어 주지 못하며 완투패를 당하고 말았다.
다음 경기에서도, 그다음 경기에서도.
콜로라도 로키스는 승리를 쟁취하지 못하며 시즌 첫 4연패를 하는 수모를 겪었다.
대부분의 언론들은 콜로라도 로키스가 20연승을 한 후유증을 겪는 거라고 말했다.
물론 콜로라도 로키스는 무리한 경기 운용을 하지 않은 채 20연승을 수확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선수들이 베스트 컨디션을 유지하는 가운데 연승을 했냐고 묻는다면 절대 아니다.
기본적으로 연승을 달릴 때는 구성원들이 분위기에 취한다. 컨디션이 안 좋고 잔부상이 있어도 참고 뛰며 팀의 연승을 위해 집중력을 끌어올리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다가 연승이 끊기는 순간 긴장이 풀리면서 갑작스럽게 팀 분위기가 가라앉는 경우가 많다.
콜로라도 로키스가 딱 그러했다.
20연승을 한 건 분명 대단한 업적이지만, 이후 4연패를 기록했다는 게 팀의 입장에서는 더 뼈아프게 다가오는 게 사실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번 시즌 콜로라도 로키스가 기록한 성적이 폄하되는 건 아니었다. 이대로 콜로라도 로키스가 시즌이 끝날 때까지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 줄 거라고 예상하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20승을 한 뒤 고작 4패를 했을 뿐이다.
분위기를 다시 수습한다면 포스트시즌까지 강세를 이어 나가는 건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다.
그래서 유현의 역할이 중요했다.
지난 등판에서 퍼펙트게임을 기록했던 유현은, 쿠어스 필드로 돌아와서 11연승을 기록하고 있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만나게 됐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11연승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화끈한 타격이었다.
연승 기간 동안 팀 타율 3할 1푼 5리, 득점권 타율 4할로 타선이 화끈하게 불타오르며 승수를 쌓아 나갈 수 있었다.
그렇다고 투수진이 약한 것도 아니었다.
불펜의 힘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있긴 하지만 선발진은 나쁘지 않았다. 내셔널리그 전체 4위의 방어율을 기록하고 있으니까.
연승을 끊어야 하는 콜로라도 로키스의 입장에선 유현이 호투하는 가운데 타선이 승리에 필요한 득점 지원을 해 주는, 이상적인 흐름대로 경기가 흘러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걸리는 점이 있다면 콜로라도 로키스 타선이 연승 후유증이라도 겪는 것처럼 최근 네 경기에서 고작 5득점을 만드는 데에 그쳤다는 거였다.
많은 득점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쿠어스 필드로 돌아왔다는 이유로 다득점을 바라기엔 타자들의 컨디션이 20연승이 끊긴 것을 기점으로 대부분 좋지 않았다.
타격에는 사이클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슬럼프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의 차이일 뿐 결국에는 슬럼프가 존재한다.
문제는 타자들의 슬럼프가 동시에 찾아왔다는 거였고, 현재로서는 마땅한 해법을 찾는 게 불가능한 문제라는 거였다.
유현이 마운드 위에서 버티는 상황에서 1~2점이라도 쥐어짜 주기를 바라는 게 최선이었다.
* * *
9월 1일.
콜로라도 로키스는 확장 엔트리를 통해 타자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투수를 수혈했다.
시즌 초에 비하면 타격 지표가 나아진 건 사실이지만, 엄밀히 말해 콜로라도 로키스의 성적은 타격이 아닌 마운드를 통해 만들어졌다.
몇몇 핵심 투수들이 피로 누적으로 인한 컨디션 난조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투수진 보강을 통해 시즌 막바지까지 좋은 성적을 거두겠다는 의도가 내포된 확장 엔트리였다.
또한 이는 콜로라도 로키스가 타선의 부진을 일시적인 슬럼프라고 보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리고 반전의 계기가 생긴다면 다시 좋은 모습을 보여 줄 거라는 게 콜로라도 로키스 코칭스태프의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타자들의 컨디션이 좋아지기만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특히나 에이스인 유현이 등판한 경기이니만큼, 확실하게 승리하기 위해서 코칭스태프는 과감하게 타순에 변화를 줬다.
-음? 제가 잘못 보고 있는 건가요? 콜로라도 로키스의 타순이 조금 이상합니다.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습니다. 저도 의아해서 직접 물어봤지만 제대로 전달된 게 맞다고 합니다. 여러분. 오늘 콜로라도 로키스는 유현 선수를 1번 타자로 배치했습니다.
-살다 살다 투수가 1번 타자로 타석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콜로라도 로키스는 최근 네 경기에서 5득점을 만드는 데에 그쳤습니다. 발이 빠르고 선구안이 좋은 편인 유현 선수를 출루시켜 득점을 쥐어짜는 게 목적입니다.
-참고로 유현 선수가 출루한 경기에서 콜로라도 로키스는 모두 승리했습니다.
무려 유현을 1번 타순에 배치하는 강수를 둔 것이다.
유현의 시즌 첫 1번 타자 출장이었다.
빠른 발이 장점인 유현을 통해 득점을 쥐어짜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고, 최근 열 경기에서 1번 타자인 헨리 곤잘레스의 타격 지표가 썩 좋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유현의 등판에 많은 관심이 집중됐다.
유현이 마운드에 오르자 쿠어스 필드를 가득 채운 콜로라도 로키스 팬들이 목청껏 소리쳤다.
“타자들의 배트를 다 박살내 버려! 아예 스윙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라고!”
“너라면 삼진 27개를 연속으로 잡을 수도 있을 거야!”
“타석에서 마운드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싹 다 죽여 놓으라고!”
열성적인 로키스의 팬들은 다소 격양되어 있었다. 팀의 에이스가 연패 사슬을 끊어 주길 바라는 마음에 목청을 높였다.
그리고 유현은 팬들의 열정적인 응원에 보답할 수 있을 만큼 컨디션이 좋았다.
연승은 이어나가고, 연패는 끊는다.
그게 바로 에이스의 숙명이다.
연패 사슬을 끊어야 할 임무를 부여받은 유현이 세인트루이스의 선두타자 우타자를 상대로 몸쪽으로 과감하게 커터를 찔러 넣었다.
타자가 스윙을 하며 커터를 공략하려고 했지만…….
빠각!
배트가 반토막 나며 타구가 힘없이 투수 정면으로 향했다. 바운드가 된 타구를 본능적으로 잡아낸 유현이 1루로 송구하면서 고작 1구만에 첫 번째 아웃카운트를 잡아냈다.
아웃이 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1번 타자는 전광판에 기록된 커터의 구속을 확인하고서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97마일? What the hell! 저걸 어떻게 치라는 거야? 컨디션 너무 좋은 거 아냐?’
오늘 유현의 컨디션은 제법 좋았다.
퍼펙트게임을 만들어 냈던 지난 경기만큼은 아니지만 웬만해서는 실점을 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감을 가지기엔 충분한 수준이었다.
우타자 다섯, 좌타자 넷.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최근 컨디션에 따라 선발 라인업을 결정했지만, 유현에게는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누가 나오건 실점을 허용하지 않을 생각인데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2번 타자 좌타자에게는 2구째에 투심 패스트볼을 찔러 넣어 유격수 앞 땅볼을, 3번 타자 우타자에게는 2스트라이크를 만들어 놓고 3구째에 하이 패스트볼을 던져 헛스윙을 유도해 삼구삼진을 잡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고작 공 6개로 1회를 끝마친 것이다.
그리고 1회 말.
선두타자로 유현이 타석에 들어서자 그가 대전 펠컨스 소속일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즐겨듣고 있는 트로트가 흘러나왔다.
영어 가사를 제외하면 뜻을 이해하지 못함에도 콜로라도 로키스 팬들은 노래를 따라 부르려고 노력하면서 유현을 응원했다.
그리고 유현은 투수가 초구를 던지기 전부터 대놓고 번트 자세를 취했다.
정말로 번트를 대려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볼 카운트를 유리하게 가져가라고 하는 걸까?
머릿속이 복잡한 가운데 세인트루이스 카티널스 내야진이 살짝 전진 수비를 하며 혹시 나올지도 모르는 번트 타구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투구가 사인에 고개를 두 번이나 가로저은 뒤에야 첫 번째 공을 던졌다.
그리고 그 순간.
유현은 배트를 거둬들었다. 96마일짜리 포심 패스트볼이 스트라이크 존에서 살짝 벗어나며 볼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2구째.
유현은 다시 한 번 번트 자세를 취했다.
‘저건 도대체 뭐하자는 거지? 왜 계속 번트 자세를 취하는 거야? 정말로 번트를 대서 출루할 수 있다 생각하는 건가?’
투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투수가 1번 타자로 나온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데, 연속으로 번트 모션을 취하는 게 어떤 의도인지 알 수 없어 더욱 신경이 쓰였다.
번트를 대주는 게 맞는 걸까?
아니면 보더라인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도록 던져서 반응을 보는 게 좋을까?
고민 끝에 투수의 선택은 후자였다.
자신과 호흡을 맞추는 24세의 햇병아리 포수의 사인 대신 자신이 직접 사인을 내고서 유현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2구를 던졌다.
그리고 유현은 2구째에도 배트를 거둬들였다.
보더라인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것 같았지만 바깥쪽에 인색한 주심의 판단은 볼.
순식간에 카운트가 2볼로 불리해졌다.
2볼을 잡은 상황에서 유현은 더 이상 번트 모션을 취하지 않았다. 그저 배트를 평소보다 더 짧게 쥔 채로 2스트라이크를 내줄 때까지 스윙조차 하지 않고 공을 지켜볼 뿐이었다.
3볼 2스트라이크 상황.
딱! 딱! 딱! 딱!
유현이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들어오는 공을 무려 네 번이나 커트해 냈다.
그리고 10구째.
체인지업이 들어오자 귀신같이 스윙을 참으며 볼넷을 얻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배트를 가볍게 내던지고 느릿느릿하게 1루로 향하던 유현이 슬쩍 투수를 바라보았다.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입술을 움찔거리며 인상을 쓰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살짝 흔들어 주면 멘탈 제대로 나가겠는데? 원래 멘탈이 좋은 스타일의 선수도 아니고 말이야. 괜히 컨디션에 따라 극과 극의 피칭을 보여 주는 게 아니란 말이지.’
오늘 유현이 투수가 아닌 1번 타자로서 부여받은 1회 말에 상대 투수의 멘탈을 최대한 격렬하게 흔들어 주는 거였다.
경기가 마음대로 풀리지 않을 때 흥분하는 경향이 있는 투수를 자극하려는 거였다.
코칭스태프는 유현에게 말했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된다, 그러니까 상대 투수의 멘탈을 박살낼 수 있다면 확실하게 박살내라고 말이다.
상대 투수의 멘탈에 살짝 금이 간 상황, 유현은 그곳을 망치로 후려쳐서 완전히 박살을 내 버릴 생각으로 몸을 움직였다.
과감하게 초구에 도루를 시도한 것이다.
“세이프!”
결과는 세이프.
가뿐하게 2루 베이스를 훔쳐 낸 유현의 멘탈 흔들기 작전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방금 전에 도루를 했는데 또 도루를 하겠냐는 상대 배터리의 허를 찌르고 다시 한 번 과감하게 도루를 시도했다.
타이밍이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까지 하며 결과는 세이프.
투수가 1스트라이크 1볼 카운트를 만드는 동안 유현은 1루에서 3루로 자리를 옮겼다.
‘제대로 박살났는데?’
그 순간.
유현의 귀에는 선명하게 들렸다.
투수의 멘탈이 쿠쿠다스가 되는 소리가, 연패 사슬을 끊고 팬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