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할 수 있을지도 (4)
존 그레이가 퍼펙트게임을 기록했을 때, 유현은 제대로 자극을 받았다. 자존심이 상하거나 한 건 아니지만 동기부여가 되기에는 충분했다.
자신 또한 퍼펙트게임을 달성하고 싶었다.
봉식이에게 직접적으로 퍼펙트게임과 관련해서 열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컨디션 관리만 잘하면 한 번쯤 기회가 오지 않겠냐고,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노히트가 아니라 퍼펙트게임을 달성하겠다고 말이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노히트건 퍼펙트건 결국 투수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야수들의 도움을 받아야지만 기록을 달성하는 게 가능하다.
노히트 또한 대단한 기록이지만 유현은 퍼펙트게임에 대한 미련을 놓지 않았다. 정말로 컨디션이 좋은 날, 자신에게 다시 한 번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봉식이는 단호하게 말했다.
-목표를 가지는 건 좋지만 의식하지는 마. 기록은 네가 의식한다고 따라오는 게 아니야. 탈삼진도 그렇고 퍼펙트도 그렇고, 네가 베스트 컨디션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매 경기 최선을 다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보상이라 생각해.
‘확정 보상이 아니라서 아쉽네.’
-쯧. 욕심이 많으면 독이 된다는 걸 왜 몰라?
‘알고 있어. 그리고 딱히 등판했을 때마다 의식하는 건 아니야. 너도 알겠지만 내가 컨디션이 좋을 때는 카운트고 뭐고 잘 안 보이거든. 그냥 포수의 미트만 보고 던져서 의식할 겨를도 없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까지 네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최고가 될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도 나쁠 건 없지.
그리고 오늘.
봉식이는 유현의 컨디션이 베스트라는 걸 7회 말 선두타자의 기습 번트 타구를 수비하는 걸 보면서 확신했다.
내야 안타가 될 수도 있던 타구를 유현이 매끄러운 수비를 통해서 아슬아슬하게 아웃카운트를 잡아냈다. 비디오 판독까지 갔지만 찰나의 차이로 아웃이라는 게 입증됐다.
중요한 건 유현이 보여 준 매끄러운 수비가 계산을 하고 나온 게 아니라는 거다.
유현의 수비는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타구만을 보고 반응했기에, 아웃카운트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만을 가지고 움직였기에 가능한 수비였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현재 유현이 오로지 피칭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무아지경.
지금의 유현에게는 포수 마크 번칠의 사인과 미트, 그리고 타구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외의 모든 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대기록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기습 번트로 인해 원정 팀 관중석에서 야유가 쏟아져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유현은 기습 번트고 뭐고 신경 쓰지 않은 채 차분하게 피칭을 이어 나갔다.
하이 패스트볼을 던져 헛스윙 삼진, 스플리터를 뚝 떨어트려서 헛스윙 삼진.
기습 번트로 인한 내야 안타 위기를 벗어난 뒤에는 손쉽게 두 타자를 요리해 냈다.
8회는 더 압도적이었다.
대놓고 포심 패스트볼을 결정구로 사용했음에도 세 타자가 모두 삼진으로 물러났다.
8이닝 0피안타 무사사구 18탈삼진 무실점.
24개의 아웃카운트를 잡는 동안 단 한 번의 출루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유현이, 경기를 끝내기 위해 필요한 남은 아웃카운트 세 개를 잡기 위해서 9회 말 다시 한 번 마운드에 올랐다.
8회까지 기록한 투구 수는 91개.
적지도 많지도 않은 투구 수를 기록한 상황에서, 관건은 유현이 8회까지 보여 준 것처럼 베스트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느냐였다.
“이제 슬슬 힘 좀 빠졌겠지?”
“미친 소리 좀 하지 마. 저 자식 스타일 몰라? 100구가 넘어도 98마일을 기록하는 괴물이라고.”
“그럼 우린 저 자식을 언제 공략할 수 있는데?”
“그걸 알면 진작 공략했겠지.”
남은 아웃카운트는 세 개.
콜로라도 로키스가 4대0으로 리드하고 있는 상황에서 팀의 20연승과 대기록 달성, 두 가지 목표를 눈앞에 두고 유현이 마운드에 올랐다.
* * *
-남은 아웃카운트는 셋. 체이스 필드를 가득 채운 관중들이 침묵에 잠긴 채 그라운드에서 시선을 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홈 팬들에게나 원정 팬들에게나 중요한 순간입니다. 메이저리그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도 있는 경기가 지금 이곳, 체이스 필드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유현 선수가 포수 마크 번칠 선수의 사인을 보고서 망설이지 않고 투구합니다.
-Wow! 98마일! 9회에도 98마일이 나옵니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팬들에게는 익숙한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컨디션이 좋은 날의 유현 선수는 9회에도 최고 구속을 종종 기록하곤 하거든요.
-심지어 10회에도 그렇게 투구했었죠. 이걸로 확실해졌습니다. 컨디션이 좋은 날의 유현 선수는 공략이 불가능한 괴물입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괴물이 아니라 신입니다. 야구의 신이에요.
-동의합니다. 유현 선수는 충분히 그런 찬사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선수입니다.
중계진은 퍼펙트게임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 대신 유현이 9회 말에도 최고구속 98마일을 기록했다는 걸, 오늘 그의 컨디션이 얼마나 좋은지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며 유현이 사고를 칠 수도 있다는 걸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그리고 타석에 선 타자는…….
‘Fucking Korean!’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입으로 튀어나오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 진심이 담긴 욕설이었다.
98마일이라니.
9회 말에 98마일을 기록하는 건 인간적으로 조금 너무한 게 아닌가 싶었다. 이걸 도대체 치라고 던지는 건지 얌전히 삼진이나 당하고 더그아웃에 들어가서 해바라기 씨나 씹어 먹으며 욕이나 내뱉으라고 던지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유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투구에 집중했다. 2구는 스플리터, 3구는 하이 패스트볼을 선택해서 타자의 헛스윙을 유도하는 데에 성공했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유현이 9회 말 첫 번째 아웃카운트를 손쉽게 잡아냈다. 동시에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타자들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1회부터 8회까지.
그들은 유현을 공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비난을 받을 걸 알면서도 기습 번트를 통해서 출루를 시도해 보기까지 했다.
그들에게는 불문율을 어겼다는 것에 대한 비난보다 대기록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더 뼈아프게 다가왔으니까.
그럼에도 유현의 호투를 막지 못했다. 25개의 아웃카운트를 내주는 동안 그들에게는 단 한 번의 출루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땅한 해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인간적으로 9회에도 98마일을 기록하는 투수를, 그것도 컨디션이 좋을 때는 실투조차 던지지 않는 투수를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몰랐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타자들은 진심으로 바랐다. 이 빌어먹을 악몽이 한시라도 빨리 끝나고 꿈에서 깨어나기를 말이다.
* * *
어느 순간부터 유현의 눈에는 마크 번칠의 사인과 미트만이 보였다. 다른 건 전혀 보이지 않았고, 오로지 사인에 대한 투구하는 데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투구와 관련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사인에 따라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1구 1구 전력을 다해 던질 뿐이었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와아아아아아!
27번째 아웃카운트를 삼진으로 잡아내는 그 순간, 콜로라도 로키스의 원정 팬들이 목청껏 환호성을 내지르는 그 순간, 마크 번칠을 비롯한 선수단 전원이 마운드 위에 있는 유현을 향해 달려오던 그 순간.
그제야 모든 감각이 되돌아왔다.
“응? 다들 왜 그…….”
유현은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달려드는 선수들 사이에서 당황한 채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전광판을 확인해 보았다.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오늘 경기에서 애리조나 다이아몬스백스의 타자들에게 단 한 차례도 출루를 허용하지 않았다는 걸, 20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는 가운데 완벽한 경기 운용을 보여 줬다는 걸 말이다.
105구를 투구해 9이닝 0피안타 무사사구 20탈삼진 무실점 퍼펙트.
유현이 한 시즌에 한 팀에서 두 번의 퍼펙트게임이 나오는 진기록을 세우며 시즌 21승 달성에 성공했다.
경기가 끝나고 한참 시간이 끝날 때까지도 유현은 얼떨떨해하고 있었다. 자신이 대형 사고를 쳤다는 게, 메이저리그에서 마침내 퍼펙트를 기록했다는 게 좀처럼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언론 인터뷰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으음. 사실 퍼펙트게임을 달성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포수의 사인과 미트만 보였고, 투구를 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거든요.”
“7회 말에 보여 준 호수비는 기억나십니까?”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출루를 허용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타구를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움직였습니다. 평소에 기습 번트를 의식해서 수비 훈련을 꾸준히 해 왔던 게 도움이 된 거 같습니다.”
“노히트 게임을 달성했을 당시 쿠어스 필드에서의 퍼펙트게임이 목표라고 하셨습니다. 쿠어스 필드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퍼펙트게임을 달성했습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만.”
“사실 아직도 얼떨떨하고 크게 와 닿지 않습니다. 확실한 건 오늘 제 퍼펙트게임은 삼진을 잡지 못한 7개의 아웃카운트를 동료들이 잘 처리해 줬기 때문에 만들 수 있습니다. 제가 등판하는 경기마다 최고의 수비를 보여 주는 동료들에게 감사합니다. 덴버로 돌아가면 한턱 크게 쏘겠습니다.”
원했던 쿠어스 필드에서의 퍼펙트게임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달성하긴 했다.
인터뷰가 끝난 뒤.
샤워를 하고 나와 호텔로 돌아온 유현은 그제야 휴대폰을 확인해 보았다. 온갖 사람들로부터 축하한다는 연락이 잔뜩 와 있었다.
그중 유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사랑하는 연인 알리사 메켄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미소를 지은 유현이 알리사 메켄에게 전화하려는 찰나, 봉식이가 유현의 머리 위에 올라타면서 말을 걸었다.
-수고했다. 오늘의 그 감각 기억할 수 있도록 노력해 봐. 의식적으로 그렇게 던질 수 있다면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을 거다.
“지금보다 한 단계 성장하면 시즌 방어율 0을 만들라는 거야?”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그나저나 퍼펙트게임을 기념하며 모처럼 저녁 식사를 같이 하는 건 어떻겠어? 함께 식사한 지 오래됐잖아.
“룸서비스 시켜 줄까?”
-오늘따라 한식이 끌리는군.
“한번 물어보지 뭐. 없으면 나가서 먹으면 되고.”
콜로라도 로키스 소속이 된 이후 유현은 봉식이와 식사를 거의 하지 않게 됐다.
유현의 경우 홈에서는 칼퇴근을 했고, 원정에서는 호텔로 들어와 알리사 메켄과 영상 통화를 하며 룸서비스로 끼니를 때우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봉식이는 홈이건 원정이건 가리지 않고 스칼렛의 옆에서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스칼렛을 놔두고 유현의 옆에 붙어 있었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였다.
사실 봉식이의 행동은 지극히 당연한 거였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때부터 유현에게 가르쳐 줄 건 다 가르쳐 줬기에 딱히 조언할 게 없었다. 조언보다는 연애 사업에 매진하는 게 봉식이의 입장에서는 남는 장사였다.
호텔에는 룸서비스로 주문할 수 있는 한식이 몇 가지 있었다. 갈비 10인분과 비빔밥 두 그릇을 주문한 뒤 유현이 입을 열었다.
“내가 퍼펙트를 달성할 수 있었던 건 네 덕분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지도 못했겠지.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해.”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앞으로 계속 잘 부탁할게. 조언은 하지 않아도 되지만 함께 있어 줘. 네가 있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거든.”
-으음…….
유현의 말에 봉식이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뭔가를 한참 고민하는 것 같더니 갈비를 빠르게 갉아 먹으며 대답했다.
-시즌이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대전을 오래 비울 수가 없어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