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131화 (131/155)

131화 할 수 있을지도 (3)

19연승.

시즌 초도 아니고 8월에 무려 19연승이다. 지구 1위를 위해 맹추격하던 LA다저스의 의욕을 꺾어 버리기에 충분한 이슈였다.

심지어 무리해서 만든 연승도 아니다.

상식적인 운용을 통해 일궈 낸 성적이다 보니 더욱 의미 있는 기록이었지만, 콜로라도 로키스 선수단은 19연승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왕 연승을 한 거 신기록 달성까지는 무리더라도 20승은 하고 싶었다.

19연승과 20연승.

고작 1승 차이이지만 앞자리 숫자가 달라지다 보니 체감되는 의미는 전혀 달랐다.

20연승이 달린 경기에 선발로 등판하게 된 유현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원정 경기를 위해 호텔에서 나와 체이스 필드로 향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포수 마크 번칠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콧노래가 나와요? 긴장도 안 돼요?”

“긴장할 게 뭐 있어. 선발등판 하루 이틀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20연승이 걸려 있는 경기잖아요.”

“연승 못한다고 우리가 지구 1위 못하는 것도 아닌데 긴장할 이유가 있나? 음. 월드 시리즈 7차전에 등판하면 조금 긴장되긴 하겠다.”

“보통 월드 시리즈 7차전이면 조금이 아니라 많이 긴장하고, 20연승이 달린 경기라면 긴장하기 마련이거든요? 가끔 보면 진짜 인간미 없다니까. 어떻게 사람이 긴장을 안 하냐.”

“나도 긴장하긴 해. 다만 적절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할 뿐이지. 과도하게 긴장하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 하니까.”

유현이라고 긴장을 안 하는 건 아니었다.

한국시리즈 무대에 섰을 때도, 메이저리그 첫 데뷔 경기 때도 유현은 긴장했다.

다만 타고난 강심장이다 보니 남들보다 덜 긴장했고, 적절한 수준의 긴장을 유지하며 최선의 컨디션으로 마운드에 오르는 방법을 알 뿐이었다.

이번 등판 또한 마찬가지였다.

팀의 20연승이 달려 있는 경기이기는 하지만 과도하게 긴장하지 않았다. 몸이 굳지 않고 냉정한 판단이 가능한, 적정 수준의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체이스 필드에 출근을 한 콜로라도 로키스 선수단이 그라운드에서 몸을 풀었다.

루틴대로 몸을 푼 유현은 이례적으로 자신이 먼저 불펜에서 컨디션을 점검하고 싶다 요청했다.

마크 번칠이 미트를 잡고 투구코치가 지켜보는 가운데 10구 정도를 던져 본 유현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아쉽네요.”

“왜? 컨디션이 별로인 거 같아?”

“아뇨. 오늘 같은 컨디션이면 쿠어스 필드에서 퍼펙트게임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필이면 원정을 와 있잖아요.”

“흐음. 확실히 무브먼트가 좋아 보이기는 하는데, 네 입으로 직접 퍼펙트게임을 언급할 정도인지는 모르겠는데? 어느 정도로 좋은데?”

“볼 반에 반 개 차이로 제구할 수 있을 정도로요. 아. 물론 한가운데로만 계속 찔러 넣어도 완투할 수 있을 정도로 구위도 좋고요.”

“좋아. 한가운데로 던지면 교체 타이밍이라 생각하고 불펜을 가동시켜 주지.”

* * *

별 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하기는 했지만, 이날 유현의 컨디션은 정말로 좋았다.

포심 패스트볼, 투심 패스트볼, 커터, 스플리터,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까지.

뭐 하나 나쁜 구종이 없었다.

구위와 무브먼트 모두 좋았고, 제구 또한 투수코치에게 말한 것처럼 공 반에 반 개 수준으로 컨트롤할 수는 없지만 원하는 코스로 찔러 넣고 실투가 나오지 않을 정도는 됐다.

그중 가장 좋은 건 포심 패스트볼이었다.

다른 구종들을 빛나게 해주는 포심 패스트볼의 수직 무브먼트가 미쳐 있었다.

괜히 쿠어스 필드에서 등판했으면 좋다고 하는 게 아니었다. 포심 패스트볼이 완벽한 날, 유현은 쿠어스 필드에서 항상 호투를 보여 줬으니까.

지금 같은 컨디션이라면 어떤 타자를 상대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8월에만 15홈런을 몰아치며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뜨거운 타자인 강태영이 타석에 들어선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그 정도로 컨디션이 절정이었다.

유현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컨디션이 좋을 때 이리저리 머리 쓰는 건 사치였다.

이런 날에는 오로지 포수 마크 번칠의 사인대로 투구하며, 실투가 나오지 않도록 주의하기만 하면 경기가 수월하게 풀리곤 했다.

1회 초.

헨리 곤잘레스이 볼넷으로 출루한 가운데 찰리 블랙몬의 2루타가 폭발하며 콜로라도 로키스가 선취점을 가져오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어진 1회 말.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선취점을 등에 업은 상황에서 마운드에 오른 유현은 세 타자 연속 삼구삼진으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 주며 이닝을 시작했다.

2회부터 5회까지.

유현은 매 이닝 탈삼진을 2개씩 추가하며 11탈삼진을 잡아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단 한 번의 출루도 허용하지 않았다.

5회까지 속절없이 당하기만 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타자들은, 6회 말 공격을 준비하며 원정 팀 더그아웃 앞에서 몸을 풀고 있는 유현을 기가 질린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저 자식 뭐야? 전력분석이랑 너무 다른데?”

“오늘 컨디션이 장난 아닌 거 같아. 타이밍을 맞추는 게 너무 힘들어.”

“타이밍을 맞춰도 문제야. 포심을 제대로 노려 쳤다고 생각했는데 외야로 살짝 뻗어 나가는 게 전부일 정도로 힘이 있어.”

“안 좋은 구종 있어?”

“그게 있으면 이 고생을 안 했겠지.”

“빌어먹을 동양인 자식. 왜 하필 우리랑 할 때 컨디션이 저렇게 좋은 거야?”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타자들의 눈으로 볼 때, 유현의 컨디션은 타이밍을 제대로 맞춰도 배트가 밀릴 정도로 좋았다.

심지어 타이밍을 맞추기도 어려웠다.

수직 무브먼트가 절정인 포심 패스트볼을 공략하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6회 말에는 반전을 노려보았지만 유격수 앞 땅볼 하나와 삼진 두 개가 누적됐다.

대타로 타석에 섰지만 루킹 삼진을 당하고 들어온 타자는 포심 패스트볼만 연속으로 세 개가 들어온 볼 배합에 할 말을 잃었다.

심지어 마지막 포심 패스트볼은 스트라이크 존 한복판으로 들어왔다.

둘 중 하나라고 봐야 했다.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실투가 나왔거나, 아니면 타자가 스윙을 하지 않을 거라 예상하고 과감하게 한복판으로 찔러 넣었거나.

수싸움을 즐겨 하는 유현과 마크 번칠 배터리의 스타일을 감안할 때 후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사실 오늘처럼 컨디션이 좋은 날의 유현은 굳이 복잡하게 수싸움을 할 필요가 없다. 힘으로 찍어 누르는 피칭을 하더라도 타자들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테니까.

유현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철저하게 보더라인 피칭을 하며 타자들의 허를 찌르는 볼배합을 가져가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더 완벽해지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좋은 피칭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거였다.

덕분에 애리조나 타자들의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제대로 노려 쳤다고 생각했는데 귀신같이 투심 패스트볼이 들어오고, 스플리터나 싱커를 예상하고 스윙을 참으면 어떻게 알고 귀신같이 포심 패스트볼이 스트라이크 존을 파고들었으며, 하이 패스트볼을 예상하면 스플리터가 뚝 떨어진다.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6회까지 출루가 전무한 상황,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타자들은 진심으로 바랐다.

남은 9개의 아웃카운트가 사라지는 동안, 부디 빗맞은 안타라도 나오기를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대기록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 * *

-오늘 유현 선수의 컨디션이 장난 아닙니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타자들이 6회까지 유현 선수의 공에 제대로 타이밍을 맞추지 못할 정도로 말이죠.

-포심 패스트볼의 무브먼트가 라이징 패스트볼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고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엄청납니다. 더 큰 문제는, 포심 패스트볼만이 아니라 유현 선수가 던질 수 있는 모든 구종이 좋다는 겁니다.

-맞습니다. 투심 패스트볼, 커터, 스플리터, 그리고 싱커까지 뭐 하나 모자라지 않습니다. 심지어 제구마저도 완벽합니다.

-투심 패스트볼을 보더라인에 저렇게 완벽하게 걸칠 수만 있다면 모든 선수들이 투심 패스트볼을 연마할 겁니다. 제구가 잘 되는 투심 패스트볼은 마구이니까요.

-7회 말. 유현 선수가 다시 마운드에 오릅니다. 6회 말까지 유현 선수는 단 한 명의 주자도 출루시키지 않는 완벽투를 보여 줬습니다.

7회 말.

아웃카운트를 아홉 개 남겨 둔 상황에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더그아웃이 분주했다.

“초구를 흘려보낸 뒤에 2구가 존 안으로 들어온다 싶으면 기습 번트를 대 봐. 지금으로서는 가장 출루 확률이 높은 방법이야.”

“실패하면요?”

“정석으로 밀고 나간다고 해서 답이 나올 상황이 아니잖아. 뭐라도 해 봐야지. 안 되면 그때 가서 다른 방법을 고민하면 되는 거고.”

“하긴…… 그렇긴 하죠?”

벤치에서는 1번 타자 겸 선두타자에게 2구째에 기습 번트를 시도할 것을 지시했다.

6회까지 단 한 번의 출루도 만들지 못한 상황에서 변칙적인 작전을 통해 어떻게든지 출루를 해보겠다는 심산이었다.

갈수록 도루가 줄어들고 있는 현대 야구에서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1번 타자는 8월 중순까지 54도루를 기록하며 팀이 LA다저스와 지구 2위 경쟁을 할 수 있도록 많은 힘을 보탰다.

심지어 도루 시도를 64번 해서 54번 성공했을 정도로 성공률 또한 높았다.

빠른 발과 정확한 판단력이 더해졌기에 가능한 도루였다. 거기에 출루율 또한 4할 5푼으로 매우 높은 편이었다.

빠른 발과 선구안을 함께 보유한, 출루에 최적화된 1번 타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좌타자가 유현을 상대로 세 번째 타석에 섰다.

앞선 두 타석을 모두 삼진으로 물러났던 타자는 초구에 힘껏 스윙을 해 보았다.

결과는 헛스윙이었다.

바깥쪽 낮은 코스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포심 패스트볼에 제대로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확실히 오늘 유현의 공은 엄청났다.

세 번째 타석임에도 타이밍을 잡는 게 어려울 정도로 공에 힘이 있었고, 정신 나간 수직 무브먼트가 공의 위력을 배가시켰다.

하지만…….

‘그렇다고 출루를 못할 건 없지.’

빠른 발과 정확한 판단력, 그리고 좋은 선구안은 기습 번트를 통한 내야 안타를 다른 타자들보다 더 쉽게 만들 수 있게 해줬다.

이번 시즌.

내야 안타를 무려 38개나 기록한 타자는 몸쪽으로 파고드는 2구 투심 패스트볼에 기습적으로 푸시 번트를 댔다.

딱!

기습 번트 시도는 나쁘지 않았고, 타구 또한 수비를 하기 애매한 코스인 3루수와 투수 사이로 흘러갔다.

타구의 속도가 빠른 편이긴 했지만 기습 번트를 예상하지 못한 3루수가 전진 수비를 하지 않고 있던 상황, 푸시 번트를 댐과 동시에 전력질주를 시작한 타자는 자신이 1루에서 살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말이다.

번트 모션이 나오자마자 앞으로 뛰어나온 유현이 3루수를 대신해서 타구를 잡아냈고, 지체하지 않고 1루를 향해 송구했다.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수비였다.

타자의 스타트가 좋았고 워낙 발이 빨라 웬만해서는 살 수 있는 코스였지만, 유현의 수비 또한 좋았기에 접전이 예상됐다.

타자가 출루에 성공하기 위해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까지 시도해 봤지만…….

“아웃!”

결과는 아웃이었다.

아웃이 선언되자마자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벤치에서는 비디오 판독을 요청했다. 1번 타자가 내야 안타를 만들어 냈다고 확신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아슬아슬하지만 1루수 랜디 오스틴의 태그가 타자의 왼손이 베이스에 닿는 것보다 빠르다는 게 확인됐으니까.

말 그대로 간발의 차이였다.

유현이 번트 모션을 확인하자마자 앞으로 뛰어 나오지 않았다면, 타구를 잡아내고 다이렉트로 송구하지 않았더라면 세이프가 됐을 만큼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출루 시도는 좋았다.

물론 결과는 아웃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순간.

감독의 머리 위에서 스칼렛과 오붓하게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며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봉식이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오늘이라면 정말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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