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130화 (130/155)

130화 할 수 있을지도 (2)

밀워키 브루어스의 가장 큰 장점을 꼽으라면 단연 투수다. 타선보다 투수진, 정확히는 불펜진에 강점이 있는 팀이라고 봐야 한다.

2019시즌까지는 말이다.

2020시즌에는 필승조의 연이은 부상과 기량 하락으로 인해서 그들이 자랑하던 철벽 불펜의 한가운데에 구멍이 뻥 뚫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결과, 밀워키 브루어스는 전반기를 내셔널리그 중부지구 최하위로 끝마쳤다.

좀처럼 반등의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프런트에서는 일찌감치 주요 선수들을 트레이드하고 유망주를 받아 오며 탱킹에 착수했다.

몸값이 올라갈 대로 올라간 주전 선수들을 내보내고 이번 시즌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수준급 유망주들을 육성해 다시 한 번 정상에 도전하겠다는 게 그들의 입장이었다.

사실상 시즌을 완전히 포기한 상황.

메이저리그 유일의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하고 있는 유현을 상대로 밀워키 브루어스의 감독은 트레이드를 통해 데려온 우타자 유망주 셋을 포함, 우타자만 무려 7명이 배치한 라인업을 준비했다.

유현을 상대로 좌타자들이 맥을 못 추기도 하거니와, 어차피 공략하지 못할 거라면 우타자 일색 라인업으로 요행이라도 바라자는 단순한 생각을 가지고 접근한 거였다.

밀워키 브루어스의 팬들은 우타자 일색 라인업에 비난을 하지 않았다. 그 편이 그나마 유현에게서 득점을 쥐어짤 확률이 높다는 걸 알았다.

팀 타율 메이저리그 전체 27위.

사실상 유현을 상대로 공략이 불가능한 타격 지표를 보여 주고 있기에 우타자 일색 라인업이 그나마 괜찮은 선택이었다.

1회 초.

유현은 커터를 결정구로 사용해 세 타자 모두에게 유격수 앞 땅볼을 유도하며 삼자범퇴로 기분 좋게 경기를 시작했다.

2회 초에도, 그리고 3회 초에도.

유현은 여전히 커터를 결정구로 사용해서 밀워키 브루어스의 우타자들을 손쉽게 요리해 나갔다.

타순이 한 바퀴 돈 시점에서 밀워키 브루어스 더그아웃은 유현의 피칭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어렴풋이나마 눈치챘다.

“오늘 유현 좀 이상한 거 같지 않아? 우리가 확인한 전력분석이랑 너무 달라. 커터랑 싱커 말고는 안 던지는데?”

“컨디션이 별로인 건가?”

“아무래도 그런 거 같은데?”

“정말로 컨디션이 안 좋은지 확인해 보면 알 수 있겠지.”

“지금까지는 커터가 결정구였어. 집요하게 노려 보면 답이 나올 거야.”

“집요하게 노렸는데도 패턴이 안 바뀌면…….”

“다른 공이 생각보다 별로라서 못 던지는 거겠지. 너도 알잖아. 이곳에서 어설픈 공은 장타로 연결될 확률이 너무 높다는 거.”

“다른 구종이 안 좋아서 커터랑 싱커만 던진다라……. 확실히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어.”

밀워키 브루어스 타자들의 예상이 맞았다.

유현은 커터와 싱커 외에 다른 구종들의 상태가 썩 좋지 않아 던지지 않는 거였다. 그게 아니라면 출루를 허용한 상황에서도 커터와 싱커만을 던질 이유가 없었다.

정말로 유현의 컨디션이 별로라면, 그래서 커터와 싱커만을 던지는 거라면 밀워키 브루어스 타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하나였다.

집요하게 커터만을 노린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커터만 본다.

밀워키 브루어스 타자들의 접근법은 컨디션이 안 좋은 투수를 상대로 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공략법이라고 봐야 했다.

오늘 유현은 포심 패스트볼은 수직 무브먼트가 형편없었고, 투심 패스트볼은 특유의 지저분한 무브먼트가 형성되지 않고 밋밋했으며, 스플리터는 스트라이크 존에서 제대로 떨어지지 못했다.

다행히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가 좋아서 두 가지 구종만으로 타순이 한 바퀴 돌 때까지는 타자들을 막아 냈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유현의 컨디션이 정상이 아니라고 눈치챈 밀워키 브루어스의 타자들이 집요하게 커터만을 노리고 들어올 때 어떻게 막아 내느냐가 경기의 향방을 가를 가능성이 높았다.

의욕이 넘치는 밀워키 브루어스 타자들과는 달리 유현은 차분했다.

‘슬슬 눈치챈 거 같지만…… 눈치를 챈다고 해서 쉽지는 않을 거야.’

당사자를 제외하고 투수의 컨디션을 가장 잘 아는 건 함께 호흡을 맞추는 포수다.

마크 번칠은 연습 투구를 시작할 때부터 유현의 컨디션에 문제가 있다고 확신했다.

그럼에도 그는 유현에게 공이 좋다고 말했다.

예의상 한 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유현의 공은 좋았다.

포심 패스트볼과 투심 패스트볼과 스플리터가 아닌 커터와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이 말이다.

그리고 유현은, 그 두 가지 구종만 가지고도 충분히 경기를 끌고 나갈 수 있는 투수이기에 좋다는 말을 한 거였다.

“슬슬 눈치챘겠지? 오늘은 무실점이 힘들 수도 있겠어. 그래도 이닝은 최대한 많이 먹어 줘야지.”

“점수는 내주더라도 최대한 긴 이닝을 소화하는 걸 목표로, 딱 좋네요. 타자들이 5득점을 만들어줬으니 그걸 승리로 연결해야죠.”

“물론이지.”

물론 목표치를 높게 잡지 않기도 했다.

타선이 3회 말 연속 5안타와 그랜드슬램을 통해 5득점을 만들어 줬다.

유현의 목표는 그 득점을 승리로 연결하는 거였고, 그 과정에서 최대한 긴 이닝을 소화해 불펜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는 거였다.

그것이 팀의 에이스로서 컨디션이 안 좋을 때 할 수 있는 최선의 피칭이었다.

4회와 5회.

유현은 연속으로 선두타자를 출루시켰지만 병살타를 유도하며 실점을 하지 않았다.

이어진 6회 초에는 결국 연속 안타를 허용하며 1실점을 하긴 했지만, 끝끝내 추가 실점만은 허용하지 않으며 어렵사리 위기를 틀어막았다.

스코어는 1대5.

6회까지 투구 수 75구를 기록한 유현이 마운드에 오르자, 현지 중계진이 조심스럽게 유현의 컨디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으음. 아무래도 오늘 유현 선수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입니다.

-네. 확실히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포심 패스트볼과 투심 패스트볼과 스플리터를 단 1구도 던지지 않았어요. 이 정도로 극단적인 투구 패턴을 고수하고 있다는 건 특정 의도가 있거나 컨디션이 안 좋기 때문이라고 봐야 합니다. 커터의 최고 구속이 95마일에 머물고 있는 걸 보면 후자인 것 같습니다.

-놀라운 건 컨디션이 좋지 않은데도 6회까지 단 1실점만을 허용했다는 겁니다. 심지어 밀워키 브루어스의 타자들이 타순이 한 바퀴 돈 이후부터 대놓고 커터만을 노리고 있음에도 말이죠.

-그래서 대단한 겁니다. 컨디션이 좋을 때 호투하는 건 많은 선수들이 할 수 있지만, 컨디션이 안 좋을 때도 제 몫을 해주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선두타자에게 안타를 허용했던 유현 선수가 병살타에 이은 땅볼 유도로 아웃카운트 세 개를 빠르게 잡아내며 7회를 끝마칩니다. 여전히 커터와 싱커만을 던지면서 말이죠. 에이스의 품격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땅볼, 땅볼, 그리고 또 땅볼.

유현은 안타를 허용하더라도 귀신같이 땅볼 유도를 하며 위기를 벗어났다. 6회 초의 1실점을 제외하면 7회까지 안타 5개를 허용하면서도 단 1점으로 틀어막았다.

그 정도로 위기관리 능력이 좋았다.

밀워키 브루어스 타자들의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우타자 기준 배트 안쪽으로 파고드는 커터는 작정한다고 해서 쉽게 공략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타이밍을 제대로 맞춰도 좀처럼 타구가 내야를 벗어나지를 못했다.

실투라도 노려보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오늘 유현의 컨디션이 안 좋은 건 최고 구속이 살짝 떨어졌고 세 구종의 무브먼트가 기대 이하라 그런 거지, 제구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었으니까.

베스트가 아닐 뿐이지 타자들을 상대할 만한 여럭은 차고 넘쳤다.

게다가 상대는 타격 지표가 메이저리그 최하위권인 밀워키 브루어스다.

심지어 커터 던지기 편하라고 우타자 일색 라인업을 준비해 줬는데 완벽한 피칭은 아니더라도 팀이 승리할 수 있도록 에이스로서 제 몫을 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8회 초.

1아웃 상황에서 내야 안타를 통해 타자주자가 1루 베이스를 밟자, 밀워키 브루어스 코칭스태프는 좌타자를 대타로 기용했다.

우타자 일색 라인업이 유현의 커터에 막혀서 실패로 돌아갔다는 걸 시인한 것이다.

물론 좌타자의 대타 기용은 밀워키 브루어스 코칭스태프가 원하는 효과를 보진 못했다.

좌타자를 기용하고 보니 이제는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이 말썽이었다.

스트라이크 존으로 한복판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가 몸쪽으로 휘어지며 떨어지는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은 좌타자에게 땅볼을 유도하기에 더없이 좋은 구종이었다.

유현이 컨디션 좋을 때 던지는 투심 패스트볼만큼은 아니지만, 좌타자가 대처하기 까다로운 구종인 건 분명했다.

좌타자도 안 되고 우타자도 안 된다.

결국 밀워키 브루어스는 유현에게 1득점을 쥐어짜는 데에 그쳤고, 컨디션이 안 좋은 상황에서도 8이닝 1실점 피칭을 한 유현은 8회 말 빅 이닝으로 스코어가 1대11까지 벌어지자 9회 초에는 마운드에 오르지 않았다.

유현의 호투와 빅 이닝 두 번에 힘입은 콜로라도 로키스가 10연승에 성공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다들 알지 못했다.

연승이 생각보다 길어질 거라는 걸, 한동안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을 거란 걸 말이다.

* * *

5연승쯤만 하더라도 콜로라도 로키스 선수단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시즌 중에 5연승을 이미 두 번이나 했었고, 강팀에게 있어 연승은 흔하디흔한 일이니까.

10연승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운이 좋아서 두 자릿수 연승을 할 수 있었다고, 조만간 연승 가도가 끝날 거라고 봤다.

하지만…….

연승은 쉽게 중단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15연승을 하고 있었다.

그쯤 되니 콜로라도 로키스 선수단도 연승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다.

어라.

우리 이러다 20연승도 하겠는데?

신기록은 무리겠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 연승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는데?

유현의 첫 패전을 기점으로 후끈 달아오른 타선은 연승 기간 동안 식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연승을 최대한 길게 이어 나가자고 작정한 뒤로도 마찬가지였다.

마운드는 후반기가 되어서도 피로 누적으로 컨디션 난조를 보이는 일부 선수들을 제외하면 원활하게 돌아갔다. 무엇보다 1~3선발이 워낙 든든하고 긴 이닝을 소화해 주다 보니, 컨디션 난조를 겪는 선수들에게 회복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다.

연승을 쌓아 나가면서 콜로라도 로키스의 팀 운용에 대해서도 세간의 관심이 집중됐다. 혹여나 연승을 최대한 끌고 나가기 위해 무리한 팀 운용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시선이 존재했다.

이에 콜로라도 로키스의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불편한 심경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어떤 미친 감독이 메이저리그 전체 1위로 팀이 순항하고 있는데 연승을 위해서 무리하게 운용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로키스의 방향성은 시즌 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월드 시리즈 우승을 위한 최선의 운용을 할 겁니다. 연승에 연연할 생각 추호도 없습니다.”

콜로라도 로키스는 무리를 하지 않았다.

다분히 상식적인 선에서 팀 운용을 하면서 연승을 이어 나갔다. 그럼에도 15승을 넘어 어느새 19연승까지 기록이 이어졌다.

봉식이가 말한 대로 한 번 타오른 기세가 좀처럼 꺼질 줄을 모르고 활활 타오른 것이다.

19연승을 수확한 그 순간.

콜로라도 로키스 선수단은 물론이거니와 지역 언론들 또한 20연승을 확신했다.

20연승에 도전하는 경기에는 8월 말인데도 이미 시즌 20승을 달성한, 메이저리그 유일의 0점대 방어율의 선발투수가 등판할 예정이었으니까.

다들 같은 생각이었다.

이왕 19연승까지 온 거, 신기록을 갱신하지는 못하더라도 20승은 해보자!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원정 5연전을 치르기 위해 전세기로 이동하는 가운데, 콜로라도 로키스 선수들은 필승 의지를 다졌다.

그리고 유현은…….

“네, 알리사. 배고파서 스테이크 하나 먹었어요. 영화 한 편 보다가 자려고요. 다들 홀덤하고 있는데 전 너무 어려워서 못하겠더라고요. 몇 번 했는데 맨날 저 혼자서 벌칙을 받아서…….”

20연승이 걸린 경기에 등판한다는 부담감 따윈 존재하지 않는 듯, 알리사 메켄과 영상통화를 하다가 영화를 한 편 본 뒤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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