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할 수 있을지도 (1)
투수의 어깨는 소모품이다.
얼마나 더 관리를 잘하고 좋은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 있느냐의 문제지 결국에는 소모된다.
그리고 선발투수보다는 불펜투수들의 어깨가 더 빨리 소모되고 더 전성기가 짧다. 마리아노 리베라를 비롯해 롱런한 불펜투수들이 더러 있지만, 대부분의 불펜투수들의 전성기는 선발투수들에 비해 짧다는 게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어차피 어깨가 소모된다면, 결국 얼마나 효율적으로 소모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콜로라도 로키스는 메이저리그 모든 구단 중 불펜투수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팀이라고 봐야 했다.
아니, 정확히는 효율적일 수밖에 없었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선발진은 메이저리그 전체에서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하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선발투수들이 과도하게 많은 투구 수를 기록하며 불펜투수들의 부담을 덜어 주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투구 수는 메이저리그 전체 15위로 평균 수준임에도 최다 이닝을 소화하고 있었다. 그만큼 선발투수들이 효율적으로 투구 수 관리를 하고 있다고 보는 게 옳았다.
당연히 그 중심에는 유현이 있었다.
유현은 후반기 첫 등판 경기를 포함해 18경기에서 150이닝을 소화했다.
경기당 평균 8과 3분의 1이닝.
현대 야구에서 나온 기록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경이로운 이닝 소화 능력을 보여 주면서도, 투구 수 자체는 메이저리그 선발투수 평균 수준으로 던지는 게 바로 유현이었다.
거기에 커리어 하이를 기록할 기세인 카일 프리랜드와 존 그레이까지 있다.
불펜투수들의 부담이 줄어드는 게 당연했다.
때문에 콜로라도 로키스 팬들은 바랐다.
완벽한 1~3선발 라인업을 구성하며 불펜 운용마저도 정점을 기록하고 있는 이번 시즌에 반드시 월드 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려야 한다고, 다음 시즌에도 이번 시즌처럼 기회가 올 거라고는 보장이 없으니 무조건 이번 시즌에 성과를 내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콜로라도 로키스의 오랜 팬인 스칼렛 또한 다르지 않았다.
시즌이 진행되며 봉식은 유현의 집에 머물기보다는 스칼렛과 함께 지냈다.
유현과 알리사 메켄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걸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자신 또한 스칼렛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으니까.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스칼렛이 가장 많이 입에 담는 말이 바로 월드 시리즈 우승이었다.
유현이 시즌 첫 패를 당했을 때.
스칼렛은 콜로라도 로키스가 전반기의 강함이 무색하리만큼 무너질 수도 있다고 봤다.
유현을 승리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던 콜로라도 로키스이니만큼, 첫 패가 단순한 1패가 아닌 팀의 사기에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두 경기 연속 대량 득점과 선발투수들의 호투, 심지어는 퍼펙트게임까지 나오며 후반기 첫 3연전에서 위닝 시리즈를 기록한 것이다.
이후 기세를 탄 콜로라도 로키스는 매 경기 넉넉한 득점 지원과 투수들의 호투가 더해지며 9연승을 내달리는 데에 성공했다.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상황.
스칼렛은 콜로라도 로키스가 정규 시즌 막바지까지 지금의 분위기를 유지하며 포스트시즌에서도 선전해 주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아. 올해는 정말 월드 시리즈 우승을 했으면 좋겠어요. 월드 시리즈에 처음 올랐을 때만 하더라도 두 번째까지 10년이 넘게 걸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말이죠.
-저도 제 지역 팀이 두 번째 한국 시리즈 우승을 하기까지 꼬박 19년이 걸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유현이 각성하고 나서부터 모든 일이 술술 풀리더라고요.
-유현 씨가 로키스에서도 우승청부사가 되어 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녀석이라면 그래 줄 겁니다. 단기전 경험도 풍부하고, 저희의 축복까지 받았으니 분명히 제 몫을 해줄 겁니다. 시리즈마다 최소 2승은 책임져 줄 테니, 월드 시리즈 우승에 가장 가깝다고 봐도 허언이 아니겠죠.
흔히들 단기전에서 중요한 건 두 가지를 에이스와 미친 선수라고 한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경우 후자는 몰라도 전자만큼은 확실하게 보유하고 있다.
다승 1위, 유일한 0점대 방어율, 최다 이닝 소화까지, 뭐 하나 흠잡을 데 없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에이스가 있지 않은가.
심지어 그 에이스는 KBO리그에서 두 차례나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견인하기까지 했다.
가을에 약할 거라는 걱정은 무의미하다. 일단 올라가기만 하면 제 몫을 다할 게 분명하다.
게다가…….
-존 그레이의 퍼펙트게임이 녀석에게 좋은 자극이 된 것도 같고요.
-확실히 유현 씨는 쿠어스 필드에서 가장 먼저 퍼펙트게임을 달성하는 걸 목표로 삼았었죠?
-네. 녀석의 목표 중 하나였죠. 동료가 대기록을 달성한 걸 시샘하지는 않을 테지만, 자극이 된 건 분명할 겁니다.
-무섭네요.
-무섭죠. 원래부터 자기 관리 철저한 녀석에게 자극까지 됐으니까요. 거기에 로키스의 최근 분위기까지 좋으니, 성적이 안 나오는 게 말이 안 되는 상황이죠. 제 생각엔 최소 15연승 정도는 하고 나서 연승이 끊길 거 같습니다. 어쩌면 메이저리그 최다 연승 기록을 갈아치울 수도 있을지도 모르고요.
-설마 그렇게까지 할 수 있으려고요.
봉식이가 미소를 지었다.
KBO리그의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봉식은 야구를 좋아했다.
야구와 관련된 지식과 안목으로만 따지자면 자신보다 뛰어난 존재가 없을 거라고 자부할 정도였으니 말 다한 거 아니겠는가.
그런 봉식이의 눈에는 현재 콜로라도 로키스의 흐름이 얼마나 좋은지 훤히 보였다.
-기세라는 게 생각보다 엄청난 거거든요. 아. 물론 제가 감독이라면 무리하게 연승을 끌고 가려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순리대로 맡기겠죠. 그렇게 해도 15연승은 가능할 정도로 현재 로키스의 분위기는 좋아요.
* * *
9연승을 내달린 콜로라도 로키스가 홈으로 돌아와 밀워키 브루어스를 상대하게 되는 날, 유현은 일찌감치 일어나 마당에서 스트레칭을 하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최근 들어 유현에게는 한 가지 루틴이 더 추가됐다. 등판이 있는 날만큼은 아침 일찍 일어나 미리 몸을 풀어 주는 거였다.
몸을 푼 뒤에는 전력분석 자료를 최종적으로 검토했고, 홈경기일 경우 알리사 메켄과 함께 식사를 하며 출근을 준비했다.
유현은 알리사 메켄이 직접 차려 준 한식을 맛있게 먹었다. 동시에 알리사 메켄은 그런 유현을 근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자기. 요즘 너무 힘이 많이 들어간 거 같아요.”
“그래 보여요?”
“네. 존 그레이 선수가 퍼펙트게임을 달성한 이후부터 그래 보여요.”
“아하하. 정확히 본 거 같아요. 존이 퍼펙트게임을 달성한 이후로 좋은 자극이 됐거든요. 더 잘해야 할 거 같아서 등판 당일만큼은 조금 더 힘이 들어가는 거 같아요.”
“지금보다 더 잘하고 싶어요?”
“네. 더 잘하고 싶어요. 알리사도 알다시피 제가 좀 욕심이 많잖아요. 메이저리그에서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요.”
“지금도 충분히 그러고 있거든요?”
존 그레이가 퍼펙트게임을 달성하는 순간, 유현은 좋은 의미의 자극을 받았다.
카일 프리랜드와 존 그레이는 좋은 투수다.
유현이 없었다면 팀의 1선발 자리를 놓고 경쟁했을지도 모른다. 긴 이닝을 안정적으로 소화하는 두 선수에게는 에이스 자격이 충분하다.
실제로 카일 프리랜드는 전반기에 유현을 대신해서 1선발을 소화하기도 했고 말이다.
방심하면 1선발 자리를 뺏긴다, 두 사람이 좋은 투수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에이스 자리까지 내어줘서는 안 된다.
자극을 받은 유현은 더 좋은 투수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등판 당일 루틴에 살짝 변화를 준 것도 노력의 일환이었다.
미소를 지은 알리사 메켄이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고등어 살을 발라 유현의 숟가락 위에 올려주고서 말을 이어나갔다.
“자기는 분명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는 최고의 선수가 될 거예요. 그러니까 자극을 받더라도 의욕이 너무 넘치거나 경직되지는 않았으면 해요.”
“네. 그래야죠. 지금도 경직된 건 아니에요. 좋은 의미에서 자극을 받은 거죠.”
“직관 갈 테니까 오늘도 호투해줘요.”
“아. 그럼 쿠어스 필드 역사상 두 번째 퍼펙트게임을 보여줘야겠네요. 기대하고 와요.”
한때 시애틀 매리너스 전담 기자였던 만큼 알리사 메켄은 야구에 대한 지식이 상당하다.
그럼에도 그는 집에서 유현에게 야구와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좋은 식사를 차려주는 걸로 유현의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힘썼고, 간간이 나누는 대화로 유현의 멘탈이 흔들리지 않게 도왔다.
유현은 그런 알리사 메켄이 고마웠다.
덴버로 돌아올 때마다 그녀가 반겨 주는 덕분에 힘이 났고, 오로지 야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덕분에 최고의 성적을 낼 수 있었다.
몇 시간 뒤.
쿠어스 필드에서 루틴대로 몸을 푼 이후, 경기가 시작하기에 앞서 유현이 연습 투구를 했다.
팡! 팡! 팡!
“나이스! 오늘도 아주 좋아요!”
마크 번칠은 유현의 공을 받을 때마다 연신 나이스를 외쳤다. 가벼운 연습 투구 후 유현과 마크 번칠이 최종적으로 대화를 나눴다.
다만 두 사람의 표정은 살짝 굳어 있었다.
피칭을 한 유현도, 나이스를 외친 마크 번칠도 분위기가 심각해 보였다.
“오늘 전체적으로 별로지?”
“네. 컨디션이 별로인가 봐요?”
“좋은 편은 아니지. 그래서 베스트는?”
“커터, 그다음은 싱커에요. 포심의 무브먼트가 좋은 편이 아니니까 조심해야 할 거 같아요.”
“오케이. 오늘 타자들 배트 싹 다 박살내 볼까?”
“크흐흐. 그것도 좋죠.”
사실 오늘 유현의 컨디션은 베스트라고 말하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많았다.
가장 아쉬운 건 포심 패스트볼의 무브먼트가 좋지 않다는 거였다. 몸이 다소 무거운 게 최고 구속도 98마일을 기록하지 못할 것 같았다.
거기에 투심 패스트볼의 무브먼트도 밋밋하고 스플리터도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현은 자신이 있었다.
세 가지 구종이 아쉽긴 하지만 커터와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이 좋다고 하니, 두 구종을 적절하게 활용해서 밀워키 브루어스의 타자들을 요리할 생각이었다.
투수의 컨디션이 항상 좋을 수는 없다.
유현이 봉식이의 축복 덕분에 상대적으로 컨디션 관리하기가 용이한 건 사실이지만, 한 시즌 내내 베스트 컨디션으로 마운드에 오르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특히나 메이저리그는 KBO리그에 비해 경기 수가 많고 이동 거리가 살인적인 수준이다.
게다가 유현의 경우 쿠어스 필드를 홈으로 쓰고 있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역대 사이영 상 수상자들 또한 한 시즌에 몇 번씩 컨디션 난조를 겪곤 했다. 유현이라고 해서 그들과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중요한 건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어느 정도로 좋은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느냐다. 실점을 하더라도 최대한 긴 이닝을 책임지며 팀의 승리를 위해 공헌해줘야 한다.
그게 바로 에이스가 지닌 숙명이니까.
1회 초.
마운드에 오른 유현이 초구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로 선두타자의 헛스윙을 유도한 뒤, 2구로 커터를 찔러 넣었다.
몸쪽으로 들어오는 패스트볼에 강점이 있는 타자가 과감하게 스윙을 해보았다.
평범한 패스트볼로 보였던 공은 타자의 배트 안쪽을 파고들었고, 배트와 충돌하며 균열을 만들어냈다.
빠각.
배트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타구가 유격수 방향으로 흘러갔다. 자연스럽게 타구를 잡아낸 유격수 트레버 스토리가 1루로 송구하며 손쉽게 아웃카운트 하나가 만들어졌다.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이 괜찮은 편이고, 커터가 확실히 괜찮아. 나머지는 좀 애매하고. 흐음. 밀워키가 빨리 눈치채지만 않는다면 생각보다 괜찮을 것도 괜찮은데?’
오늘.
유현은 커터와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만을 집요하게 던지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