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처음 (3)
투심 패스트볼의 장착으로 다시 전성기를 맞이한 존 그레이는, 카일 프리랜드와 마찬가지로 원정보다 홈에서의 더 성적이 좋은 투수였다.
그리고 LA다저스와의 시즌 12차전에서 존 그레이는 자신이 쿠어스 필드에서 강점을 보이는 이유를 제대로 보여줬다.
일단 포심 패스트볼을 일절 던지지 않았다.
투심 패스트볼이 미쳐 날뛰는 상황에서는, 그것도 쿠어스 필드라면 포심 패스트볼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그 판단은 제대로 적중했다.
투심 패스트볼을 70퍼센트, 나머지 30퍼센트는 슬라이더와 커브를 적절히 섞어 던지는 것만으로도 타자들을 농락하기에는 차고 넘쳤다.
솔직한 말로 투심 패스트볼만 계속해서 던지더라도 LA다저스 타자들이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 정도로 투심 패스트볼의 무브먼트가 좋았다.
본인조차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건 단점이 아닌 장점이었다. LA다저스 타자들이 타석에서 투심 패스트볼 하나만을 보게 만들어줬으니까.
투심 패스트볼을 노리는 타자들에게 슬라이더와 커브를 적절하게 섞어 던져주니 타이밍을 뺏는 게 너무 쉬웠다.
그렇다고 투심 패스트볼을 노려서 제대로 공략에 성공한 것도 아니었다.
워낙 무브먼트가 지저분하다 보니 계속해서 좋은 타구가 나오지 않았고, 5회까지 모든 타구가 내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잡혔다.
6회 초.
5회까지 단 한 번의 출루도 기록하지 못한 LA다저스 타자들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시즌 10차전에서 유현을 잡았다는 것에 고무되어 잊고 있었지만, LA다저스는 시즌 10차전과 시즌 11차전에서 단 1득점만을 만드는 데에 그쳤다. 그리고 시즌 12차전에서도 선발투수 존 그레이의 투심 패스트볼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유현의 공략에 성공하면 콜로라도 로키스의 분위기가 가라앉을 거라 예상했지만 아니었다.
콜로라도 로키스 타선은 유현의 패전을 계기로 오히려 각성해버렸고, LA다저스 타선은 10차전부터 이어온 득점력 부족을 해결하지 못한 채 질질 끌려 다니는 모습을 보여줬다.
유현만 공략하면 이길 수 있다?
약팀이라면 통용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콜로라도 로키스는 메이저리그 전체 1위를 내달리고 있는 2020시즌 최고의 강팀이다.
유현이 무너져도 카일 프리랜드와 존 그레이가 있고, 4선발과 5선발도 메이저리그 평균 선발투수 수준의 활약을 해주고 있다.
거기에 메이저리그 전체 7위의 방어율을 자랑하고 있는 불펜은 명불허전이며, 타선의 경우 객관적인 지표는 평범한 수준이지만 클린업 트리오의 힘과 전체적인 폭발력을 놓고 보면 쿠어스 필드를 홈으로 쓰는 이점을 120퍼센트 살리고도 남는다.
실제로 콜로라도 로키스는 실력을 통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존 그레이가 7회까지 단 한 번도 출루를 허용하지 않으며 완벽한 피칭을 보여주자, 타선은 7회 말에 놀란 아레나도의 만루홈런으로 15득점 째를 올리는 데에 성공했다.
0대 15.
투수가 득점 지원 따위 걱정하지 않고 마음 편하게 투구를 할 수 있는 판을 만들어줬다.
거기에 내야 땅볼이 지겹도록 나오는 가운데에서도 내야수들이 집중력을 잃지 않은 채 좋은 수비를 통해 존 그레이의 어깨를 가볍게 만들어줬다.
말 그대로 완벽에 가까운 경기였다.
8회 초.
졸지에 대기록 헌납을 걱정해야 할 상황에 처한 LA다저스 타자들이 굳은 표정으로 남은 두 번의 공격 기회를 살리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 * *
한편.
더그아웃에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유현은 존 그레이의 피칭에 연신 감탄을 토했다.
‘오늘따라 존의 투심 패스트볼이 엄청나네.’
-투심 패스트볼의 무브먼트만 놓고 보면 너보다도 좋은 게 존 그레이니까. 게다가 슬라이더와 커브도 좋고. 이런 날은 포심 패스트볼을 아예 배제하는 것도 괜찮은 선택지지.
-봉식 씨. 어쩌면 존 그레이가 대기록을 달성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야수들이 경기가 끝날 때까지 집중력을 유지한다면 가능할 거예요. 공도 공이지만, 결국에서는 수비들이 도움을 줘야 대기록이 만들어질 수 있는 거니까요.
‘확실히 내가 노히트를 달성했을 때도 다들 집중력이 장난 아니긴 했지.’
-오늘도 나쁘지는 않아 보여. 게다가 존 그레이의 투심 패스트볼 무브먼트가 워낙 좋기도 하고. 존 안으로 집어넣는다고 생각만 해도 될 정도니까 말 다했지. 거기에 커브 좀 떨어트려 주고, 슬라이더 한 번씩만 찔러 넣어도 8회에 9회에도 맥을 못 출 거야.
-개인적으로는 존 그레이가 퍼펙트게임을 달성했으면 좋겠어요. 부진을 이겨내고 화려하게 부활한 만큼 뜻 깊은 기록을 세우기를 바라요.
-만약 달성할 수만 있다면, 로키스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로 의미 있는 기록이 되겠네요.
8회 초.
마운드에 오른 존 그레이는 포수 마크 번칠의 사인을 확인하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공을 던졌다.
공교롭게도 마크 번칠의 사인은 봉식이가 생각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투심 패스트볼의 경우 존 안으로 넣으라고 했다. 코스는 신경 쓰지 말고 무조건 존 안으로 넣는 거만 생각하라고 요구했다.
거기에 뚝 떨어지는 커브와 보더라인을 찌르는 슬라이더를 섞어 던지니 타자들의 입장에서는 대처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어찌 보면 뻔한 패턴임에도 계속해서 당했다.
유격수 앞 땅볼, 2루수 라인 드라이브, 포수 팝 플라이로 세 개의 아웃카운트를 손쉽게 잡아낸 존 그레이는 결국 8회 초에도 출루를 허용하지 않은 채 대기록에 아웃카운트 세 개만을 남겨두게 됐다.
8회까지 투구 수는 102구.
코칭스태프는 9회 초 또한 존 그레이에게 맡기는 결단을 내렸다. 대기록을 눈앞에 두고 있는 만큼 결과와 상관없이 존 그레이에게 맡기는 게 옳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마운드에 오른 존 그레이는 계속해서 투심 패스트볼만을 던졌다.
사인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투심 패스트볼을 존 안으로 집어넣으라는 게 사실상 유일한 사인이었으니까.
가끔 그런 날이 있다.
투구에 집중해서 다른 게 전혀 보이지 않는 날, 오로지 포수의 사인과 미트만이 보이며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날.
존 그레이에게는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대기록까지 남은 아웃카운트가 세 개라는 걸 인지하지 못한 채 오로지 투구에만 집중했다.
LA다저스 타자들 입장에서는 무조건 스윙을 해야만 했다. 존 그레이가 작정하고 투심 패스트볼을 존 안으로 집어넣는 이상, 스윙을 참아봐야 볼넷을 얻을 가능성은 현저히 떨어지니까.
결과가 내야 땅볼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좋은 타구를 만들기 힘듦에도 해야만 했다.
가만히 있다가 루킹 삼진을 당하는 것보다야 적극적으로 스윙이라도 해보는 게 낫다고 봤다.
덕분에 존 그레이는 유격수 앞 땅볼을 두 번 연속으로 만들어내며 비교적 손쉽게 2아웃까지 잡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남은 아웃카운트는 하나.
쿠어스 필드를 가득 채운 콜로라도 로키스 팬들이 일제히 기립한 채 숨을 죽였다.
숨소리마저 죽인 채 그라운드를 바라보았다. 자신들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모여 존 그레이의 집중력을 흐트러트릴까 봐 걱정했다.
115구째.
1스트라이크 1볼 상황에서 던진 존 그레이의 투심 패스트볼 무브먼트가 이전과 달리 다소 밋밋하게 형성됐다.
딱!
타자는 투심 패스트볼을 받아쳤다.
투심 패스트볼이 처음으로 내야를 벗어났지만, 그렇다고 외야로 쭉쭉 뻗어나가지도 않았다.
떠오른 타구는 내야와 외야 사이, 어중간한 코스로 향했다.
빗맞은 안타가 될 확률이 높은 상황.
동료들에게 콜을 한 중견수 이안 세비지가 전력질주를 했다. 타구가 뜨는 걸 보는 순간 성난 황소처럼 내달렸고, 과감한 다이빙 캐치를 시도했다.
빗맞은 안타가 될 걸로 보였던 타구는 이안 세비지의 글러브 안으로 부드럽게 빨려 들어갔다.
“아웃!”
콜로라도 로키스가 27번째 아웃카운트를 단 한 차례의 출루조차 올리지 않은 채 잡아낸 순간.
와아아아아아!
쿠어스 필드가 들썩였다.
존 그레이가 메이저리그 역사의 한 자락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게 됐다.
* * *
한 시즌에 한 팀에서 노히트 게임과 퍼펙트게임을 나란히 달성하는 진기록이 나왔다.
그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심지어 두 번 모두 쿠어스 필드에서 나온 대기록이다 보니 언론의 엄청난 관심을 받았다.
유현이 쿠어스 필드에서 노히트 게임을 달성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다시 쿠어스 필드에서 퍼펙트게임이 나온 거니까.
사실 콜로라도 로키스는 지난 몇 년 동안 고질적인 홈구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습도를 조절하는 등의 온갖 노력을 해왔다.
물론 마땅한 효과를 보진 못했다.
최근 들어 마운드가 안정되고 한 시즌에 노히트 게임과 퍼펙트게임이 같이 나오자, 언론들은 쿠어스 필드에 변화가 생긴 게 아닐까 하는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아니었다.
쿠어스 필드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투수들의 무덤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최악의 타자 친화형 구장이고, 원정을 오는 대부분의 투수들은 쿠어스 필드에서의 투구를 어려워한다.
그럼에도 콜로라도 로키스가 마운드를 안정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쿠어스 필드에서 호투할 수 있는 스타일의 투수들을 영입하고 육성했으니까.
통상적인 관점이 아니라 철저하게 쿠어스 필드에서의 호투만을 놓고 투수들을 바라본 게 결국에는 결실을 맺고 있었다.
LA다저스와의 후반기 첫 3연전에서 콜로라도 로키스는 마운드의 힘을 제대로 보여 줬다. 시즌 11차전과 12차전에서 타선이 폭발해서 그렇지, 위닝 시리즈의 이면에는 투수들의 호투가 존재했다.
위닝 시리즈를 통해 콜로라도 로키스는 한 가지를 확실하게 보여 줬다.
설사 유현의 공략에 성공하더라도 콜로라도 로키스는 쉽사리 위닝 시리즈를 가져갈 수 있는 팀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그리고 콜로라도 로키스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LA다저스의 유현 공략 전략에 대해서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그들의 판단이 나빴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지요. 그들이 시즌 10차전에서 이길 수 있었던 건 유현을 공략해서가 아니라 타자들이 부진해서입니다. 부진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는 11차전과 12차전에서 확인했다고 생각합니다. 로키스를 이기고 싶다면 일단 마운드부터 무너트려야 할 겁니다. 쉽진 않겠지만.”
돌려 말하기는 했지만 결국 LA다저스가 유현의 공략에 실패했다 말하고 있었다.
실제로 유현은 9이닝 1실점으로 호투했으며, 타자들이 득점 지원을 해주지 못하면서 패전투수가 된 거였다. 사실상 유현을 무너트리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봐야 했다.
유현에게 시즌 첫 패를 안기는 것을 기점으로 후반기 상승세를 타려고 했던 LA다저스는, 오히려 세 경기에 도합 1득점밖에 만들어 내지 못한 타선의 침체로 인해 지역 언론의 맹비난을 받으며 후반기를 시작하고 말았다.
유현을 공략하겠다던 LA다저스 감독의 포부 또한 실패로 돌아갔다는 게 중론이었다.
“우리에게는 유현을 제외하고도 좋은 투수들이 많습니다. 모든 팀들이 지금처럼 유현만을 물고 늘어진다면 고맙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위닝 시리즈를 헌납해 주겠다는데 거절할 필요는 없겠죠.”
다만.
유현 공략 작전이 실패한 LA다저스도, 승리의 상징이 무너진 충격을 잘 수습하고 위닝 시리지를 거둔 콜로라도 로키스도 한 가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바로 유현의 첫 패전으로 인해 선수단이 결집하며 발생한 시너지 효과였다.
승리, 승리, 승리, 그리고 또 승리.
후반기 첫 10경기.
콜로라도 로키스가 9승 1패를 기록하며 LA다저스의 추격을 완전히 따돌리는 데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