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127화 (127/155)

127화 처음 (2)

6회에도, 그리고 7회에도.

워커 뷸러는 끝끝내 실점을 허용하지 않았다. 안타 두 개를 허용하긴 했지만 적절한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 줬다.

7이닝 3피안타 무사사구 9탈삼진 무실점.

선발투로서 자신의 임무를 다한 워커 뷸러가 동료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이후 LA다저스는 8회 말에만 무려 세 명의 투수를 투입하는 초강수를 뒀다.

콜로라도 로키스가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인터 리그에서 보여 줬던 필승조를 원 포인트 릴리프로 투입해 이닝을 확실히 지워내는 방식이었다.

-LA다저스가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3연전에서 콜로라도 로키스가 보여 줬던 전략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한 이닝에 필승조 셋을 원 포인트 릴리프로 투입하는 건,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긴 합니다.

-그만큼 오늘 경기에서의 승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전반기 전승 투수를 무너트린다면 팀의 분위기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맞습니다. LA다저스가 오늘 경기에서 승리한다면 유현 선수의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남을 것 같습니다. 유현 선수가 못 던진 게 결코 아니거든요.

-유현 선수를 공략하려는 팀들은 오늘의 경기를 많이 참고할 것 같습니다. 가장 효율적인 유현 선수 공략법을 제시했으니까요.

사실 냉정하게 말해 LA다저스는 유현을 공략하지 못했다. 유현이 아니라 콜로라도 로키스 타선을 공략한 거였다.

이전 세 경기와는 관점이 전혀 달랐다.

어떤 식으로든 유현을 공략하려고 했지만 세 번 모두 실패를 맛봤다. 최근 경기까지 모두 분석을 한 결과 컨디션이 좋은 유현을 무너트리는 건 운이 따라 주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운은 따라 줘야 한다는 건 제대로 된 공략법이 아니라고 봐야 한다.

고민 끝에 LA다저스 코칭스태프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유현을 공략하지 못할 거라면 타선을 공략하기로 노선을 변경했고, 적어도 8회까지는 그 계획이 제대로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9회 초.

유현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마운드에 올랐다.

8회까지 95구를 투구하며 3피안타 무사사구 5탈삼진 1실점 피칭을 선보인 유현은, 코칭스태프에게 9회까지 자신이 막아 보겠다고 어필했다.

“괜찮겠어?”

“안타 하나 맞으면 교체하셔도 좋아요. 그전까지는 제 힘으로 막아 볼게요.”

“으음. 오케이. 널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어? 홈런 하나 맞거나 주자가 스코어링 포지션에 나갈 때까지는 교체하지 않을게.”

코칭스태프는 유현의 의견을 존중했다.

8회 초까지 1실점으로 막아 준 에이스가 9회 초에도 호투를 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채 경기를 지켜보았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그리고 유현은 세 타자 연속 탈삼진을 잡아내며 두 번째 투수가 마운드에 오르지 않도록 했다.

이제 남은 건 9회 말 아웃카운트 세 개뿐.

콜로라도 로키스 입장에서는 9회 말에 어떻게든지 1득점이라도 쥐어짜서 역전을 하거나 승부를 연장전으로 끌고 가고 싶었다.

놀란 아레나도가 선두타자로 나오기에 타선이 좋았다. 필요에 따라 기용할 수 있는 대타와 대주자들도 많았다.

9회 말이 시작되기 전.

콜로라도 로키스의 더그아웃에서는 타자들이 굳은 표정으로 대화를 나눴다.

“이대로 현을 패전투수로 만들 거야?”

“그럴 순 없지. 오늘 경기를 지더라도 현이 패전투수가 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더도 덜도 말고 딱 1점만 더 쥐어짜자고.”

“다저스의 클로저가 잘하지만 현만큼 잘하는 건 아니잖아? 충분히 공략할 수 있어. 한번 해보자고!”

똘똘 뭉친 타자들은 어떻게든지 득점을 만들어 내고자 했고, 9구까지 가는 접전 끝에 놀란 아레나도가 2루타를 만들어 내며 포문을 열었다.

무사 2루 상황.

득점이 유력한 상황에서 어떻게든지 승리를 쥐어짜기 위해 타자들이 안간힘을 썼다. 풀스윙을 하기보다는 득점에 초점을 맞추고 팀 배팅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반전을 만들어내기엔 LA다저스 마무리투수의 최근 컨디션이 너무 좋았고, 콜로라도 로키스 타자들의 컨디션은 썩 좋지 않았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게임 셋! LA다저스가 시즌 첫 경기에서 승리합니다! 놀란 아레나도의 2루타가 터졌지만 끝끝내 득점으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아아. 유현 선수의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남을 만한 경기입니다. 9이닝 1실점, 완벽에 가까운 피칭을 했습니다만 타선의 득점 지원을 받지 못하며 완투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오늘의 경기는 콜로라도 로키스가 월드 시리즈 우승을 노린다면 반드시 되짚어 봐야 하는 경기라고 생각합니다. 로키스의 장점과 단점이 극명하게 드러난 경기입니다.

2020년 7월 27일 월요일.

유현은 시즌 첫 패배를 완투패로 기록했다.

* * *

경기가 끝난 뒤.

콜로라도 로키스 클럽 하우스의 분위기는 축 가라앉아 있었다. 충격적인 패배에 누구 하나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나온 유현이 고개를 갸웃거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다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미안, 현. 우리 때문에 패전투수가 돼서…….”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요. 야구 하루 이틀 해요? 잘 던져도 패전투수가 되고, 못 던져도 승리투수가 되는 게 야구잖아요.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쓰면서 어떻게 야구하겠어요?”

“우리가 1득점이라도 만들어 냈으면 패전을 면할 수 있었잖아.”

“시즌을 치르다 보면 영봉패를 당하는 날도 있고 그런 거죠. 신경 쓰지 말고 퇴근합시다. 저랑 저녁 먹으러 가실 분? 갈비 먹으러 갈 건데요.”

타자들은 유현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유현이 컨디션 난조로 인해 부진했다면 모를까, 9이닝 1실점 완투를 하고도 득점 지원을 받지 못해서 패전투수가 된 거였다.

타자들의 입장에서는 미안함을 느끼는 게 지극히도 당연한 반응이었다.

타자들이 미안함을 드러내는 것과 달리 유현은 패전투수가 된 걸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9회 말의 2루타가 득점으로 이어지지 못한 게 아쉽기는 하지만, 자신이 패전투수가 된 게 아닌 팀이 동점 기회를 놓친 것이 아쉬운 거였다.

유현은 다승보다는 방어율을, 그리고 팀의 승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투수다.

선발투수로서 9회까지 1실점으로 책임졌다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한 것이라고 봐야 하지만, 그것이 팀의 승리로 이어지지가 않았기에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패전투수가 된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진짜 미안하면 저랑 같이 저녁이나 먹으러 가요. 그리고 내일하고 모레 꼭 이겨 줘요. 전 오늘 패전투수가 된 것보다 오늘 경기로 인해 타선이 침체될까 봐 그게 더 걱정인데요? 뭐…… 너무 걱정하지 마요. 정 안 되면 제가 대타나 대주자로 출장해서 득점을 올려 줄 테니까요.”

“크흐흐. 미친놈!”

“그게 제 매력 포인트죠.”

패전투수가 된 걸 신경 쓰지 않고 능글맞게 말하는 유현의 모습에 클럽 하우스에 모여 있던 선수들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전반기 내내 유현은 콜로라도 로키스의 승리의 상징이자 절대로 패배할 거 같지 않던 최고의 에이스였다.

그런 에이스가 9이닝 1실점 완투를 했음에도 패전투수가 되자 클럽 하우스의 분위기가 가라앉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유현 또한 클럽 하우스의 분위기가 가라앉을 수도 있다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태연하게 행동했다.

선수들이 자신의 눈치를 보지 않도록, 오늘의 충격을 훌훌 털어 버리고 다음 경기부터는 다시 좋은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도록 말이다.

* * *

축 가라앉았던 콜로라도 로키스의 클럽 하우스 분위기와는 다르게, 호텔로 돌아온 LA다저스 선수들은 한껏 들떠 있었다.

무려 유현을 꺾었다.

무패의 에이스이자 유일한 0점대 방어율 투수를 잡아냈다. 여전히 방어율은 0점대이지만 그의 시즌 전적에는 1패가 추가됐다.

그것만으로도 큰 가치가 있었다.

“로키스 놈들은 내일하고 모레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할 거야. 아까 경기 끝나고 나서 놈들 표정 봤어?”

“당연히 봤지! 전 재산을 사기라도 당한 것 같은 표정이던데?”

“이 기세를 몰아서 스윕을 해 보자고!”

“우리도 할 수 있어! 후반기에 잘한 적이 한두 번이야? 로키스도 유현만 무너트리면 별거 없는 팀이라고!”

유현을 무너트렸으니 다른 선수들도 무너트릴 수 있다. 후반기 첫 3연전을 스윕하고서 분위기를 끌어올려 지구 1위를 쟁탈하자.

유현도 무너트렸으니 못 할 건 없다.

라고 생각했지만…….

-여환진 선수가 1회 말부터 연속 4안타를 허용하며 3실점을 하고 맙니다. 오늘 여환진 선수의 컨디션이 안 좋은 편인가요?

-아닙니다. 체인지업과 커터의 무브먼트가 나쁘지 않고 제구 또한 괜찮습니다. 단지 콜로라도 로키스의 타선이 여환진 선수를 잘 공략하고 있다고 봐야 할 거 같습니다.

-여환진 선수가 유격수 앞 땅볼을 유도하며 어렵사리 1회 말의 위기를 벗어납니다. 오늘 경기, 여환진 선수에게는 쉽지 않아 보이죠?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유현 선수의 완투패로 분위기가 가라앉는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기우였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어제의 완투패가 타자들을 각성시킨 것 같습니다.

콜로라도 로키스 타자들은 1회 말 3득점, 2회 말 2득점, 3회 말 2득점으로 2와 3분의 1이닝만에 여환진을 강판시켰다.

전날 완투패의 충격이 오히려 타선의 집중력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후에도 콜로라도 로키스 타선은 매 이닝 득점을 올렸고, 카일 프리랜드는 전반기 1선발답게 7이닝 5피안타 1사사구 5탈삼진 무실점으로 LA다저스 타선을 안정적으로 요리했다.

결국 시즌 11차전은 10차전과 달리 20대0, 타선의 폭발력을 앞세워 콜로라도 로키스가 압승을 거뒀다.

더그아웃에서 경기를 지켜보며 목청껏 응원을 하던 유현은 팀의 승리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넉넉한 득점지원을 속에 호투를 하며 시즌 15승 달성에 성공한 카일 프리랜드에게 박수를 보냈다.

다행히 우려했던 타선의 침체는 없었다.

오히려 분석 따윈 통하지 않는다는 듯이 대폭발을 하며 LA다저스의 마운드를 초토화시키는 것ㄷ으로 전날의 영봉패를 설욕했다.

-이렇게만 하면 내일 경기도 문제없겠는데?

‘그러게. 어제 영봉패 당한 게 충격 요법이 된 것 같은데?’

-5월 이후로 로키스의 타선은 괜찮은 편이었는데 거기에 팀 배팅까지 제대로 하게 되면 승리에 필요한 득점만큼은 확실하게 쥐어짤 수 있을 거야. 다저스가 각성하려다가 오히려 로키스가 각성한 느낌이야.

‘우리 좋은 일 시켜준 거지. 뭐…… 내 시즌 첫 패가 팀에 도움이 됐으면 그건 그거 나름대로 의미 있는 거겠지.’

1승 1패.

시즌 12차전에서 위닝 시리즈가 갈리는 상황에서 양 팀은 필승을 다짐했다.

그리고 LA다저스는 존 그레이라면 어떻게든지 공략할 수 있을 거라고 봤다. 유현과 카일 프리랜드와 달리 존 그레이는 충분히 공략할 수 있는 투수라는 게 그들의 계산이었다.

하지만…….

-존 그레이 선수, 5회까지 모든 아웃카운트를 땅볼로만 잡아냅니다. LA다저스 타선은 안타 하나 만들지 못하며 어제에 이어 오늘도 최악의 생산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따라 존 그레이 선수의 투심 패스트볼 무브먼트가 장난이 아닙니다. 원래도 좋았지만 오늘은 그 수준이 다릅니다. 공이 어디로 튈지 아무도 모릅니다! 던지는 투수도, 받는 포수도, 쳐야 하는 타자도 모르는 공을 던지고 있어요!

-유현 선수를 넘었더니 카일 프리랜드 선수와 존 그레이 선수, 그리고 각성한 타선이 기다리고 있네요. 이거 쉽지 않겠는데요?

-5회 말까지만 해도 콜로라도 로키스의 타선은 무려 9득점을 합작했습니다. 존 그레이 선수를 최대한 빨리 마운드에서 내리지 않는 한 LA다저스에게 승리는 없습니다.

LA다저스의 예상과 달리 존 그레이의 투심 패스트볼의 무브먼트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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