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처음 (1)
올스타 브레이크 기간 동안 유현은 부모님과 덴버 곳곳의 관광명소와 맛집을 돌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때마다 유현을 알아보는 팬들이 제법 많았지만 사인을 요청하는 팬들은 별로 없었다.
유현이 평소에 팬들에게 워낙 사인을 잘해 준 덕분에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는 건 방해하면서까지 사인을 받으려는 팬들을 보기 힘들었다.
덕분에 유현은 부모님과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사실상 프로 데뷔 후 부모님과 며칠 동안 여행 온 기분을 만끽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즐거운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어느새 하룻밤을 자고 나면 올스타 브레이크가 끝나고 쿠어스 필드에서 등판을 해야 하는 날이 다가왔다. 유현은 등판을 앞두고 부모님에게 곧장 귀국할 건지, 경기를 보고 귀국할 건지 물어봤다.
부모님의 선택은 후자였다.
“이왕 네 후반기 첫 등판 경기 정도는 보고 가야 하지 않겠냐? 이번에 가면 포스트시즌 때까지는 안 올 생각이다. 한 달에 한 번 오려니까 피곤해 죽겠어.”
“네. 집에 계속 계실 거죠?”
“됐다. 둘이 오붓하게 시간 보내는데 방해해서 뭐하게? 이제 슬슬 호텔로 가련다.”
“네. 구단에 말해 놓을게요.”
알리사 메켄은 유현의 부모님을 깍듯이 챙겼고, 어머니와 단둘이서 쇼핑을 다니고 유현이 좋아하는 몇몇 음식의 조리법을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불편한 건 불편한 거다.
부모님이 집에서 계속 있는데 불편하지 않은 게 이상한 거다. 게다가 모처럼 쉬는 기간을 온전히 부모님에게 할애하고 두 사람만의 시간을 보내지 못했는데 오죽하겠는가.
며칠 신세를 졌으니 이제는 호텔에서 투숙해야 할 때였다.
그렇게 유현의 부모님은 호텔로 떠났다.
유현에게 혼수를 일찍 장만하는 것도 좋지 않겠냐고 은근슬쩍 압박을 주면서 말이다.
* * *
올스타전에서는 내셔널리그가 아메리칸리그에 7대4로 승리를 가져왔고, 홈런 두 방을 때려낸 놀란 아레나도가 MVP로 선정됐다. 홈런 더비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에 이어 MVP에도 선정되는 영광을 안은 것이다.
올스타전에서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 준 놀란 아레나도는 인터뷰를 통해 2020시즌에 바라는 유일한 목표를 드러냈다.
이번에야말로 팀을 월드 시리즈 무대에 올려놓을 것이고, 자신의 열 손가락 중 하나에 반지를 끼운 뒤에야 무대에서 내려올 거라며 자신감 있게 포부를 밝혔다.
이는 놀란 아레나도뿐만 아니라 콜로라도 로키스 소속 모든 선수들의 바람이기도 했다.
세 시즌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했고, 네 시즌 연속 진출 또한 확정적인 상황이다.
게다가 이번 시즌은 메이저리그 전체 1위로 순항하고 있으며, 이변이 없는 한 지구 1위는 확정적이라고 봐야 한다.
사실상 창단 이후 최전성기를 맞이한 만큼 이번 시즌만큼은 반드시 월드 시리즈 우승을 쟁취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중심인 놀란 아레나도가 월드 시리즈 우승에 공개적으로 도전장을 내민 가운데, 올스타 브레이크가 끝나고 후반기가 시작됐다.
탱킹을 시작한 팀들을 제외한 팀들의 목표는 포스트시즌 진출, 최소 와일드카드 결정전 참가 및 최대 지구 1위였다.
LA다저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2017시즌과 2018시즌, 두 시즌 연속으로 월드 시리즈 진출에 성공했으나 우승에는 실패한 그들의 목표는 여전히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였다.
콜로라도 로키스가 전반기에 68승 30패를 기록하긴 하지만, 59승 39패로 지구 2위를 마크한 LA다저스는 아직까지 지구 1위를 할 수 있을 거라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이미 몇 번이나 후반기에 경이로운 승수 쌓기를 보여 준 적이 있지 않던가. 그때의 기세를 다시 한 번 보여 주기만 한다면 지구 1위를 쟁탈하는 것도 마냥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후반기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원정 3연전에서 위닝 시리즈를 기록하는 것으로 승수 쌓기의 시작을 알리고 싶었다.
후반기를 앞두고 LA다저스는 콜로라도 로키스를, 정확히는 유현에 대한 분석과 공략을 위한 준비를 철저하게 했다.
유현에게 시즌 첫 패를 안겨 줄 수 있다면 최고의 후반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쿠어스 필드에서의 3연전이 시작하기 전.
선수단 미팅을 소집한 LA다저스 감독은 선수들에게 쿠어스 필드에서의 원정 3연전 목표를 밝혔다.
“우리의 목표는 유현에게 시즌 첫 패를 안기는 거다. 준비는 완벽해. 계획대로만 경기를 끌고 나갈 수 있다면, 그래서 유현을 무너트린다면 스윕을 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할 거야.”
* * *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유현은 전반기에 무패행진을 내달렸다. 그가 전반기에 수확한 17승 중 3승은 지구 라이벌 LA다저스로부터 수확한 거였다.
전반기 상대전적 2승 7패.
압도적인 열세인 LA다저스 입장에서는 지구 1위를 노리기 위해서라면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상대전적을 극복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고, 그 시작을 에이스 유현을 공략하는 거라고 봤다.
카일 프리랜드가 전반기에 1선발로서 로테이션을 소화하긴 했지만, 성적과 무게감을 보면 유현이 실질적인 1선발이라고 봐야 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콜로라도 로키스는 후반기를 기점으로 선발 로테이션을 조정했다. 유현과 카일 프리랜드의 자리를 맞바꾸며 유현이 1선발이라는 걸 인정했다.
콜로라도 로키스에게 유현이 가지는 존재감은 단순한 에이스가 아니었다. 전반기의 필승카드, 팀에게 반드시 승리를 안겨 주는 존재였다.
반대로 상대팀의 입장에서는 유현만 무너트릴 수 있다면 콜로라도 로키스를 상대로 위닝 시리즈를 가져갈 수 있다고 확신했다.
LA다저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유현을 상대하기 위해 LA다저스는 쿠어스 필드에서의 전적이 그나마 좋은 편인 워커 뷸러를 후반기 첫 번째 선발투수로 예고했다.
그렇게 시작된 후반기 첫 경기.
유현은 1회 초에 1실점을 허용하고 말았다.
기습 번트를 통한 내야 안타, 1스트라이크 1볼 상황에서의 도루 성공, 이후 연속으로 희생타가 나오며 실점을 내줬다.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했다.
유현이 등판하는 날, 상대 팀에선 어떻게든지 1점을 쥐어짜는 패턴이야 자주 나오는 편이고, 그 이후로는 웬만해서는 실점을 허용하지 않으며 최대한 긴 이닝을 소화하곤 했으니까.
따라서 1회 초에 한 1실점은 유현과 콜로라도 로키스의 입장에서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문제는…….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워커 뷸러 선수가 4회까지 7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며 콜로라도 로키스 타선에게 출루를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완벽한 피칭입니다.
-LA다저스가 후반기 첫 선발을 워커 뷸러 선수로 낙점한 이유가 있었군요.
-패스트볼의 제구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슬라이더의 각이 살아있고 체인지업과 커브를 적절하게 섞어 던지며 타자들을 현혹하고 있습니다. 쿠어스 필드에서 어떤 식으로 투구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연구하고 온 것 같습니다.
-이거, 로키스가 워커 뷸러 선수를 마운드에서 끌어내리기 쉽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LA다저스의 선발투수 워커 뷸러의 슬라이더가 소위 말해 긁히는 날이란 거였다.
무브먼트가 다소 밋밋한 포심 패스트볼과 달리 슬라이더의 각이 확실하게 살아 있었고, 체인지업과 커브를 적절하게 섞어 던지면서 타자들의 타이밍을 빼앗는 데에 주력했다.
4회까지 퍼펙트.
5회 말에 중전 안타로 출루를 허용하긴 했지만 체인지업을 통한 병살타 유도 이후 삼진 하나를 추가하며 손쉽게 위기를 벗어났다.
5이닝 1피안타 무사사구 8탈삼진 무실점.
투구 수가 고작 72개에 불과한 상황, 급격한 컨디션 난조가 없다면 최소 6이닝에서 7이닝을 책임져 줄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5회 말이 끝났을 때.
마운드에 오를 준비를 하는 유현의 머리 위에 봉식이가 올라타며 말을 걸었다.
-오늘 경기 어려울 수도 있겠어.
‘타자들이 영 힘을 못 쓰네. 워커 뷸러의 슬라이더가 오늘따라 날이 서있어. 그리고…….’
-작정하고 준비해 온 느낌이지?
‘응. LA다저스가 어떻게든지 날 잡기 위해서 이를 갈고 온 거 같은데?’
-나쁘지 않은 판단이야. 널 공략하지 못한다면 로키스를 상대로 위닝 시리즈를 만들기 힘든 게 사실이니까. 다른 구단들과 달리 목표를 제대로 잡은 것도 좋아 보이고. 널 무너트리려면 네가 아닌 타자들을 노리는 게 맞지.
모든 팀들이 유현을 공략하기 위해, 유현에게 시즌 첫 패배를 안겨 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전반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중 가장 큰 문제점을 꼽으라면 유현이 결코 대량 실점을 허용하지 않는 투수라는 거였다.
철저하게 루틴을 지키는 유현에게 컨디션 난조를 바라는 건 어렵다. 상대 팀 타자들은 유현이 등판할 때마다 베스트 컨디션이라는 걸 감안하고 공략에 들어가야 한다.
141이닝을 소화하며 방어율 0.57을 기록한 투수를 상대로 대량 득점을 만들어 낸다?
쉽지 않은 일이다.
전력분석을 바탕으로 가능했다면 유현은 진작 무너졌을 것이다. 심지어 이제는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까지 완벽하게 장착하며 투구 패턴이 단조롭다는 지적마저 보완했다.
결국 유현을 상대로 다득점을 만들어 내는 건 어렵다. 기껏해야 1~2점, 그것도 죽어라 쥐어짜야 가능한 점수다.
그렇다면 유현을 공략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유현이 아니라 타자들을 공략하면 된다.
유현에게 어떻게든지 1~2득점을 쥐어짜고, 콜로라도 로키스 타자들의 득점을 원천 봉쇄하면 패전투수로 만드는 게 가능하다.
경기 내용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결과는 다르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유현은 호투를 하고도 패전투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유현의 첫 패전은 콜로라도 로키스에게 적잖은 데미지를 안겨 줄 테고 말이다.
‘아무리 날고 기는 투수라 해도 일단 실점을 한 상황에서 타자들이 득점지원을 해주지 않으면 패전투수가 될 수밖에 없지. 그 상황은 유현에게도 로키스에게도 큰 타격이 될 거야. 차라리 컨디션 난조로 무너졌으면 다음 경기에 잘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라도 있지, 득점 지원을 받지 못해 패전투수가 되는 것만큼 투수로서 기분 나쁜 일도 없을 테니까 말이야.’
LA다저스 감독의 계산은 확실했다.
일단 리드를 잡은 뒤 최대한 길게 리드를 내주지 않다 보면 제아무리 유현이라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고 봤고, 설사 흔들리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1회 초에 얻어 낸 1점 차 리드를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낼 때까지 지키면 되니까.
LA다저스 전력분석팀은 올스타 브레이크 기간 동안 콜로라도 로키스의 타자들을 철저하게 분석했다.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실점을 허용하지 않을까, 어느 타이밍에 투수교체를 끌고 가는 게 좋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 결과가 워커 뷸러의 호투였다.
워커 뷸러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거나 투구 수가 100구에 임박한다면 미리 몸을 풀고 있던 필승조를 투입할 테고, 필요하다면 불펜 투수들을 모두 투입해서라도 확실하게 경기를 잡을 생각이었다.
고작 아웃카운트 12개 남았다.
유현에게 3승을 헌납했던 이전과는 다르게 경기 흐름이 좋다. 콜로라도 로키스 타선이 맥을 추지 못하는 상황이니만큼 반전의 여지를 유지 않으며 경기를 끌고 나가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다만……
LA다저스 감독이 예상하지 못한 게 있었다.
‘이러다 오늘 질 수도 있겠네. 다들 푹 쉬다 와서 그런지 스윙이 조금 무딘 것도 같아.’
-그러는 너도 아까 삼진 당했잖아?
‘나는 투수니까 타격 못해도 면죄부 줘야 하는 거 아니냐? 투수가 매번 타석에서 잘하면 그건 너무 사기지.’
-그건 그렇지. 그래서, 뭐 어떻게 할 거야?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라도 있어?
‘어떻게 하긴 뭐 어떻게 해. 타자들이 득점 지원 못해 주면 완투패 당하는 거지.’
유현이 득점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흔들릴 정도로 멘탈이 약한 투수가 아니란 거였다.
오히려 유현은 득점지원이 나오지 않는 가운데서 더욱 집중력을 끌어 올렸다.
설사 패전투수가 되더라도 상관없었다.
최선을 다해 1구 1구를 던지고 최대한 긴 이닝을 소화하는 게 팀을 위한 거라고 여겼다. 최악의 경우 완투패를 허용하더라도 말이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자신을 잡고 상승세를 타 보려는 LA다저스에게 찬물을 제대로 끼얹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지구 1위만큼은 절대 양보 못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