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125화 (125/155)

125화 VS 레드삭스 (4)

중전 안타를 기록한 놀란 아레나도는 유현과의 교체를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

1점이 중요한 상황에서는 자신보다 유현이 대주자로 들어가는 게 팀에 도움이 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팀에 도움이 된다면 대주자 교체는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는 자존심이 상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유현을 격려해줬다.

“내 느려 터진 발로는 레드삭스의 빌어먹을 배터리를 흔들 수 없지만, 현 너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야. 빠른 발이 얼마나 위협적인 무기가 될 수 있는지 보여 주고 와.”

“제 이번 시즌 목표 중에 도루왕이 있다고 말씀드린 적 있던가요?”

“크흐흐. 레드삭스 놈들이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어버려.”

“물론이죠.”

팀의 상징이자 4번 타자인 놀란 아레나도를 대신해 대주자로 투입됐다. 어떤 식으로든 대주자로서 성과를 내야만 했다.

그리고 유현은 도루만 놓고 본다면 그 어떤 선수보다 잘할 자신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 도루만 놓고 보면 전국에서 유현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선수가 없었고, 그것은 프로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투수로서 더 재능이 많고 타격이 평범한 수준이라 투수를 선택한 거지, 도루를 하라고 한다면 언제 어떤 시점에서건 잘할 자신이 있었다.

이는 봉식이 또한 인정한 부분이었다.

현재 유현이 메이저리그 유일의 0점대 방어율을 사수하고 있는 건 봉식이로부터 도움을 받아 자신의 피지컬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된 덕분이지만, 도루만큼은 봉식이의 도움을 받아서가 아니라 유현이 원래부터 잘하는 거였다.

그리고 유현은 팀에게 반드시 득점이 필요한 순간 빠른 발을 이용해서 적절한 도움을 줬다.

1스트라이크 1볼에서 한 번, 그리고 2스트라이크 2볼에서 다시 한 번 도루를 하며 무사 1루 찬스를 무사 3루 찬스로 바꿔 버린 것이다.

무사 1루가 무사 3루가 된 상황에서, 이번 시즌 18홈런을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를 정조준하고 있는 트레버 스토리를 상대로 보스턴 레드삭스의 선발투수 데이빗 프라이스가 삼진을 잡기 위해 몸쪽 하이 패스트볼을 과감하게 찔러 넣었다.

투구를 한 그 순간.

데이빗 프라이스는 자신이 실투를 했다는 걸 직감했고, 트레버 스토리가 부디 실투를 제대로 공략하지 못하기를 바랐지만…….

딱!

트레버 스토리는 어렵사리 찾아온 절호의 찬스를 놓칠 정도로 어리숙한 타자가 아니었다.

그린 몬스터를 통타하는 큼지막한 2루타가 터졌다. 여유롭게 홈 베이스를 밟은 유현이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직감했다.

오늘 경기, 잡을 수 있다고 말이다.

마크 번칠의 진루타에 이은 이안 세비지의 좌전 안타가 터지며 1점을 더 추가한 콜로라도 로키스가 마침내 승부를 3대2로 뒤집었다.

유현의 도루 하나로 인해 분위기가 다시 한 번 콜로라도 로키스에게로 넘어갔다.

그리고 이번 시즌.

콜로라도 로키스는 8회 이후 리드를 잡고 있을 때는 단 한 경기도 내주지 않았다.

그 기록은 보스턴 레드삭스를 상대로도 이어졌다. 필승조를 투입하며 어렵사리 되찾아 온 리드를 끝까지 이어 나갔다.

-게임 셋! 오수완 선수가 시즌 22세이브를 기록하며 콜로라도 로키스가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인터리그에서 2승 1패로 위닝 시리즈를 가져가는 데에 성공합니다.

-좋은 경기였습니다. 만약 두 팀이 월드 시리즈에서 만난다면 명승부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7차전까지 가기를 바랍니다.

-로키스도 강하고 레드삭스도 강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인터 리그의 승자는 로키스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는 유현 선수가 있었습니다.

* * *

빨이 빠른 투수는 많다.

하지만 유현처럼 팀을 위해 등판 다음 날 대주자를 자처하고, 팀이 원할 때 도루를 해내는 투수는 거의 없다고 봐도 됐다.

그래서 유현이 특별했다.

강태영은 어째서 콜로라도 로키스 팬들이 몇 달 만에 유현을 사랑하게 됐는지 알 것 같았다.

마운드에서는 매 경기 호투를 펼치고, 타석에서도 어떻게든지 출루를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일단 출루를 하고 나며 빠른 발을 이용해 상대 배터리를 흔들어댄다. 심지어 이제는 팀을 위해 대주자를 자청하기까지 했다.

어떤 팬이 팀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최고의 성고를 내는 이런 선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경기가 끝난 뒤.

강태영은 인터뷰를 통해서 유현과의 맞대결에 대해 심정을 드러냈다.

“현이는 최고의 투수입니다. 같은 팀일 때는 녀석이 등판할 때마다 든든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녀석이 두렵지만 그렇다고 공략하지 못할 투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월드 시리즈에서 로키스를 만나게 된다면, 레드삭스의 일원으로서 현이를 무너트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우리의 목표는 늘 그러했듯이 최정상입니다.”

유현이 최고의 투수인 건 맞지만, 월드 시리즈에서 만난다면 반드시 무너트리고 말 거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목표는 월드 시리즈 우승이다.

실제로 강태영은 그럴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지난해 보스턴 레드삭스의 월드 시리즈 우승에 큰 기여를 했으며, 이번 시즌에도 40-40을 정조준하며 3번 타자로서 맹활약을 하고 있으니까.

콜로라도 로키스에게 위닝 시리즈를 내줬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메이저리그 전체 2위를 내달리고 있으며, 정규 시즌과 단기전은 다르다는 걸 수없이 많은 팀들이 증명해 보이지 않았던가.

지난해 월드 시리즈 우승 경험이 있는 보스턴 레드삭스이니만큼, 콜로라도 로키스와 월드 시리즈에서 다시 만났을 때 경험의 차이로 인해 우세를 점할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월드 시리즈는 월드 시리즈고, 대부분 콜로라도 로키스 팬들의 관심은 보스턴 레드삭스에 위닝 시리즈를 거둔 것에 집중됐다.

자연스럽게 유현이 화제의 중심에 섰다.

-내 생각엔 유현을 영입한 로키스의 단장이 이번 시즌 메이저리그 최고의 단장인 것 같아. 유현이 로키스에게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를 안겨 줄 거라고.

-살다 살다 표정 하나 안 변하고 연속 도루를 하는 투수를 보게 될 줄은 몰랐어.

-어째서 이런 투수가 지금껏 KBO리그에 있었던 거야? KBO리그의 수준이 그리 높지 않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두 시즌 연속으로 0점대 방어율을 기록했어. 2018시즌에는 전승에 300탈삼진까지 하면서 말 그대로 초토화시켰고.

-유현이 메이저리그 진출해서 KBO리그 타자들은 행복하겠네.

-딱히 그런 것도 아닌 거 같던데? 작년에 유현을 재치고 탈삼진 1위에 올랐던 투수가, 이번 시즌 전승에 방어율 0.25를 기록하고 있거든. 아. 개막전 이후 전 경기 12탈삼진 이상 피칭을 하고 있기도 하고.

-Holy shit! KBO리그에 왜 이리 좋은 선수가 많아? 남미가 아니라 KBO리그에서 선수를 데리고 와야 하는 거 아니야?

-로키스가 강팀이 되려면 그 선수를 어떻게든지 데리고 와야 할 거야. 돈이 없어서 문제지.

-돈이 없으면 만들면 되잖아? 우리가 지금부터 조금씩 모아서 보태 주면 되는 거라고.

-다들 뭐하고 있어? 키보드 두들길 시간에 펀딩에 참여하라고!

유현이 떠난 후 KBO리그를 지배하고 있는 김정수가 잠시 화제에 오르긴 했지만, 콜로라도 로키스는 팬들은 유현의 맹활약에 진심으로 행복해하고 월드 시리즈 우승을 기원했다.

창단 후 월드 시리즈 진출 1회, 우승 0회.

단 한 번도 팀이 최정상에 오르는 걸 보지 못한 팬들은 월드 시리즈 우승에 목이 말라 있었고, 이번 시즌이 적기라고 보았다.

안정된 선발진과 8회 이후 역전을 허용하지 않고 있는 필승조, 거기에 몇몇 유망주들의 연쇄적인 포텐셜 폭발로 탄탄해진 타선까지.

선수층이 두텁지 못하다는 단점이 지적되고 있긴 하지만, 주전 라인업만 보면 다른 팀들에 비해 꿇릴 이유가 없는 좋은 전력이었다.

그리고 그 전력이 성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메이저리그 전체 1위.

압도적인 성적이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꼬리표처럼 따라 붙었지만, 콜로라도 로키스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좋은 성적을 이어나갔다.

전반기.

콜로라도 로키스는 98경기에서 68승 30패를 기록하며 올스타 브레이크를 맞이했다.

좋은 성적을 기록한 만큼 콜로라도 로키스의 선수 중 몇몇이 올스타에 선정됐다. 팀의 상징인 놀란 아레나도, 천재 유격수 트레버 스토리, 데뷔 시즌임에도 전반기에 타율 3할 1푼 3리 15홈런 47타점 55득점을 기록한 랜디 오스틴.

세 선수가 팬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투수 중에서는 카일 프리랜드가 감독의 추천을 받아 올스타 무대에 서게 됐다.

어째서 유현이 아닌 카일 프리랜드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콜로라도 로키스 팬들은 대부분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유현이 워낙 좋은 활약을 해줘서 그렇지 카일 프리랜드 또한 전반기에 14승 3패 방어율 1.31을 기록하며 최고의 활약을 해줬으니까.

그렇다면 유현은 어째서 감독 추천을 카일 프리랜드에게 양보한 걸까?

팬들의 의문은 올스타 브레이크를 앞두고 감독이 인터뷰를 하면서 말끔히 해소됐다.

“후반기에 선발 로테이션을 조정할 겁니다. 유현이 첫 번째 투수로 후반기를 시작하고, 카일 프리랜드는 로테이션을 한 번 거른 뒤 두 번째 투수로 자리매김할 겁니다. 보다 많은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내린 결정입니다.”

카일 프리랜드는 분명 좋은 투수다.

하지만 카일 프리랜드가 상대해야 하는 투수들은 대부분 상대 팀의 에이스들이었고, 그 과정에서 승운이 따르지 않으면 패전투수가 되는 상황이 나오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유현은 달랐다.

팀의 득점지원과는 무관하게 결국 승리투수가 됐다. 단 1점만 지원해 주더라도 꿋꿋하게 마운드를 지키며 최고의 피칭을 보여 줬다.

141이닝 소화하며 고작 9실점만을 하며 방어율 0.57을 기록, 17승 무패 137탈삼진이라는 성적으로 전반기를 마무리했다.

메이저리그에서 유일하게 0점대 방어율을 마크하고 있는 선발투수다.

상대 팀 또한 에이스를 내보낸다면 유현으로 응수를 하는 게 콜로라도 로키스 입장에서는 1승이라도 더 챙길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유현은 팀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았다.

올스타전 또한 중요하지만 메이저리그에서 1선발이라는 자리가 지닌 의미가 얼마나 큰지, 단순히 성적뿐만 아니라 에이스라는 상징성 또한 지니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유현이 후반기 1선발로 로테이션을 소화한다는 건, 콜로라도 로키스가 유현을 팀의 에이스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올스타전 출전?

의미가 큰 건 맞지만 에이스로 인정받은 것보다는 클 수 없었다.

게다가 유현은 올스타전 출전보다는 휴식을 더 원하기도 했다. KBO리그에서보다 훨씬 타이트하고 이동 거리가 많은 메이저리그의 일정에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제법 지친 상태였다.

워낙 철저하게 루틴을 지키고 몸에 좋은 음식들만 챙겨 먹다 보니 아직까지 체력적으로 어려움이 있는 건 아니지만, 며칠만이라도 야구를 생각하지 않고 편하게 쉬고 싶은 게 사실이었다.

팀에서 1선발 자리를 제안한 김에 그걸 핑계 삼아 올스타 출전을 포기하고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유현에게는 올스타 출전이라는 명예보다는 후반기에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 그리고 팀이 월드 시리즈 우승을 할 때까지 베스트 컨디션을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올스타전을 앞두고 유현은 부모님을 덴버로 초대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초대를 하고 있긴 하지만 이번에는 그 의미가 조금은 남달랐다.

모처럼 쉬는 기간이니만큼 호텔이 아니라 집에서 부모님을 모시기로 해서였다.

처음에는 알리사 메켄과 동거를 하고 있는 것 때문에 부모님의 눈치가 보였지만, 정작 부모님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어차피 시즌이 끝나면 결혼을 할 사이인데 조금 일찍 같이 산다고 문제가 없다나 뭐라나.

오히려 아이 소식은 없는지 유현에게 물어보며 은근슬쩍 부담까지 줄 정도였다.

어쨌거나 부모님이 덴버에 오셨다.

모처럼 휴식을 다짐했던 유현은…….

“아들, 뭐하냐?”

“아. TV 좀 보고 있었어요?”

“TV 내용이 좀 이상하다만?”

“후반기에 상대해야 할 팀의 전력분석 영상이에요. 전반기 마지막 경기를 치를 때 전력분석팀에게 요청했거든요. 상대를 철저하게 분석해야 이기기 쉬워지니까요.”

“그러니까 그걸 왜 굳이 우릴 불러놓고 보고 있냐 이 말이지. 이왕 초대했으며 같이 관광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먹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

“아하하. 이게 직업병이라…….”

꼭두새벽부터 거실에서 전력분석 영상을 보면서 직업병을 자랑하다 부모님에게 폭풍 잔소리를 들으며 아침을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