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VS 레드삭스 (3)
도루는 득점 확률을 높여 주긴 하지만, 100퍼센트 득점을 올리지는 못한다. 반대로 홈런은 100퍼센트의 확률로 득점이 된다.
첫 타석에서 강태영에게 3루타를 허용했을 때, 유현은 강태영에게 홈런을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최근 3경기에서 5홈런을 몰아친 강태영의 타격감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강태영은 첫 타석에서 완벽하게 제구된 유현의 투심 패스트볼을 받아쳐 3루타를 만들어 내는 모습을 보였다.
두 번째 타석에서는 심리전이 적중하며 삼진을 잡아내긴 했지만 여전히 강태영을 상대로 홈런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유현은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다.
선두타자인 강태영을 고의사구로 내보낸 채 다른 타자들을 상대하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 작전은 제대로 맞아 떨어졌다.
4번 타자와 5번 타자를 내리 삼진으로 잡아낸 것이다. 비록 강태영이 적절한 도루로 3루까지 들어가긴 했지만, 2아웃을 잡았기에 안타가 나오지 않는 한 홈 베이스를 밟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았다.
강태영의 발은 분명 강력한 무기다.
하지만 홈 스틸이라도 하지 않는 한 빠른 발만 이용해서는 득점을 만들지 못한다. 결국에는 타자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결국에는 강태영을 거르는 유현의 선택이 옳았다. 4번 타자와 5번 타자에 이어 6번 타자마저도 삼진으로 잡아냈으니까.
-삼진, 삼진, 그리고 또다시 삼진! 유현 선수가 보스턴 레드삭스의 4~6번 타순을 상대로 환상적인 탈삼진 쇼를 보여 줍니다!
-한 번은 스플리터, 한 번은 하이 패스트볼, 한 번은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투심 패스트볼로 결정구를 전부 다르게 가져갔습니다. 강태영 선수를 거르기 위해서 준비를 제대로 한 거 같습니다.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뜨거운 타자를 고의사구로 거르는 건 나쁜 작전이 아닙니다. 다만 무사에서 거르는 건 도박에 가까운데, 유현 선수처럼 후속 타자들을 확실하게 잡아낼 수만 있다면 해볼 만한 도박이 아닌가 싶습니다.
-맞습니다. 솔직히 이건 유현 선수이니까 가능한 작전이었다고 봅니다. 함부로 따라했다가는 실점은 실점대로 하고 욕은 욕대로 먹습니다.
세 타자 연속 탈삼진.
8이닝 5피안타 무사사구 12탈삼진 무실점을 호투를 한 유현이 자신의 임무를 완벽히 끝마친 뒤 마운드를 넘겼다.
이어진 9회 말.
여전히 2대0으로 리드를 잡은 상황에서 콜로라도 로키스는 세 명의 투수를 투입했다. 필승조 셋을 원 포인트로 투입해 역전의 빌미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확실하게 보여줬다.
어떻게든지 반격을 시도해 보려던 보스턴 레드삭스였지만 콜로라도 로키스의 필승조 셋에게 아웃카운트를 헌납하며 이번 경기를 내주고 말았다.
시리즈 전적 1대1.
콜로라도 로키스가 2차전을 승리할 수 있었던 건 누가 보더라도 유현의 호투 덕분이었다.
1차전에서 승리를 견인했던 강태영을 완벽하게 막아내긴 못했지만, 강태영과의 승부를 회피하는 대신 다른 타자들을 잡아내는 작전을 제대로 수행해 냈으니까.
8이닝 무실점 호투를 했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경기가 끝난 뒤.
유현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강태영과 처음으로 상대해 본 소감을 밝혔다.
“3루타를 허용했을 때는 홈런을 맞는 줄 알고 간담이 서늘해졌습니다. 두 번째 타석에서 삼진을 잡긴 했지만, 세 번째 타석에서는 승부가 어려울 수도 있다고 직감했습니다. 고의사구로 보내는 게 좋을 수도 있다고 제가 먼저 이야기를 했는데, 흔쾌히 받아 준 감독님께 감사합니다.”
“만약 월드 시리즈에서 강태영 선수를 만나게 된다면 어떤 식으로 상대할 생각입니까?”
“그때 가 봐야 알겠지만, 통상적인 경우라면 일단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고 시작할 것 같습니다. 전 경기 운용을 쉽게 하기 위해서는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레드삭스를 잡아내고 시즌 16승을 달성했습니다. 이번 시즌, 로키스와 함께 메이저리그 정상에 오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그러려고 노력할 겁니다. 팀의 승리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할 생각입니다.”
인터뷰를 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기자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팀의 승리를 위해 모든 걸 다 하겠다는 유현의 말에 담긴 진정한 뜻을 생각보다 빨리 확인하게 될 거라고 말이다.
* * *
포심 패스트볼, 슬라이더, 커브.
존 그레이하면 떠오르는 구종들이다.
한때 체인지업을 던지기도 했으나 재미를 못 본 이후로는 그만뒀고, 쿠어스 필드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구종을 손대 봤지만 제대로 손에 맞는 구종이 없었다.
2018시즌.
존 그레이는 마이너리그로 강등될 정도로 최악의 부진을 보여 줬고, 결국 포스트시즌 엔트리에서도 탈락하는 수모를 겪고 말았다.
그랬던 존 그레이가 2019시즌에는 17승 6패 방어율 2.81를 기록하며 완벽히 살아날 수 있었던 건 쿠어스 필드에 최적화된 새로운 구종을 장착한 덕분이었다.
투심 패스트볼.
포심 패스트볼과 2~3마일 차이가 나며 볼끝이 지저분한 투심 패스트볼은 존 그레이를 다시 정상급 투수로 만들어 줬다.
존 그레이와 유현의 투심 패스트볼은 비슷하면서도 확연히 다른 구종이라고 봐야 했다.
유현의 투심 패스트볼은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며 딱 타자들의 히팅 포인트를 흐려놓을 수준의 변화를 일으키는 반면, 존 그레이의 투심 패스트볼은 투구하는 본인마저도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무브먼트가 지저분하다.
이 차이는 곧 제구의 차이로 연결됐다.
유현이 투심 패스트볼을 정교하게 제구하는 반면, 존 그레이는 사실상 제구를 포기한 채 존 안으로 넣는다는 생각으로만 투구한다.
전체적인 면을 놓고 봤을 때 최고의 투심 패스트볼을 던지는 건 유현이지만, 무브먼트가 놓고 봤을 때는 존 그레이라는 말도 나왔다.
문제는 존 그레이의 투심 패스트볼이 극과 극의 결과를 낳을 때가 많다는 거였다.
무브먼트가 좋을 때는 타자들이 좀처럼 정타를 만들어 내지 못하며 극강의 그라운드 볼러가 됐다. 투심 패스트볼만 계속 던져도 완투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마저 나올 정도였다.
반면 무브먼트가 좋지 않을 때는 슬라이더와 커브에 의존하며 어렵게 경기를 풀어나갔다.
그리고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3차전에서 존 그레이의 투심 패스트볼 무브먼트는 경악할 정도로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몸쪽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한 타자가 움찔했는데 바깥쪽 끝자락에 걸칠 정도로 무브먼트가 좋았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타자들은 좀처럼 정타를 만들어 낼 수 없었다.
문제는 콜로라도 로키스 또한 좀처럼 득점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는 거였다.
1회 초에 쥐어짠 1득점을 제외하면 7회까지 득점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매 이닝 출루를 하긴 했지만 득점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답답한 건 보스턴 레드삭스도 마찬가지였다.
강태영이 기록한 안타 하나를 제외하면 6회까지 출루조차도 없을 만큼 존 그레이의 투심 패스트볼에 제대로 농락당하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7회 말.
마침내 보스턴 레드삭스가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선두타자로 타석에 선 2번 타자가 기습 번트를 통해 내야 안타를 만들어내며 어렵사리 출루에 성공한 것이다.
무사 1루의 찬스에서 이전 두 번째 타석에서 존 그레이에게 2루타를 때려냈던 강태영이 타석에 들어섰다.
꿀꺽.
존 그레이가 마른침을 삼켰다.
첫 타석에서는 유격수 앞 땅볼로 강태영을 잡아냈지만, 두 번째 타석에서는 2루타를 허용하며 실점 위기를 자초하고 말았다.
다행히 실점 없이 위기를 벗어나긴 했지만 강태영의 컨디션이 좋다는 건 제대로 확인했다.
유현처럼 거를까?
강태영과의 승부를 포기한 채 다른 타자들을 잡아내는 걸로 방향을 선회해야 할까?
존 그레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강태영이 좋은 타자인 건 맞지만 자신의 투심 패스트볼은 오늘 미쳐 날뛰고 있었다. 강태영도 첫 타석에는 투심 패스트볼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고, 두 번째 타석에서도 투심 패스트볼이 아니라 커터를 공략해서 2루타를 만들지 않았던가.
투심 패스트볼을 제대로 던질 수 있다면 강태영을 상대로 밀릴 이유는 없다고 봤다.
결국 존 그레이가 강태영과의 승부를 택했다.
그리고 그 결과…….
딱!
-호오오오옴런! 강태영 선수의 투런 홈런이 중요한 순간에 터집니다! 보스턴 레드삭스가 홈런 한 방에 경기를 뒤집습니다!
-존 그레이 선수의 입장에서는 아쉽게 됐습니다. 하필이면 이날 처음으로 무브먼트가 밋밋한 투심 패스트볼 실투가 나왔는데, 강태영 선수가 그걸 놓치지 않고 받아쳐서 그린 몬스터를 훌쩍 넘기는 대형 홈런을 만들어 냈습니다.
-만약 존 그레이 선수가 유현 선수처럼 강태영 선수와의 승부를 피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야구에는 가정이 아닌 결과만 존재할 뿐입니다. 결과적으로 존 그레이 선수는 승부를 택했고, 강태영 선수는 호쾌한 홈런으로 존 그레이 선수가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습니다.
홈런 한 방에 경기가 뒤집혔다.
이제는 1대2로 보스턴 레드삭스가 리드를 하는 상황이 됐다. 다행히 존 그레이가 추가 실점 없이 7회 말을 틀어막으며 콜로라도 로키스는 반격의 기회를 엿볼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찬스는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8회 초.
4번 타자 겸 지명타자로 출장한 놀란 아레나도가 중전 안타를 기록하며 무사 1루를 찬스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콜로라도 로키스에서 나온 예상 못한 작전에 펜웨이 파크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제가 지금 잘못 본 건가요?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습니다. 세상에! 콜로라도 로키스가 유현 선수를 대주자로 기용하는 승부수를 띄웁니다!
-살다 살다 투수를 대주자로 기용하는 걸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말이죠.
-그만큼 콜로라도 로키스가 유현 선수의 빠른 발과 주루 센스를 믿고 있다고 봐도 됩니다. 역전을 위해 확실하게 승부수를 띄웠는데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기대됩니다.
예상 못한 작전에 많은 사람들이 당황하고 있는 것과 달리 1루 베이스를 밟고 있는 유현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유현의 대주자 기용은 갑작스럽게 나온 작전이 아니었다. 스트링 트레이닝 당시 유현의 빠른 발을 확인한 코칭스태프가 상황에 따라 유현을 대주자로 기용하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을 냈고, 유현의 동의하에 피칭에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대주자로 기용하기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전날.
1승 1패로 위닝 시리즈를 노려야 하는 시점에서 유현이 코칭스태프에게 먼저 말했다.
대주자가 필요한 시점에서 자신을 기용해도 좋다고, 주루 플레이 조금 하고 타격 한두 번 한다고 다음 등판에 지장이 없을 거라고 말이다.
결국 8회 초, 어쩌면 이날 경기의 마지막 찬스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콜로라도 로키스 코칭스태프는 놀란 아레나도 대신 유현을 대주자로 투입하는 초강수를 뒀다.
놀란 아레나도의 발이 느린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유현이 메이저리그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발이 빠르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도루 센스를 지니고 있다는 거였다.
벤치가 유현에게 원하는 건 하나였다.
트레버 스토리가 타석에 있을 때 어떻게든지 도루를 해서 스코어링 포지션을 밟고, 트레버 스토리가 동점을 만들어 내는 거였다.
유현은 늘 하던 대로 리드 폭을 크게 잡았다. 상대 배터리가 견제를 하건 말건 언제든지 뛸 수 있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그리고 1스트라이크 1볼 상황에서 실제로 2루 베이스를 훔치기 위해 뛰었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배터리는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피치아웃을 시도했지만…….
“세이프!”
넓게 잡은 리드폭, 빠른 스타트와 전력질주, 거기에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까지.
베이스를 훔치기 위해 필요한 최고의 퍼포먼스들이 더해지며 유현이 도루 세레모니를 했다.
도루 시도를 할 거라는 걸 뻔히 알고 있고, 실제로 피치아웃까지 했음에도 끝끝내 베이스를 훔쳐내며 대주자로서의 첫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이제 남은 임무는 타자들의 도움을 받아 홈 베이스를 밟는 것뿐이었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일어나 다시 리드폭을 크게 잡는 유현을 보며 강태영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하여간 진짜 미친놈이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