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123화 (123/155)

123화 VS 레드삭스 (2)

사실 유현은 대부분의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상대하면서 위협적이라는 느낌을 받은 적이 아직까지는 거의 없었다.

몸쪽만 제대로 공략해 줘도 대부분의 타자들은 타석에서 맥없이 물러나곤 했으니까.

홈런을 허용하거나 실점을 했을 때는 자신이 잘못 투구한 거라고, 집중하지 못한 채 좋은 공을 던지지 못한 게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강태영은 달랐다.

그는 몸쪽을 그 누구보다 잘 공략하는 타자였다. 그렇다고 바깥쪽에 약하냐고 하면 그런 것도 아니고, 워낙 선구안이 좋아 유인구에도 좀처럼 속지 않았다.

완벽하게 잘 들어간 투심 패스트볼이었다.

타격을 하더라도 절대 정타가 나올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을 정도로 좋은 공을 힘으로 당겨 쳐서 강제로 3루타를 만들어 버렸다.

물론 단순히 힘으로만 해낸 게 아니었다.

정교한 타격 기술을 바탕으로 타고난 힘이 더해져 안타를 만들 수 있었던 거지, 힘만 앞세운 타자들은 모두 유현의 앞에서 지겹도록 삼진을 당하는 모습만을 보여 줬다.

‘그나마 몸쪽을 공략하는 게 제일 효과적이라고 봤는데 안 통하네. 유인구? 아니면 하이 패스트볼? 확답이라고 생각되는 구종이 없는데…… 골치 아프네.’

약점이 없는 타자.

KBO리그에서 최고의 타자였던 강태영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이후에도 완성형 타자라는 평가를 받으며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 보였다.

오죽하면 강태영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그가 컨디션이 안 좋길 바라야다는 말까지 나오겠는가.

일단 첫 승부에서는 유현이 졌다.

잘 들어간 투심 패스트볼을 강태영이 제대로 공략해 냈다. 어느 정도 투구 패턴을 읽혔다고 보는 게 맞았다.

다만 강태영의 3루타는 득점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유현이 4번 타자에게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을 던져 유격수 앞 땅볼을 유도하며 1회 말의 세 번째 아웃카운트를 잡아낸 것이다.

더그아웃으로 들어온 유현의 머리 위에 봉식이 올라타며 말을 걸었다.

-강태영 장난 아닌데? KBO리그에 있을 때보다 더 발전한 거 같아.

‘당연하지. 나만 하더라도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면서 발전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2년 차인 저 녀석이 더 발전하지 못했다면 아직까지 메이저리그를 초토화시키고 있을 리가 없잖아.’

-괜히 아메리칸리그 홈런 2위가 아니라니까.

‘뭐…… 강하긴 한데 다음 타석에서는 내가 이길 거야. 홈런 1위와 홈런 3위를 상대로도 결국 이겼으니까 태영이도 이길 수 있어.’

-홈런 하나를 허용한 건 왜 빼놓고 말해?

‘상대 선발투수가 홈런만 네 개를 허용하며 멘탈이 완전히 박살 났고, 결과적으로 완투를 했으니까 홈런 하나를 허용했어도 내가 이긴 거잖아.’

유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홈런을 허용할 수도 있고 실점할 수도 있다. 그 어떤 선발투수도 200이닝을 넘게 소화하면 실점을 허용하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중요한 건 실점을 하더라도 팀이 승리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드는 거였다.

2회 초.

트레버 스토리와 마크 번칠의 백투백 홈런이 터지며 콜로라도 로키스가 2대0으로 앞서나갔다.

이후 4회 초까지 출루를 하지 못하며 답답한 분위기가 이어졌지만 괜찮았다. 유현은 타선이 어렵게 만들어 준 2점을 승리로 연결할 수 있도록 호투할 생각이었으니까.

타격은 사이클이 존재한다. 그 어떤 위대한 타자도,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이들도 필연적으로 슬럼프를 겪곤 했다.

유현은 타자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최근 다섯 경기의 타격 부진은 이례적으로 나오는 슬럼프가 한 번에 겹친 거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타자들에게 고마웠다.

전날 카일 프리랜드가 등판했을 때 득점을 올리지 못한 미안함 때문인지 상당수의 타자들이 일찌감치 나와 타격 훈련을 하며 컨디션을 조율했고, 그 덕분인지 백투백 홈런으로 선취 득점을 만들어 냈다.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타자들을 위해서 유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어떻게든지 선취 득점이 승리로 연결되게 하는 거였다.

2회와 3회.

유현은 3개의 삼진과 3개의 땅볼로 출루를 허용하지 않은 채 삼자범퇴로 이닝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4회 말.

유현이 이날 경기의 7번째 삼진을 잡아낸 상황에서, 강태영과 두 번째로 만나게 됐다.

-강태영 선수가 타석에 들어서자 다시 한 번 펜웨이 파크가 들썩입니다. 강태영 선수는 이번 시즌 타율 3할 3푼 9리, 25홈런 69타점 58득점 22도루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40-40클럽 가입이 유력하다는 평가를 받는 중이죠. 첫 타석에서는 유현 선수를 상대로 3루타를 기록했습니다.

-유현 선수의 입장에서는 강태영 선수와의 승부가 까다롭게 느껴질 겁니다. 강태영 선수를 상대로는 몸쪽 승부가 쉽지 않거든요.

-유현 선수는 바깥쪽 승부를 즐겨하지 않는 투수입니다. 대부분의 타자들이 몸쪽에 약점이 있는 건 맞지만, 모든 코스에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하고 있는 강태영 선수 같은 스타일의 타자에게는 고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건 유현 선수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투수들이 강태영 선수를 어려워하거든요.

-그나마 유현 선수니까 그나마 해볼 수 있는 거지, 대부분의 투수들은 컨디션이 좋은 강태영 선수를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강태영과의 두 번째 승부.

유현과 마크 번칠 배터리는 초구로 몸쪽 꽉 찬 하이 패스트볼을 선택했다. 유현이 가장 좋아하는 코스이자 뻔한 패턴을 선택한 것이다.

“스트라이크!”

강태영이 스윙을 했지만 배트가 살짝 밀리며 큼지막한 파울이 되고 말았다. 폴대를 아슬아슬하게 벗어나는, 조금만 타이밍을 잘 맞췄어도 홈런이 될 법한 아슬아슬한 타구였다.

덕분에 유현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강태영이 몸쪽에 강팀이 있는 타자라는 걸, 어설프게 몸쪽을 공략하면 그대로 장타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걸 말이다.

그렇다고 바깥쪽을 공략하자니 이번 시즌 강태영이 기록한 25개의 홈런 중 14개는 바깥쪽 코스를 공략해서 만들어 냈다.

강태영에게 있어 몸쪽에 강점이 있다는 것은 바깥쪽에 약점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바깥쪽은 기본적으로 강했고, 몸쪽마저도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약점을 극복해 내고 강해진 거였다.

결국 남는 건 유인구뿐인데…….

워낙 선구안이 좋아서 확실하게 허를 찌르는 유인구가 아니라면 스윙이 나오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 공략해도 쉽지 않은 상황, 유현과 마크 번칠 배터리는 강태영의 허를 찌르기 위해 준비한 피칭을 시도했다.

2구 째.

다시 한 번 몸쪽으로 하이 패스트볼이 들어왔고, 또다시 비슷한 코스로 큼지막한 파울을 만든 강태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2구 연속으로 몸쪽을 노린다고? 결정구를 바깥쪽으로 생각하는 건지, 유인구를 던지려는 건지, 그도 아니면 다시 한 번 몸쪽을 찌를 생각인 건가? 뭔지 몰라도 다 친다.’

2구 연속 몸쪽 하이 패스트볼은 분명 예상 못한 타이밍이었지만, 초구에 비해 2구는 타이밍이 조금 더 잘 맞았다. 다시 들어온다면 공략할 자신이 있었다.

3구째.

포심 패스트볼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린공이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강태영은 존에서 뚝 떨어지는 스플리터를 예상하고 스윙했지만…….

공은 변화를 일으키지 않은 채 그대로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고 말았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헛스윙 삼진을 당한 강태영이 어이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유현을 바라보았고, 유현이 미소를 지은 채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몸쪽 하이 패스트볼을 두 개 보여준 후에 바깥쪽을 공략하거나 존에서 뚝 떨어지는 유인구로 유혹하는 건 정석적인 패턴 중 하나다.

정석이지만 잘 먹히는 패턴이다.

하이 패스트볼을 두 개 연속 들어온 상황에서 강태영은 높은 확률로 스플리터를 예상했고, 유현은 강태영이 스플리터나 바깥쪽을 노릴 거라고 예상한 채 한가운데로 93마일짜리 포심 패스트볼을 한복판으로 찔러 넣었다.

스플리터, 혹은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을 던지는 것처럼 위장한 거였다.

그 판단이 제대로 맞아 떨어지며 강태영을 상대로 삼진을 유도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강태영 선수가 제대로 당했네요.

-스플리터와 싱커를 예상했던 강태영 선수의 허를 찔러 한복판에 포심 패스트볼을 찔러 넣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방금 전까지 97마일을 기록하다가 한복판에 찔러 넣을 때는 93마일로 오히려 구속을 줄였습니다. 구속을 줄여 스플리터와 싱커를 던질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겁니다.

-제대로 허를 찌른 거라고 봐야겠죠?

-네. 강태영 선수가 헛웃음을 내뱉는 걸 보니 제대로 먹힌 거 같습니다. 하지만 두 번 통하지는 않을 겁니다. 강태영 선수는 좋은 타자입니다. 같은 패턴에 결코 두 번 당하지 않습니다.

-유현과 마크 번칠 배터리의 머릿속이 복잡할 겁니다. 2점의 리드를 승리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강태영 선수를 반드시 막아내야만 합니다.

사실 방금 전 유현과 마크 번칠 배터리는 도박을 한 거였다. 설사 홈런을 맞더라도 2대1로 여전히 리드를 하는 상황이고, 이후에는 실점을 하지 않을 자신이 있기에 할 수 있는 시도였다.

그리고 한 번쯤은 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도 했고 말이다.

결과적으로 한 번은 제대로 통했다.

하지만 두 번은 통하지 않을 터였다. 허를 제대로 찔린 강태영은 존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코스를 공략한다는 생각을 하고 세 번째 타석에 들어설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물론 그 또한 감안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세 번째 타석에서 강태영을 무력화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강태영에게 장타를 허용하지 않을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 * *

유현과 맞대결을 하게 된 보스턴 레드삭스의 선발투수 크리스 셰일은 2회 초 백투백 홈런을 허용하긴 했지만 이후 7회까지 실점 없이 마운드를 지키고 선발투수로서의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해 냈다.

유현 또한 안타를 허용하긴 했지만 강태영에게 허용한 3루타를 제외하면 장타를 허용하지는 않았고, 실점 또한 없이 안정적으로 마운드를 지키며 에이스의 위용을 과시했다.

문제는 8회 말이었다.

“이번에 득점을 못 내면 9회에도 힘들어. 최소한 1점이라도 더 따라가야 돼.”

“태영부터 시작하는 타순이니까 어떻게든지 홈 베이스를 밟게 해 주자고.”

“두 번째 타석처럼 허를 찌르는 피칭을 하진 못할 거야. 레츠 고 태영! 어퍼컷 세레모니를 하는 네 전 동료가 펜스를 넘기는 타구를 확인하고 고개를 푹 숙이게 만들어 버려!”

보스턴 레드삭스는 8회 말에 강태영부터 타순이 시작됐다. 타순이 두 바퀴 돈 상황에서 클린업 트리오가 유현을 상대하게 된 만큼 어떤 식으로든 성과를 내기를 바랐다.

콜로라도 로키스는 7회까지 투구 수 88구를 기록한 유현이 8회까지 책임지고 마운드에서 내려와 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유현은 그 바람에 부응하기 위해 강태영의 상대로 회심의 한 수를 뒀다.

우우우우우!

유현이 준비한 한 수에 강태영은 헛웃음을 내뱉었고, 펜웨이 파크를 가득 채운 보스턴 레드삭스의 팬들은 일제히 야유를 쏟아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유현은 강태영을 아예 상대하지 않는 방법을 선택했으니까.

-아! 여기서 고의사구가 나옵니다! 선두타자를 고의사구로 내보내는 건 흔히 나오는 선택은 아닌데요.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강태영 선수 말고는 전부 다 상대할 수 있다고 판단한 거겠죠. 나쁘지 않은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강태영 선수를 제외한 레드삭스의 클린업 트리오는 유현 선수의 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거든요.

-문제는 강태영 선수의 빠른 발입니다. 유현 선수만큼은 아니지만 강태영 선수 또한 발이 빠르고 도루 센스가 있습니다. 분명 빈틈이 보이면 베이스를 훔치려 들 겁니다.

-추격을 해야 하는 보스턴 레드삭스는 이번 이닝에서 어떻게든지 1점이라도 더 쥐어짜려고 할 겁니다. 로키스의 배터리는 강태영 선수의 빠른 발을 조심해야 합니다.

강태영에게 장타를 허용하느니 고의사구로 내보내고 다른 타자들과 승부를 하겠다.

판단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강태영의 빠른 발이었다.

다음 타자가 2스트라이크로 카운트가 불리하게 몰리자, 강태영은 과감하게 도루를 시도했고, 4번 타자가 헛스윙을 당하는 사이 2루 베이스를 훔쳤다.

그리고 또다시 카운트가 몰리자 3루 베이스를 훔치는 모습을 보여 줬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유현은 타자와의 승부에 집중했다. 견제조차 제대로 하지 않으며 강태영이 편하게 뛸 수 있도록 내버려 뒀다.

마치 강태영에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넌 계속 뛰어라. 난 삼진 잡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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