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비장의 무기 (2)
최고 구속 98마일의 포심 패스트볼, 포심 패스트볼과 1~2마일 차이밖에 나지 않는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는 분명 강력한 무기다.
타자의 입장에서는 구속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 세 구종을 육안으로 구분하는 게 불가능하니까.
거기에 최고 구속 93마일에 달하는 스플리터가 추가되며 2019시즌 KBO리그를 초토화했고, 2020시즌 초반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는 투수로 거듭났다.
하지만.
유현이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음에도 봉식이는 좀처럼 칭찬을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칭찬을 하기는커녕 계속해서 유현을 채찍질했다.
-절대 만족하지 마. 네 능력이라면 지금보다 더 발전할 수 있어.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좋아질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더 좋은 투수가 될 수 있을까 계속해서 고민해.
봉식이는 유현에게 항상 만족하지 말라 강조했고, 이에 유현은 어떤 상황에서도 좀처럼 만족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줬다.
더 잘하고 싶고 더 좋은 성적을 남기고 싶은 욕심이 계속해서 솟아올랐다. 조금이라도 더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보인다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자신을 채찍질했다.
그 결과가 투심 패스트볼의 분리였다.
하나는 포심 패스트볼과 구속 차이가 거의 나지 않으며 스트라이크 존 언저리에서 지저분한 변화를 일으키는 정석적인 투심 패스트볼, 하나는 스트라이크 존에서 떨어지며 싱커와 유사한 무브먼트를 보이는 91~93마일 수준의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의 완전한 장착은 유현에게 있어 의미 있는 행보였다.
유현은 유일한 공략법이 단순한 볼 배합이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다양한 투구 패턴에 대한 아쉬움이 많았던 투수다.
바꿔 말하면 투구 패턴이 다양했을 때는 공략의 여지조차 없는 투수라는 뜻이기도 했다.
실제로 뉴욕 메츠는 유현과 마크 번칠 배터리가 임기응변으로 사인 없이 투구를 하자 전력분석이 무색하리만큼 경기 내내 휘둘리며 10이닝 1실점 투구를 허용하는 모습을 보여 줬었다.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은 LA다저스의 전력분석에 포함된 구종이었지만, LA다저스 타자들 중 그 누구도 유현이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을 던질 거라 생각하고 타석에 서지 않았었다.
지극히 당연한 판단이었다.
유현이 KBO리그에서 사용한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은 커브와 더불어 아주 가끔 타자들의 허를 찌르는 게 전부였고, 구속은 빠르지만 메이저리그에서 사용하기엔 무브먼트가 기대 이하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으니까.
실제로 유현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뒤 단 한 번도 커브와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잊혀진 구종이 되는 것 같았다.
그랬었는데…….
2회 말을 기점으로 분위기가 달라졌다.
91~93마일 사이의 구속을 유지하며, 우타자를 기준으로 바깥쪽으로 떨어지며 휘어져 나가는 싱커의 무브먼트가 엄청났다.
스플리터가 삼진을 잡기 위한 구종이라면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은 땅볼 유도에 최적화된 구종이라고 봐야 했다.
가뜩이나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 덕분에 땅볼 유도에 일가견이 있는 유현에게 땅볼 유도에 최적화된 구종 하나가 추가됐다.
LA다저스 타자들이 적극적으로 스윙을 하며 유현을 공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좀처럼 균열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모습만 보여 줬다.
2회 말의 병살타 이후, 3회부터 7회까지 유현은 단 한 타자도 출루시키지 않았다. 모든 타구가 내야를 벗어나지 못하며 아웃카운트가 되고 말았다.
우타자들이 커터와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에 맥을 추지 못하자, LA다저스 벤치가 좌타자들을 줄줄이 대타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반전의 계기를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어려웠다.
좌타자들은 몸쪽으로 지저분하게 파고드는 투심 패스트볼에 연신 땅볼만 양산하고 고개를 숙인 채 더그아웃으로 들어가야만 했으니까.
“저 싱커 장난이 아니야. 괜히 비장의 무기라고 말한 게 아니었어.”
“싱커도 좋은데 포심 패스트볼과 커터도 좋으니까 문제지. 그렇다고 스플리터가 투심 패스트볼이 나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스윙을 안 하면…….”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한가운데로 포심을 찔러넣어 루킹 삼진을 잡아내겠지. 젠장. 어쩔 수 없어. 적극적으로 스윙하면서 우리의 생각이 맞기를 바랄 수밖에.”
스윙을 하면 좋은 타구가 나오지 않았고, 스윙을 하지 않으면 루킹 삼진을 당했다. 유현이 KBO리그에서 땅볼 유도를 바탕으로 경기 운용을 할 때 지겹게 나오던 패턴이 다저스타디움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좋은 타이밍에 타격을 했다 생각하는데도 죄다 내야를 벗어나지 못하고 아웃카운트가 되니 LA다저스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콜로라도 로키스 입장에서는 계획한 대로 경기가 잘 풀리고 있었다.
유현은 아쉽게도 타석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삼진만 세 개를 당하며 시종일관 무기력한 모습만을 보여 줬지만 상관없었다.
그 누구도 유현이 타석에서 삼진 세 개를 당했다고 비난하지 않았다.
투수에게 중요한 건 타석이 아니라 마운드다.
7이닝 무실점 완벽투를 보여 준 걸로도 모자라 고작 71구로 투구 수 관리까지 완벽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타석에서의 3연속 삼진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게다가 유현이 타석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음에도 콜로라도 로키스 타자들은 여환진을 상대로 6회까지 2득점을 만들어 냈고, 여환진이 마운드에서 내려간 7회에만 무려 5득점을 하며 빅 이닝을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유현이 마운드에서 버티는 가운데 타선이 어떤 식으로든 결국 득점을 만들어 낸다.
이번 시즌 유현이 등판한 경기에서 전승을 만들어 낸 콜로라도 로키스의 필승 패턴이었다.
-유현 선수가 7이닝 무실점 호투를 하고 마운드에서 내려갑니다. 이미 점수 차가 제법 벌어진 상황이기에 남은 두 이닝을 유현 선수에게 맡기지 않을 생각인 걸로 보입니다.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유현 선수는 지난 등판에서 10이닝을 투구했습니다. 투구 수 관리를 잘했다고는 하지만 매 경기 긴 이닝을 소화하는 투수이니만큼 점수 차가 넉넉하게 벌어져 있을 때는 굳이 9회까지 마운드를 책임지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8회 말.
유현은 마운드에 오르지 않았다.
이미 스코어가 7대0으로 벌어진 상황이기에 코칭스태프가 휴식을 권했고, 유현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불펜이 투입된 것이다.
매 경기 완투승을 하고 완봉승을 하는 것도 좋지만, 상황에 따라 체력 안배를 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투구 수 관리를 잘하긴 했지만 지난 경기에서 10이닝을 투구했기에, 7회까지 무실점으로 막아 준 것만 하더라도 제 몫을 120% 다한 거였다.
-수고했다. 이 정도면 보여줄 수 있는 건 다 보여준 거 같아.
‘이제 다들 머리 좀 복잡해지겠지? 떨어지는 공이 하나 더 추가됐으니까.’
-투구 패턴 단순하다는 말은 절대 안 나오겠지.
‘좋네. 아주 마음에 들어. 시즌 13승보다 그게 더 좋은 거 같아.’
-메이저리그 선발투수 최다 연승이 몇 연승이었더라? 이왕 이렇게 된 거, 최다 연승 기록에도 도전해보는 게 어때?
‘재밌겠네.’
이날.
콜로라도 로키스는 시즌 53번째 승리를 수확하는 데에 성공했다.
유현이 시즌 13승을 달성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 * *
-저거 싱커 맞음?
-ㅇㅇㅇ맞음. 저거 싱커임.
-정확히는 투심 패스트볼인데 싱커처럼 던지는 거임. 유현이 변칙 투구를 위해 그립을 살짝 바꿔서 던진다고 인터뷰한 적이 있음.
-근데 저거 가끔씩 던지고 말지 않았나. 구속은 괜찮게 나오는데 무브먼트가 생각보다 별로고 제구도 잘 안 돼서 안 쓰는 거 같던데?
-겨울에 죽어라 갈고 닦은 듯. 무브먼트가 미쳤던데. 우타자 입장에서는 뚝 떨어지며 바깥쪽으로 휘어져 나가는 공에 좋은 타구를 만들어 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
-난 싱커보다 타자들이 스윙 안 하는 타이밍에 포심 패스트볼 한복판으로 찔러 넣는 게 더 무서운데, 이건 나만 그러냐?
-나도 무서움. 타자들의 심리를 제대로 꿰뚫고 있어야 가능한 거잖아. 실투를 던질 때마다 타자들이 스윙을 참은 게 아니라면 말이야.
-KBO리그의 수준이 낮은 게 아니라 그냥 유현이 괴물같이 잘하는 거였다.
-개소리ㄴㄴ. 유현이 잘하는 건 맞는데, KBO리그의 수준이 낮은 것도 맞음.
-트리플 A에서 통산 방어율 5.15 기록한 투수가 지금 다승 1위에 방어율 1위임. 수준 차이 무엇?
-유현은 탈 크보급 투수라 미쳐 날뛰는 거고, 수준 차이 심한 건 맞음. 야. 근데 이러다가 진짜 0점대 방어율로 시즌 끝내는 거 아님?
-풀타임 선발투수가 0점대 방어율로 시즌 끝낸 적이 있긴 하냐?
-라이브 볼 시대에는 없을 듯.
유현과 여환진의 맞대결.
대한민국의 야구팬들 입장에서는 두 투수가 모두 호투하는 게 최고의 시나리오였고, 여환진이 6이닝 2실점 호투하며 마운드에서 내려갔기에 바람이 어느 정도 충족된 게 사실이다.
다만 스포트라이트는 모두 유현에게 쏠렸다.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이라는 비장의 무기로 LA다저스 타선을 농락하는 유현의 활약에 대한민국의 야구팬들은 열광했다.
현지 언론들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메이저리그 전체 방어율 1위, 다승 1위, 최다 이닝 1위를 내달리고 있는 투수가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 거라고 예고한 채 마운드에 올랐다.
그리고 비장의 무기를 이용해 완벽에 가까운 피칭을 보여 줬다.
“유현 선수. 비장의 무기라고 말했던 구종이 오늘 경기에서 보여 준 싱커가 맞습니까?”
“삼진에 대한 욕심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투수에게 가장 중요한 지표는 방어율이고, 팀의 승리에 도움이 되는 피칭을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등판한 13경기에서 팀이 모두 승리를 챙겼습니다. 제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습니다.”
“메이저리그 구단들은 갈수록 집요하게 유현 선수를 분석하고 약점을 물어뜯으려 할 겁니다. 앞으로도 좋은 모습을 보여 줄 자신 있으십니까?”
“자신 있습니다. 매 경기 최선을 다하는 피칭으로 팀에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콜로라도 로키스는 현재 메이저리그 전체 1위로 순항하고 있습니다. 팀이 이 성적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까?”
“개인적으로는 아메리칸리그 동부 지구 팀들과의 인터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아메리칸리그 동부 팀들이라면 보스턴 레드삭스와 뉴욕 양키스를 의식하고 있는 겁니까?”
“네. 의식하고 있습니다. 만약 정규 시즌의 성적대로 월드 시리즈 진출이 결정된다면, 두 팀 중 한 팀과 월드 시리즈에서 맞대결을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터 리그에서 두 팀을 상대로 상대전적에서 밀리고 싶지 않습니다.”
보스턴 레드삭스와 뉴욕 양키스.
메이저리그 전통의 명문 구단이자 지구 라이벌인 두 팀은 콜로라도 로키스의 뒤를 이어 메이저리그 전체 2위와 3위를 내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보스턴 레드삭스는 2018시즌과 2019시즌, 2년 연속으로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며 자신들의 저력을 입증해보였다.
콜로라도 로키스는 아메리칸리그 동부 팀들과 3경기씩 인터 리그가 예정되어 있고,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경우 각각 6월 중순과 6월 맞에 맞대결이 예정되어 있다.
콜로라도 로키스 입장에서는 월드 시리즈에 올라갈 경우 만날 확률이 가장 높은 두 팀과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고 싶은 게 당연했다.
유현 개인적으로도 의미 있는 매치업이었다.
뉴욕 양키스와는 접점이 없지만, 보스턴 레드삭스에는 유현의 전 동료가 두 명이나 있으니까.
이왕 맞붙는 거 정규 시즌이건 월드 시리즈이건 절대 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대한민국 야구 팬들이 2018시즌부터 심심하면 내던지는 주제의 해답을 제시하고 싶었다.
유현과 강태영이 맞붙으면 누가 이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