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120화 (120/155)

120화 비장의 무기 (1)

LA다저스.

2013시즌부터 2018시즌까지 줄곧 지구 1위를 차지했으며, 콜로라도 로키스에게 지구 1위를 내준 2019시즌에도 와일드카드를 통해 결국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던 내셔널리그 서부지구의 명문 인기 구단.

지구 1위 탈환을 목표로 하며 2020시즌을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쉽지 않았다.

LA다저스의 7년 연속 지구 1위를 저지한 콜로라도 로키스가 시즌 초부터 역대급 시즌을 만들어 낼 기세로 승수를 쌓아나가고 있었으니까.

6월 9일.

다저스타디움에서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3연전을 치르기 전까지 LA다저스는 67경기에서 44승 23패를 기록하며 지구 2위, 와일드카드 결정전 1위로 콜로라도 로키스를 추격하고 있었다.

콜로라도 로키스가 67경기에서 52승 15패로 메이저리그 전체 1위로 순항하고 있어 격차가 큰 것처럼 보이지만, LA다저스가 기록하고 있는 성적이 결코 나쁜 건 아니었다.

때문에 콜로라도 로키스는 제법 격차가 나고 있음에도 LA다저스를 경계했다.

LA다저스는 최근 몇 년 동안 전반기에 부진한 모습을 보이다가 후반기에 기적적인 연승 행진을 내달리는 패턴을 더러 보여 줬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입장에서는 2018시즌에 치열한 순위 싸움을 하다가 결국 타이브레이커까지 가는 접전 끝에 1위를 내준 쓰디 쓴 경험을 해보지 않았던가.

LA다저스의 후반기 강세를 감안했을 때 전반기 분위기가 좋다고 보는 게 옳았다.

그래서 LA다저스와의 맞대결이 더욱 중요했다.

등판 전날.

유현은 여환진과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여환진이 자주 가는 한인타운의 식당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인터뷰 봤다. 너 내일 비장의 무기 쓸 거라며?”

“네. 아마도요?”

“시즌 전에 도대체 얼마나 준비를 한 거야? 제구 가다듬은 것만 하더라도 엄청난 건데 거기에 새 구종까지? 혹시 전에 사용하던 구종들 중 하나를 가다듬은 거야?”

“에이. 그걸 말해 주면 비장의 무기가 아니죠.”

“젠장. 꼭 내일 써야 되냐? 다른 날 공개하면 안 돼? 나랑 맞대결할 때 그런 거 하지 말라고.”

“아, 혹시 이거 뇌물입니까?”

“그래, 인마. 좀 살살하라고 바치는 뇌물이다.”

“흐흐흐. 네. 내일은 10이닝 안 던지겠습니다.”

친분은 친분이고, 일은 일이다.

어째 LA다저스를 상대로 등판할 때마다 여환진과 맞대결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살살 던질 수는 없었다.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인터리그에서 비장의 무기를 처음으로 공개할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었다.

최악의 시즌을 보내고 있는 뉴욕 메츠가 물고 늘어질 정도라면, 다른 팀들 또한 이미 투구 패턴을 파악하고 자신들만의 공략법을 어느 정도 준비했다고 봐야 하니까.

LA다저스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상대가 공략법을 준비해 온 이상, 유현의 입장에서는 그 공략법을 무효화시켜야만 했다.

그렇게 다저스타디움에서의 등판일이 다가왔다.

* * *

결과적으로 유현은 뉴욕 메츠와의 경기에서 많은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일단은 메이저리그의 분석력에 감탄했다.

언젠가는 자신의 투구 패턴이 분석당할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이렇게 빨리 패턴을 파악하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팀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아마 앞으로는 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팀들이 많을 터였다. 임기응변도 한두 번이지 계속해서 통하기를 바랄 순 없었다.

그럼에도 유현은 자신감을 얻었다.

철저하게 분석한다 해서 공략하기 쉬운 공이 아니라는 걸 뉴욕 메츠 타자들과의 싸움에서 확실하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비장의 무기까지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면 경이로운 시즌을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는 확신을 품게 됐다.

LA다저스는 유현을 상대하기 위해 우타자 일색의 라인업을 준비했다. 뉴욕 메츠가 유현을 상대하는 걸 보고서 우타자 일색 라인업이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판단을 내린 것 같았다.

유현은 라인업을 확인하고서 혀를 찼다.

뉴욕 메츠가 유현을 어느 정도 공략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던 건 우타자 일색 라인업 덕분이라기보다는, 전력분석을 잘한 것과 유현이 맞춰 잡는 피칭을 하며 안타를 많이 허용해서였다.

실제로 뉴욕 메츠는 1회 초의 득점 이후 유현에게 10회까지 득점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끝내기 안타를 허용하며 패배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뉴욕 메츠의 경우 우타자들의 타율이 좌타자들보다 좋았던 것과 달리, LA다저스는 딱히 우타자들의 타율이 좋은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좌우놀이로 보였다.

-좌타자로는 널 상대로 득점을 만들어 낼 가능성이 너무 낮다고 판단한 거겠지. 투심 패스트볼보다는 커터가 그나마 공략하기 쉬울 거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르고.

‘흐음. 둘 다 어렵지 않나?’

-둘 다 어렵지만 우타자 쪽이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건 사실이잖아?

‘좌타자보단 낫긴 하지. 그런데 어떻게 하냐. 오늘의 메인은 커터가 아닌데.’

-타자들의 표정이 볼만하겠군.

‘비장의 무기는 그 맛에 쓰는 거 아니겠어?’

1회 초.

콜로라도 로키스 타자들은 1회 초에 흔들리는 경향이 있는 여환진을 상대해 찰리 블랙몬과 놀란 아레나도의 연속 2루타로 1득점을 만들어냈지만, 아쉽게도 추가 득점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어쨌거나 타선은 1회 초부터 득점 지원에 성공했고, 팀이 리드를 잡은 상황에서 유현이 마운드에 올랐다.

유현은 손쉽게 세 타자를 모두 잡아냈다.

하지만 이전과 다를 건 없었다.

존 안으로 들어오는 패스트볼 3종 세트, 스트라이크를 유도할 때는 뚝 떨어지는 스플리터와 몸쪽 하이 패스트볼을 구사했다.

첫 이닝을 삼자범퇴로 무기력하게 끝마친 LA다저스 타자들이 유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비장의 무기니 뭐니 하면서 떠들더니만 전력 분석이랑 다를 게 없는데? 페이크 아냐?”

“심리전을 걸려고 한 걸지도 몰라.”

“패턴이 똑같으면 우리 입장에서야 고맙지.”

“좋아. 2회에는 좀 더 적극적으로 공격해 보자고. 그럼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겠지.”

2회 말.

5번 타자 코디 벨린저가 중전 안타로 출루를 한 상황에서 6번 타자 키케 에르난데스가 타석에 들어섰다.

1사 1루의 찬스에서 키케 에르넨데스는 무려 두 번이나 스플리터에 속지 않으며 카운트를 2스트라이크 2볼까지 끌고 갔다.

승부처에서 유현은 땅볼 유도를 하려고 할까, 아니면 다시 한 번 삼진을 유도할까?

키케 에르난데스의 선택은 후자였다.

스플리터를 두 개나 던졌지만 반응하지 않았으니 하이 패스트볼이 들어올 만도 하건만, 키케 에르난데스는 또다시 스플리터가 들어올 거라 예상하고 타석에 임했다.

타자의 허를 찌르는 피칭을 즐겨 하는 유현의 성격상 하이 패스트볼을 던지지 않을 거라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맞았다.

아니, 맞아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존 언저리에서 떨어지던 공이 바깥쪽으로 휘어나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이다.

딱!

타격을 하긴 했지만 배트 끝에 맞으며 유격수 방향으로 흐르는 땅볼 타구가 되고 말았다.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앞으로 재빨리 뛰어나온 유격수 트레버 스토리가 2루로 송구, 이어 2루수 헨리 곤잘레스가 1루로 송구했다.

키케 에르난데스가 전력질주를 해보았지만 헨리 곤잘레스의 송구가 더 빨랐다.

6-4-3병살타.

위기를 벗어나고 무덤덤하게 더그아웃으로 향한 유현과 달리, 키케 아르난데스는 1루 베이스에서 한참 동안 유현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

유현은 전력분석에 없던 공을 던졌다.

정확히는 전력분석에 있으나 메이저리그 진출 후 단 한 번도 투구하지 않았던, 그래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구종이었다.

“……싱커?”

* * *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

KBO리그에서 간간이 던지던 구종이지만, 주 무기로 사용하지는 않았던 구종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용할 수 없었다.

패스트볼 3종 세트에 비해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의 무브먼트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고, 제구 또한 완벽하지 않았으니까.

유현은 브레이킹 볼과 오프 스피드 피치를 던지지 않는다. 가끔씩 커브를 섞어 던지기는 했지만 보여 주는 구종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이후에는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

패스트볼 4종 세트는 위력적이지만 브레이킹 볼이 없다 보니 상대적으로 투구 패턴이 단조롭다는 단점 또한 존재한다.

KBO리그에서야 유현이 던지고 싶은 대로 던져도 공략이 불가능했지만 메이저리그는 다르다. 수준급 성적을 낼 순 있겠지만 반박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성적을 내긴 어려울 거라는 게 봉식이의 솔직한 생각이었다.

그래서 유현은 더욱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했다.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을 제대로 가다듬어서 주 무기로 끌어 올릴 수만 있다면?

스플리터와 함께 떨어지는 공이 하나 늘어나게 되고, 이는 곧 투구 패턴의 다양화로 이어진다. 포기할 수 없는 매력적인 카드였다.

하지만.

스프링 트레이닝에 참여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유현은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의 장착을 사실상 포기하고 있었다.

비시즌 내내 죽어라 노력해 봤지만 성과를 보지 못했다. 온갖 방법을 다 시도해 봤지만 좀처럼 구위와 제구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랬던 유현이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을 장착할 수 있었던 건 투수코치 덕분이었다.

“그립을 살짝 바꿔보는 건 어떨까?”

“그립을 바꿔요?”

“응. 내가 현역 때 던졌던 투심 패스트볼이 싱커처럼 떨어졌거든. 가르쳐 줄 테니까 손에 맞는지 한 번 써봐. 보편적인 투심 패스트볼 그립이랑 큰 차이가 없어서 어렵진 않을 거야.”

“으음. 일단 가르쳐주세요.”

그립을 배울 때까지만 하더라도 유현은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봉식이는 투심 패스트볼 그립을 가르쳐 준 것에서 자신이 할 일은 다 했고,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을 가다듬는 건 유현이 직접 해야 하는 일이라며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투수코치로부터 투심 패스트볼 그립을 배웠을 때만큼은 달랐다.

-손에 맞는 거 같아?

‘으음. 아니. 조금 어색하고 불편해. 내가 쓰던 그립이 아니라서 그런가 봐.’

-내가 가르쳐 준 그립과 투수코치가 가르쳐 준 그립의 중간 정도로 생각하고, 스플리터를 던진다는 느낌으로 던져봐.

‘오케이. 그렇게 해볼게.’

봉식이의 조언을 받아들여 기존의 투심 패스트볼 그립과 투수 코치가 가르쳐준 그립의 중간 형태로, 스플리터를 던진다는 느낌으로 볼펜 포수를 향해 공을 뿌려보았다.

5구를 연속으로 던졌을 때 유현은 확신했다.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에 대한 해답을 마침내 찾아냈다고, 투수코치가 가르쳐 준 그립이 신의 한 수가 됐다고 말이다.

두 가지 그립의 중간 형태를 취하자 무브먼트와 제구가 눈에 띄게 괜찮아졌다.

유현의 투구를 지켜보던 투수코치 또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잘 가다듬으면 실전에서 충분히 통하겠는데? 이전보다 무브먼트가 확실히 살아났어.”

“제구도 더 잘 되는 느낌이에요.”

“좋아. 벽에 부딪히기 전까지 꾸준히 연습하면서 최고의 무기로 만들어보자고.”

그때부터 유현은 불펜에서만 간간이 체크를 할 뿐, 연습경기에서조차 공개를 하지 않은 채 남몰래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을 가다듬었다.

그립의 변화로 발전의 계기를 찾았으니 이제는 죽어라 노력하며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유현은 투심 패스트볼을 두 가지로 분리하는 데에 성공했다.

싱커성 투심 패스트볼로 병살타를 유도하는 걸 확인한 봉식은, 유현이 더그아웃으로 들어온 뒤 머리 위에서 내려오며 말을 걸었다.

-싱커 괜찮네.

‘응. 무브먼트 좋고 제구도 괜찮았어. 이제 투구 패턴 단조롭다는 이야기가 안 나오겠지. 싱커 하나만으로 경우의 수가 확 늘어나게 되니까.’

-걱정했는데 편하게 더그아웃에서 경기를 봐도 되겠어. 좋아. 모처럼 한 번 물어볼까? 오늘의 목표는 뭐야?

‘타구가 내야를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

오늘.

유현은 비장의 무기와 함께 LA다저스 타자들이 공포를 느낄 정도로 집요한 그라운드 볼러가 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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