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분석 같은 소리 (3)
유현이 1회 초에 실점할 때도, 이후 안정적으로 이닝을 끌어나갈 때도, 그러다가 9회까지 계속해서 선두타자를 출루시킬 때도.
봉식이는 여유롭게 경기를 지켜보았다.
옆에서 함께 해바라기 씨를 까먹고 있는 스칼렛이 불안해하는 것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봉식 씨는 걱정이 안 되나 보네요.
-잘 던지고 있는데 걱정하면 안 되죠.
-병살타로 실점을 허용하지 않고 있긴 한데, 선두타자에게 계속 안타를 허용하고 있는 걸 보면 조금 불안해 보이는데요.
-저거 일부러 저러는 거예요.
스칼렛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계속해서 선두타자 안타를 허용하며 일부러 실점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부러 저러는 거라고요?
-네. 투구 수 관리 편하게 하고, 뉴욕 메츠 타자들 방심하게 만들려고요. 안타는 허용하되 장타를 허용하지 않을 수 있고, 주자가 나가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땅볼을 유도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안타를 허용한 것치고는 투구 수 관리를 효율적으로 하며 긴 이닝을 끌고 갈 수 있겠죠. 수비의 도움만 제대로 받는다면 실점 또한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요.
-네. 저 녀석은 그럴 자신이 있으니까 저러는 거예요. 다른 투수였다면 우타자 일색 라인업이 어느 정도 효과를 봤을지도 모르지만, 커터의 무브먼트와 제구가 사기인 녀석한테는 안 통해요.
KBO리그에서 2년 동안 머리 위에서 유현을 지켜본 봉식은, 유현이 일부러 선두타자를 출루시키고 있다는 걸 제대로 간파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라고 가르친 게 봉식이니까.
커터와 투심 패스트볼이 잘 들어가는 날에는 억지로 삼진을 잡으려 들 필요가 없었다. 땅볼 유도만 적절하게 해 줘도 알아서 무너진다.
안타를 치면서 자신감이 붙은 타자들은 언터쳐블인 투수를 공략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적극적인 스윙을 하게 되고, 덕분에 유현은 손쉽게 투구 수 관리를 하면서 긴 이닝을 어렵지 않고 끌고 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선두타자 출루가 중요했다.
선두타자를 출루시키고 병살타로 아웃카운트 두 개를 손쉽게 잡아내는 게 포인트였다.
경기는 유현의 의도대로 흘러갔다.
9회까지 86구.
완벽한 투구 수 관리를 한 유현은 당당히 10회 초에도 마운드에 올랐다.
지난 3연전에서 불펜 소모가 많았던 콜로라도 로키스 입장에서는 유현이 최대한 긴 이닝을 소화해주길 바랐고, 9회 초까지 86구로 투구 수 관리를 잘 한 상황에서 10회 초 등판을 말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마운드에 오르기 전.
유현은 투수코치와 짧게 대화를 나눴다.
“이제 슬슬 눈치챘겠죠?”
“마운드에 오르면 100% 깨닫겠지. 뭐…… 눈치채 봐야 이미 늦었지만. 아 참, 오늘 사용한 방법은 임기응변인 거 알지?”
“네. 아마 다음 경기에서는 그걸 꺼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슬슬 타이밍이 됐어. 너무 아끼는 것만이 답은 아니니까 잘 생각해 봐.”
“네. 그럴게요.”
사인 없이 투구를 하면서 뉴욕 메츠의 노림수를 벗어나긴 했지만, 이런 식의 투구는 결국에는 임기응변에 지나지 않는다.
단조로운 투구 패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같은 일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유현이 매 경기, 상황에 따라 타순이 돌 때마다 투구 패턴에 변화를 주며 타자들을 효율적으로 상대해 왔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결국 스플리터와 하이 패스트볼을 제외한 모든 구종을 스트라이크 존에 집어넣는 건 똑같았다. 어떤 구종으로 스트라이크를 잡고 어떤 구종을 결정구를 쓸지만 다를 뿐이었다.
그것만 제대로 읽어 낼 수 있다면 유현을 공략하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KBO리그에서는 유현의 패스트볼 3종 세트에 제대로 대처하는 선수들이 없어 불가능했지만, 메이저리그에서는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걸 오늘 경기에서 뉴욕 메츠 타자들이 보여 줬다.
유현은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란 걸 느꼈다.
이대로 시즌을 보내도 1점대 방어율을 기록하는 건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유현의 목표는 1점대가 아닌 0점대 방어율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완벽해질 필요가 있었다.
시즌 전에 죽어라 준비한 비장의 무기를 슬슬 꺼낼 타이밍이 됐다는 걸 느꼈다.
물론 그건 그거고…….
일단 뉴욕 메츠 타자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투수인지 보여줄 필요성을 느꼈다.
마운드에 오른 유현이 곁눈질로 슬쩍 뉴욕 메츠의 더그아웃을 바라보았다. 타격코치를 중심으로 소란스러운 게 슬슬 선두타자 출루가 의도된 작전이었다는 걸 깨달은 눈치였다.
뭐, 깨달아봐야 이미 늦었지만 말이다.
* * *
오늘 경기에서 유현은 하이 패스트볼을 거의 던지지 않았다. 안타를 허용하기 위해 바깥쪽에 찔러 넣는 용도로 포심 패스트볼을 사용했지, 삼진을 잡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이는 다분히 의도된 행동이었다.
화려한 피날레를 위해 타자들이 하이 패스트볼을 의식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 대신 커터로 인해 땅볼이 계속해서 나오는 걸 경계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그 결과.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하이 패스트볼을 결정구로 세 타자 연속 탈삼진을 잡아낸 유현이 어퍼컷 세레모니를 하며 마운드에서 당당하게 내려왔다.
투구 수는 104구.
최고의 투구 수 관리를 보여 주며 10이닝을 책임진 유현은, 더그아웃으로 들어갔음에도 휴식을 취하지 않았다.
가볍게 몸을 풀며 경기를 지켜봤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불펜에서는 몸을 풀고 있는 투수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여차하면 11회 초에도 마운드에 오를 기세였다.
물론 이는 유현과 콜로라도 로키스가 임기응변으로 준비한 작전의 일환이었다.
콜로라도 로키스가 지명하고 키워 낸 프랜차이즈 투수 중 한 명은 몸을 제대로 풀지 않고 마운드에 올라도 전력투구를 할 수 있다.
오히려 불펜에서 몸을 푸는 게 그에게는 독으로 작용했다.
타고난 체력이 좋지 않은 편이라 불펜 투구를 하며 투구 수를 낭비하느니, 마운드에 올라 전력투구를 하는 걸 택했다.
철저하게 관리를 해줘야 하고 연투가 어렵지만, 대신 관리만 잘해 주면 접전에서 확실하게 믿고 맡길 수 있는 투수이기도 했다.
뉴욕 메츠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단지 유현이 11회 초에도 마운드에 오를 것처럼 행동하고 있으니, 정말로 유현이 11회 초에도 등판할 거라고 받아들이는 거였다.
차분하게 생각할 정신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10이닝 1실점 피칭을 한 투수가 11회 초에도 마운드에 오를 것처럼 몸을 풀고 있는데 정상적인 생각을 할 수 있을 리가 있겠는가.
10회 말.
1대1의 팽팽한 승부 속에서 부담감을 잔뜩 안은 채 뉴욕 메츠의 필승조가 마운드에 올랐다.
그의 시선은 콜로라도 로키스의 더그아웃, 정확히는 아이싱을 하지 않은 채 몸을 움직이며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유현에게로 향했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불펜에는 단 한 명의 투수도 대기하고 있지 않은 상황.
꿀꺽.
뉴욕 메츠의 필승조가 마른침을 삼켰다.
여기서 실점하면 안 된다, 끝내기를 허용하는 순간 10이닝 무실점 피칭이 나온 경기의 패전투수로 내 이름이 계속 언급될 거다, 이번 이닝만큼은 확실하게 책임져야 한다.
투수가 전력투구를 다짐했지만…….
딱!
힘이 과도하게 들어가며 무브먼트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밋밋한 투심 패스트볼이 한가운데로 몰리는 최악의 실투가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오늘 경기 내내 사인 없이 유현의 공을 잘 받아 준 마크 번칠은, 유현을 승리투수로 만들어 줄 시원한 한 방을 터트렸다.
단 1구.
팽팽했던 승부의 무게추가 기우는 데에는 단 1구면 충분했다.
-끝내기이이이이이! 마크 번칠의 끝내기 홈런! 콜로라도 로키스가 연장 10회 말 시원한 한 방으로 승리를 쟁취합니다! 유현 선수가 시즌 12번째 등판에서 10이닝 1실점 완투승으로 시즌 12승 수확에 성공합니다.
-과연 유현 선수는 11회 초에도 마운드에 올랐을까요?
-제 생각에는 그러지 않았으리라고 봅니다. 로키스는 몸을 풀지 않고 마운드에 오르는 필승조를 한 명 보유하고 있거든요. 아마 그 투수가 11회 초에 마운드에 올랐을 겁니다.
-그럼 더그아웃 앞에서 몸을 푼 건……
-상대 투수를 조급하게 만들기 위해 심리전을 한 거라고 봅니다. 결과적으로 초구에 끝내기 홈런이 나오면서 제대로 먹혀 들었고요.
마크 번칠의 시즌 9호 홈런이 중요한 상황에서 임팩트있게 터졌다.
콜로라도 로키스 선수들이 모두 더그아웃에서 뛰어나와 마크 번칠의 머리를 사정없이 두들겼다. 유현 또한 선수단 사이에서 기분 좋게 마크 번칠의 머리를 가격하며 시즌 12승을 축하받았다.
경기가 끝난 뒤.
유현은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질문 세례를 받았다. 역시나 기자들이 가장 궁금해 한 건 11회 초의 등판 여부였다.
“유현 선수. 만약 10회 말에 득점이 나오지 않았다면 11회 초에도 마운드에 오를 생각이었습니까?”
“네. 올랐을 겁니다. 팀이 원한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미친놈이거든요.”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10회 초야 투구 수 때문에 그러려니 할 수 있어도, 만약 11회 초에도 마운드에 올랐다면 혹사 논란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유현은 최대한 효율적으로 투구 수 관리를 하며 긴 이닝을 소화했고, 경기의 흐름에 따라 예상보다 빨리 마운드에서 내려온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많은 이닝을 소화하고 있는 투수였다.
120구 가까이 투구하며 11회 초까지 책임졌더라면 언론들은 유현의 환상적인 투구 수 관리가 아닌, 유현 한 명에게 11이닝을 맡긴 콜로라도 로키스의 마운드 운용에 대해 비난할 가능성이 높았다.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이유는 없었다.
포스트시즌이라면 모를까.
“그 무슨 짓에 대타로 타석에 서는 것, 혹은 타자로 선발 출장하는 것 또한 포장되어 있습니까? 유현 선수는 오늘 경기에서 안타 하나와 도루 두 개를 추가했고, 팬들은 투수가 도루왕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를 품고 있습니다.”
“그건 감독님만이 아시겠죠. 한 가지 확실한 건, 팀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식의 기용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겁니다.”
유현은 투수가 아닌 타자로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타석에 서면 어떻게든지 출루를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출루를 하면 리드폭을 넓게 잡은 채 상대 배터리를 흔들었다.
그래서 팬들은 유현에게 기대를 했다.
이도류 열풍을 일으켰던 일본 국적의 한 선수처럼, 인터 리그 때 유현이 지명타자로 타석에 서는 걸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실제로 해설위원들은 유현의 타격 실력에 대해서 제법 좋은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준수한 컨텍과 선구안을 지녔다나 뭐라나.
다만 유현이 지금 당장 지명타자로 타석에 설 일은 없었다. 아무리 체력이 좋은 선수라지만 162경기를 치러야 하는 정규 시즌에 굳이 체력을 낭비시킬 이유는 없었으니까.
아, 물론.
팀이 원한다면 할 생각이 있었지만 말이다.
인터뷰 막바지.
유현은 투수코치와의 상의하에 준비한 회심의 멘트를 조심스럽게 꺼내놓았다.
“다음 경기부터는 슬슬 비장의 무기를 꺼내려고 합니다.”
“새 구종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써먹기도 전에 노출을 시키면 안 되겠죠? 다음 등판을 보시면 제가 준비한 무기가 무엇인지 아시게 될 겁니다.”
다음 등판.
유현이 비장의 무기를 사용하며 변화를 할 거라고 예고했다.
그리고 로테이션상 유현이 다음 등판에서 상대해야 할 팀은 LA다저스,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1위 자리를 바짝 추격하고 있는 지구 라이벌 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