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118화 (118/155)

118화 분석 같은 소리 (2)

상대편 투수에게 기습 번트로 내야 안타를 허용하고 연속 도루까지 허용한 상황.

투수의 멘탈이 흔들리기에 충분했다.

포수가 다급히 마운드에 올랐다. 혹여나 멘탈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급이 제이콥 디그롬을 진정시킬 생각이었지만…….

“신경 쓰지 마. 1점 내준다고 해서 지는 것도 아니잖아. 앞으로 잘 틀어막으면 돼.”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유현이 웬만한 상황에서도 멘탈이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제이콥 디그롬 또한 웬만한 상황에서는 흔들리지 않는 강철 멘탈의 소유자였다.

1사 3루.

유현의 빠른 발을 감안했을 때 외야로 공이 뜨거나 어정쩡한 땅볼이 나오면 홈 베이스를 밟을 가능성이 높고, 콜로라도 로키스는 제법 괜찮은 팀 배팅을 할 줄 아는 팀이다.

실점 가능성이 높은 상황임에도 제이콥 디그롬은 냉정하게 판단했다.

쿠어스 필드에서는 타자를 힘으로 찍어 누르려고 하면 안 된다. 앞서 잡은 삼진들 모두 타자들과의 심리전에서 우위를 점하며 잡아낸 거지, 구위로 찍어 누르며 잡아낸 게 아니었다.

주자가 있는 상황이라 해서 다를 건 없었다.

억지로 삼진을 잡기보단 타자들이 까다로워하는 코스로 공을 집어넣고, 아웃카운트와 실점을 맞바꾸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다.

하지만 역전은 안 된다.

동점은 허용하되 역전은 내주지 않고 유현과 대등한 피칭을 이어 나간다. 설사 연장전에 가더라도 자신은 9회까지 어떻게든 틀어막아 준다.

제이콥 디그롬은 유현을 인정하고 있었다.

지난 2년 동안 리그를 지배했던 자신보다 첫 11경기에서 좋은 투구를 보여 준 투수를 존중했다. 운이 따른다면 이기고, 이기는 게 힘들면 대등한 피칭을 하는 걸 목표로 삼았다.

딱!

2스트라이크 1볼 상황.

결국 유현이 희생 플라이를 통해 홈베이스를 밟으며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려놓았다.

다음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우긴 했지만 동점을 허용하고 만 상황 속에서, 뉴욕 메츠의 더그아웃이 분주해졌다.

제이콥 디그롬.

2년 연속 내셔널리그 사이영 상을 수상했지만, 2년 연속으로 규정 이닝을 채운 선발투수들 중 가장 적은 득점 지원을 받았던 투수.

이번 시즌에도 제대로 된 득점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팀의 에이스를 위해 타자들은 어떻게든지 득점을 쥐어짜려 안간힘을 썼다.

뉴욕 메츠의 타자들은 유현을 상대로 6회 초와 7회 초에 다시 안타를 만들어 냈다. 팀 타율 최하위인 팀이 메이저리그 방어율 1위인 선수를 상대로 꾸준히 안타를 기록한다는 건 분명 의미 있는 일이었다.

심지어 선두타자 안타가 터진 거였다.

안타를 기록할 때마다 뉴욕 메츠 타자들의 자신감이 한껏 고무됐다. 유현을 상대로 추가 득점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방어율 1위라고 해서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별 거 아닌 거 같은데? 오프 스피드도 없고, 변화구가 확실한 것도 아니라 타이밍만 제대로 잡으면 생각보다 공략할 만해.”

“욕심내지 말자. 제이콥이 잘해 주고 있으니까 1점만 더 내자고. 출루하고 쥐어짜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좋아. 오늘은 꼭 제이콥을 승리투수로 만들어 주자고. 우린 할 수 있어!”

유현은 투구의 70퍼센트 이상을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집어넣으며 극단적으로 공격적인 투구를 하는 투수다. 볼의 3분의 2가 하이 패스트볼과 스플리터라는 걸 감안했을 때, 사실상 모든 공으로 스트라이크를 잡으려 한다고 보면 된다.

공격적인 투구는 투구 수를 줄이고 타자를 효율적으로 잡을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하지만, 잘 풀리지 않았을 땐 난타를 당하기도 한다.

뉴욕 메츠 타자들이 원하는 건 후자였다.

전력분석을 바탕으로 타이밍과 구종을 읽고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들어오는 패스트볼 3종 세트를 공략해 유현을 끌어 내리는 거였지만…….

유현은 그들이 전력분석을 바탕으로 안간힘을 쓴다 해서 쉽게 공략할 수 있는 투수가 아니었다.

6회 초와 7회 초에 선두타자 안타를 기록했지만 그 뒤에 병살타가 나오며 아쉽게도 득점 기회가 무산되고 말았다.

8회 초.

다시 한 번 선두타자 안타를 기록하며 출루에 성공하자 뉴욕 메츠의 벤츠에서 분주하게 사인이 나오기 시작했다.

앞선 두 이닝에서 선두타자가 출루했음에도 병살타가 나오며 득점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몸쪽으로 구사되는 유현의 커터를 우타자들이 스윙하면 배트 안쪽에 맞다 보니 좋은 타구를 만드는 게 어려웠다.

위기 상황에서 유현이 커터를 구사할 게 뻔하니, 도루로 주자를 스코어링 포지션으로 보낸 뒤 연속 희생타로 1득점을 하겠다는 거였다.

일단 스코어를 2대1로 뒤집은 뒤에는 제이콥 디그롬을 최대한 길게 끌고 가면서 남은 이닝은 불펜을 총동원하면 된다고 봤다.

오늘 경기에서 뉴욕 메츠 타자들은 단 한 번도 도루 시도를 하지 않았다. 애초에 팀 컬러 자체가 도루를 많이 시도하지 않는 편이었다.

뜬금없는 타이밍에 도루 시도가, 그것도 초구에 나온다면 충분히 허를 찌를 만한 작전이었다.

문제는…….

유현과 마크 번칠 배터리가 노림수를 제대로 읽고 초구부터 피치아웃을 했다는 거였다.

-피치아웃! 피치아웃이 나왔어요! 로키스의 배터리가 뉴욕 메츠의 작전을 제대로 간파했습니다! 주자가 허무하게 2루에서 아웃됩니다! 무사 1루의 찬스에 또 다시 이렇게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뉴욕 메츠 타자들은 오늘 유현 선수를 상대로 7개의 안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찬스 상황에서 계속 흐름이 끊기며 득점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병살타가 무려 네 개나 나왔습니다. 허를 찌른 도루 시도는 상대 배터리에게 제대로 간파당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경기, 양 팀 모두 득점을 올리기 쉽지 않을 거 같습니다.

-연장전으로 갈 수도 있겠는데요.

-네. 연장으로 가면 로키스의 승률이 좀 더 높을 거라고 봅니다. 이번 시즌, 로키스는 다섯 번의 연장전에서 모두 승리했거든요.

유현 입장에선 사실 뻔하디 뻔한 작전이었다.

KBO리그에서 뛸 당시 유현을 상대하는 대부분의 팀들은 어떻게든지 1점 1점을 쥐어짜는 방향으로 경기를 풀어 나가려고 했다.

그때마다 지겹도록 보는 게 번트와 도루였고, 초구에 기습 도루를 시도한다면 배터리의 허를 찌르기 좋은 게 사실이다.

대비를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유현은 초구에 피치아웃을 하더라도 카운트를 유리하게 잡아나갈 수 있는 투수다. 초구에 피치아웃을 하며 도루를 견제하는 순간, 도루 성공률은 뚝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뉴욕 메츠는 다시 한 번 천금 같은 득점 찬스를 놓치고 말았다.

9회 초.

다시 한 번 선두타자가 출루했고, 뉴욕 메츠 벤치는 커터를 의식해서 좌타자를 대타로 기용하는 승부수를 뒀지만…….

-아아아. 또다시 병살타가 나오며 뉴욕 메츠가 찬스를 잡지 못합니다.

-오늘 경기에서 커터가 워낙 좋다 보니 잊고 있나 본데, 유현 선수의 투심 패스트볼은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많은 땅볼을 유도한 구종입니다. 어쩌면 커터보다 더 무서운 구종이에요.

-특히나 좌타자에게는 악몽 그 자체죠.

-맞습니다. 우타자들이 커터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것처럼, 좌타자들은 투심 패스트볼에 치를 떨 겁니다. 좌우놀이가 무의미하다고 보면 됩니다.

다섯 번째 병살타.

또다시 흐름이 끊기고 만 상황에서 제이콥 디그롬은 무덤덤하게 마운드에 올랐다.

여전히 스코어는 1대1.

1회 초에 쥐어짠 득점이 아니었다면 완투패를 할 수도 있었다. 수많은 찬스가 다섯 번의 병살타와 한 번의 도루 실패로 무산되지만 않았다면, 단 한 번만 기회를 살렸더라도 시즌 세 번째 완투승을 수확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모두 결과론일 뿐이다.

스코어는 1대1이고, 9회 말의 아웃카운트 세 개를 잡아내지 못한다면 완투패를 당할 수도 있는 게 눈앞에 닥친 현실이다.

8회 말까지 기록한 투구 수는 101구.

슬슬 구속이 떨어질 타이밍이 됐지만 제이콥 디그롬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구속보다는 제구에 신경 쓰며, 원하는 코스에 정확히 공을 집어넣는 것을 목표로 삼고 투구했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세 타자 연속 탈삼진.

쿠어스 필드에서 무려 18탈삼진을 잡아내는 기염을 토하며, 제이콥 디그롭이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벽하게 끝마쳤다.

더그아웃으로 들어와 아이싱을 하는 그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승패가 갈리지는 않았지만 9회까지 유현과 대등한 피칭을 펼쳤다. 이 정도면 선발투수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 같았다.

할 일은 모두 다 끝났다.

이제 남은 건 불펜 싸움이다. 어느 팀의 타자들이 연장에서 더 좋은 집중력을 보여줄 수 있느냐의 싸움이라고 봐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Oh my god! 제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건가요?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습니까?

-저희의 눈이 같이 이상해진 게 아니라면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유현! 유현 선수가 10회 초에도 마운드에 올랐습니다! 중간계투로 등판하는 게 아닙니다! 1회부터 줄곧 로키스의 마운드를 홀로 지키고 있습니다!

-선발투수가 10회까지 책임지는 걸 언제 마지막으로 봤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쿠어스 필드가 들썩이고 있습니다!

제이콥 디그롭은 자신이 생각한 것 중에 한 가지 틀렸다는 걸, 유현과 대등한 피칭을 펼친 게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10회 초.

유현이 다시 한 번 마운드에 올랐으니까.

* * *

9회 초 찬스가 다시 한 번 병살타로 무산됐을 때, 뉴욕 메츠의 몇몇 선수들과 타격 코치의 머릿속에는 의문이 떠올랐다.

6회부터 9회까지.

뉴욕 메츠의 선두타자들은 모두 안타를 기록하며 나갔고, 그럴 때마다 기가 막힌 커터와 투심 패스트볼로 인해 병살타가 나왔다.

분명 유현에 대해 제대로 분석했다 생각했고, 중간에 잠깐 끊기긴 했지만 계획대로 계속해서 찬스를 잡아 나갔다.

하지만 어째서 1회 이후로 득점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는 걸까?

뭐가 문제인 걸까?

경기를 검토하며 문제점을 찾아내기 위해 고민하던 타격 코치는, 유현의 피칭에서 뭔가 이질적인 부분을 찾아냈다.

유현이 선두타자에게 안타를 허용했을 때는 모두 초구 아니면 2구를 공략 당했고, 죄다 바깥쪽 어정쩡한 코스로 포심 패스트볼을 던졌다.

그리고 그때를 제외하면, 유현은 포심 패스트볼을 존안으로 절대 집어넣지 않았다. 하이 패스트볼을 간간이 집어넣긴 했지만 커터와 투심 패스트볼 위주의 땅볼 유도를 주 무기로 삼아 경기를 풀어나갔다.

계속 땅볼 유도 위주로 경기를 풀어 나간 투수가 어째서 선두타자가 나왔을 때만 타순에 관계없이 포심 패스트볼을 던지다 안타를 맞은 걸까?

타격코치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이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투구 수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병살타를 유도해 최소한의 투구 수로 아웃카운트 두 개를 잡아내기 위해 포심 패스트볼을 던졌다.

그게 아니라면 계속해서 포심 패스트볼을 같은 코스로 던진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웠다.

타격코치가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멍청하게 학습효과 없이 바깥쪽으로 포심 패스트볼을 계속 던진다고 비웃었지만, 학습 효과가 없는 건 유현이 아니라 자신들이었다.

선두타자 출루라는 달콤한 꿀에 취해 그 뒤에 숨겨진 상대 배터리의 의도를 읽지 못했다.

10회 초 마운드에 오른 유현이 9회까지 기록한 투구 수는 고작 86구.

뉴욕 메츠 타자들의 적극적인 공격 시도는, 결과적으로 유현이 10회 초에도 마운드에 오를 수 있도록 판을 깔아 준 꼴이 됐다.

뉴욕 메츠의 타격 코치는 절망했다.

아무래도 이번 시즌, 반전 따위 없이 역대급으로 망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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