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117화 (117/155)

117화 분석 같은 소리 (1)

제이콥 디그롬 VS 유현.

두 시즌 연속 1점대 방어율을 기록하며 내셔널리그 사이영 상을 수상한 투수와, 데뷔 첫 11경기 동안 압도적인 페이스를 보여 주고 있는 투수의 맞대결이 성사됐다.

덴버 언론은 유현의 승리를 점쳤다.

유현이 홈과 원정 가리지 않고 좋은 투구를 보여 주고 있는 반면, 제이콥 디그롬의 경우 패스트볼의 무브먼트가 말을 듣지 않으면 경기 운용이 힘들 수도 있다고 봤다.

물론 덴버 언론의 예상에는 뉴욕 메츠 감독이 경기를 앞두고 유현이 승리투수가 되지 못할 거라고 발언한 것에 대한 반발 심리 또한 작용했지만, 뉴욕 메츠의 현실적인 전력 또한 반영됐다.

2020시즌.

뉴욕 메츠는 5월까지 치른 62경기에서 20승 42패로 최악의 시즌을 보내고 있다.

방어율 0.91을 기록하며 11경기 연속 10탈삼진 이상 경기를 만들며 미친 시즌을 보내고 있는 제이콥 디그롬이 3승 4패를 기록하고 있을 정도다.

그 이유는 명확했다.

허구한 날 블론 세이브를 기록하는 불펜, 그리고 메이저리그 팀 타율과 팀 홈런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는 타선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투타의 불협화음.

시즌 초 4연승을 내달리며 기세 좋게 시작한 팀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게다가 2020시즌을 끝내고 FA가 되는 제이콥 디그롬이 트레이드 마감 시한을 앞두고 다른 팀으로 이적할 거라는 소문 또한 들리고 있다.

제이콥 디그롬 한 명이 있다고 해서 다음 시즌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게 불가능한 상황에서, 메츠로선 트레이드를 통해 유망주를 받아 오고 FA 계약을 할 돈을 세이브하는 게 현실적인 판단이긴 했다.

제이콥 디그롬 또한 뉴욕 메츠와의 장기 계약이 사실상 물 건너간 마당에 강팀에서 월드 시리즈 우승에 도전하고 싶다며 트레이드가 진행되기를 바라는 듯한 뉘양스의 인터뷰를 더러 했다.

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최악의 시즌.

그렇다고 이제 겨우 6월이 시작됐는데 벌써부터 시즌을 완전히 포기할 순 없었다. 탱킹을 하더라도 최소한의 가능성을 보여 주면서 해야 팬들을 납득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아직 시즌이 반환점조차 돌지 않은 시점, 계기를 잘 마련하기만 한다면 지구 1위는 아니지만 다음 시즌을 기대해 볼 만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무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메이저리그 전체 1위를 내달리고 있는 콜로라도 로키스를 상대로 위닝 시리즈를 확보할 수 있다면?

반전의 계기로 삼기에는 충분하리라.

이번 시즌이 끝나고 경질이 유력한 뉴욕 메츠의 감독은 제이콥 디그롬-노아 신더가드 원투펀치를 1차전과 2차전에서 기용해 위닝 시리즈를 노리기로 결심했고, 그 시작은 메이저리그 데뷔 후 11전 전승을 기록한 유현을 잡아내는 거였다.

준비는 충분했다.

경기 전날.

언론 인터뷰를 통해 자신감을 드러냈을 정도로 유현에 대한 분석은 완벽했고, 라인업 또한 유현을 공략하기 위해 우타자 일색으로 꾸렸다.

게다가 쿠어스 필드다.

자신이 있었다.

1회 초.

선두타자를 유격수 앞 땅볼로 잡아낸 유현은, 이후 2번 타자와 3번 타자에게 연속으로 안타를 허용하며 1사 1․3루 위기에 몰리고 말았다.

희생 플라이를 허용하며 1실점을 하긴 했지만, 5번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위기를 벗어났다.

문제는 2회 초였다.

선두타자에게 2루타를 허용하며 다시 한 번 주자를 스코어링 포지션으로 보내고 말았다.

그 순간.

마크 번칠이 타이밍을 끊어 주기 위해 마운드를 방문하며 유현에게 물었다.

“컨디션 괜찮죠?”

“응. 보다시피 전혀 이상 없어.”

“컨디션은 괜찮은데…… 오늘 좀 이상해요. 너무 쉽게 공략당하는 느낌이에요.”

“우리의 투구 패턴에 대해 분석을 제대로 했나 보지. 혹은 사인이 읽혔을 수도 있고. 작정하고 우타자 일색 라인업을 꺼내든 걸 보면 어떤 식으로든 날 공략할 자신이 있다는 걸로 보면 돼.”

“어떻게 할까요?”

“이런 상황 겪어 본 적 별로 없지?”

“집요하게 분석이 들어오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투구 패턴이 읽히는 경우는 별로 없긴 하죠. 유현 씨는 많이 겪어 봤어요?”

“나야 지겹도록 겪어 봤지. 이제는 우타자 일색 라인업을 봐도 감흥이 없어.”

2018시즌과 2019시즌.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한 유현은 KBO리그 모든 팀들의 경계대상 1호로 급부상했다. 모든 구단들이 유현에 대해 철저하게 분석하고 경계하며 이기기 위해 노력했다.

제일 많이 본 게 우타자 일색의 라인업, 그리고 투구 패턴의 분석이었다.

상대적으로 우타자 상대 피안타율이 높은 게 사실이고, 사용하는 투구 패턴이 몇 개 안 되니 어떤 패턴인지 파악만 하면 공략을 하지 못할 게 없다고 구단들은 판단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유현은 2019시즌 단 1패조차 하지 않고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유현을 공략하기 위한 시도는 모두 무용지물로 돌아갔다.

메이저리그라고 해서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유현은 전력분석을 바탕으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팀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선수였다.

“사인 없이 던져도 다 받아 줄 수 있지? 주자 있는 상황에서는 스플리터 안 쓸 거야.”

“그럼 다 받아 줄 수 있죠.”

“오케이. 그럼 이제부터 사인 없이 던질 거니까 잘 받아 줘. 그리고 내가 모자 끝을 만지면 결정구를 던질 건데, 이건 이따가 더그아웃에서 순서를 정하자. 처음은 커터야.”

“네.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패턴이 분석당하면 예상을 하지 못하게 투구하면 그만이다.

포수가 사인을 내지 않고 투수가 원하는 대로 투구를 하는데, 그 과정에서 타자의 심리를 제대로 꿰뚫어 본다면?

투구 패턴에 대한 전력분석이 무의미해진다.

실제로 유현은 자신의 투구 패턴에 대한 전력 분석이 들어올 때마다 사인 없이 투구를 하며 위기를 벗어나곤 했다.

몸쪽 하이 패스트볼만 두 개 연속으로 던져서 2스트라이크를 잡은 상황.

유현이 모자 끝을 만지작거렸다.

약속한 대로 커터를 몸쪽으로 바짝 붙였다.

슬라이더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예리하게 휘어져 들어간 커터는 우타자의 배트 안쪽을 날카롭게 파고들었고…….

빠각!

결국 배트를 두 동강 내기에 이르렀다.

배트가 부러지며 제대로 힘이 실리지 않은 타구는 투수 정면으로 향했고, 가볍게 잡아낸 유현이 2루를 향해 재빨리 송구했다.

마치 타구가 자신을 향해 날아올 걸 예상이라도 한 듯한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리드 폭을 넓게 잡고 있던 주자가 다급히 몸을 던져 2루로 귀루를 시도했지만…….

“아웃!”

자동 태그가 됐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완벽한 송구로 인해 아웃을 당하고 말았다.

무사 2루의 실점 위기가 환상적인 더블 플레이로 이어지며 순식간에 2아웃이 됐다.

[와아아아아아!]

[유현! 유현! 유현!]

쿠어스 필드가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환상적인 투구를 보여 준 유현을 향해 열정적인 로키스 팬들은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유현은 내친 김에 유격수 앞 땅볼로 세 번째 아웃카운트까지 잡아내며 2회 초를 끝마쳤다.

그리고 더그아웃으로 들어와 마크 번칠과 투수코치와 셋이서 대화를 나눴다.

“3회 초에 한 번 더 테스트해보긴 할 건데, 투구 패턴이 읽히는 거 같으면 오늘 경기는 사인 없이 갈 생각이에요. 결정구만 미리 정해 놓고 모자 끝을 만지는 걸로 사인을 보내려고요.”

“그렇게 해. 확실히 메츠가 성적은 안 좋아도 전력분석은 잘한단 말이야. 벌써부터 투구 패턴이 간파당할 줄은 몰랐는데.”

“어쩔 수 없죠. 더 철저하게 준비할 수밖에.”

“그래. 그래야지. 문제는 오늘인데……. 생각보다 제이콥 디그롬의 공이 너무 좋아서 힘들지도 모르겠어.”

“일단 1점이라도 뽑아 주길 바라야죠.”

“저 기세면 완투라도 할 기세인데?”

“그럼 전 그보다 더 길게 던지면 되죠. 동점을 만들 수만 있다면요.”

“너 설마…….”

유현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투구코치가 예상하고 있는 대로였다. 유현은 머릿속으로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유현이 그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실현시킬 능력이 있는 투수란 거였다.

“저 이런 놈인 줄 알고 영입한 거잖아요.”

* * *

3회 초.

다시 한 번 출루를 허용한 이후 유현의 투구 패턴은 뉴욕 메츠 코칭스태프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버렸다.

정확히는 투구 패턴이 없었다.

그저 유현이 원하는 대로, 상황에 따라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구종을 던졌다.

같은 구종이 세 개 연속 들어올 때도 있었고, 심할 때는 커터만 9구 연속으로 던질 정도로 종잡을 수 없는 투구를 이어나갔다.

문제는 이 투구 패턴이 먹힌다는 거였다.

3회 초 안타를 허용한 이후.

유현은 다시 한 번 병살타로 위기를 벗어났고, 7회 초까지 출루를 허용하지 않은 채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 줬다.

유현이 도출한 해답은 커터였다.

우타자 몸쪽으로 던졌을 때 정타를 만드는 게 어려운 예리한 커터가 계속해서 땅볼을 만들어 냈고, 뉴욕 메츠 타자들의 배트를 무려 6개나 부러트리는 위엄을 보여 줬다.

전력 분석을 통해 유현을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뉴욕 메츠의 코칭스태프는, 전혀 예상치 못한 투구 패턴에 당황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불안해하진 않았다.

유현이 안정감을 되찾긴 했지만, 제이콥 디그롬은 5회까지 퍼펙트를 이어 나갔으니까.

그만큼 제이콥 디그롭의 컨디션이 좋았다.

1회 말에 단 2구를 던져 본 뒤 포심 패스트볼의 무브먼트가 기대 이하라는 걸 정확하게 파악, 이후 투심 패스트볼과 슬라이더와 체인지업과 커브만을 던지면서 타자들을 상대해 나갔다.

유현에게 커터가 있다면 제이콥 디그롬에게는 슬라이더가 있었다. 예리하게 꺾여 들어오는 슬라이더에 콜로라도 로키스 타자들은 연신 헛스윙을 하며 삼진을 당하고 말았다.

5회까지 11탈삼진.

압도적인 탈삼진 페이스를 보여 준 제이콥 디그롭의 퍼펙트 행진은 6회 말에 깨지고 말았다.

같은 투수인 유현에게 말이다.

6회 말 1아웃.

8번 타자로서 두 번째 타석에 들어온 유현은 어떻게든지 제이콥 디그롬을 뒤흔들어 1득점을 하기를 바랐다. 최소한 스코어를 동점으로 만들어야 오늘 경기에서 승산이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1득점을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슬라이더가 미쳐 날뛰고 체인지업이 기가 막히게 떨어지는 저 괴물을 상대로 득점을 할 수 있을까?

유현이 생각해 낸 방법은 단순했다.

딱!

-유현 선수의 기습 번트! 타구가 3루를 향해 느릿느릿하게 흘러갑니다. 3루수가 잡기에는 타이밍이 애매한 상황, 타구를 끝까지 지켜보지만…… 페어입니다! 아슬아슬하게 파울 라인을 넘지 않고 페어가 됐습니다!

-유현 선수의 감각적인 기습 번트와 빠른 발이 만들어 낸 출루입니다. 이로써 제이콥 디그롬 선수의 퍼펙트 행진이 깨졌습니다.

-뉴욕 메츠 입장에서는 골치가 아플 겁니다. 하필이면 발 빠른 주자가 나갔거든요. 1대0으로 리드를 잡고 있는 상황에서 실점을 허용하면, 경기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전혀 예상할 수 없게 됩니다.

-뉴욕 메츠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이번 이닝에서 유현 선수가 홈 베이스를 밟지 못하도록 만들어야만 합니다.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이번 시즌.

유현은 17개의 도루를 기록하고 있었다.

중요한 건 유현이 투수라는 것, 그리고 11경기에 등판한 게 다라는 거였다.

한 경기에 1개 이상의 도루를 기록하고 있는 유현을 상대로 도루를 주의해야 한다는 걸 뉴욕 메츠의 배터리가 모를 리 없었다.

문제는…….

“세이프!”

뉴욕 메츠의 포수의 2020시즌 도루 저지율이 1할 8푼 5리에 불과할 정도로 도루 저지를 못하고 있다는 것, 자동문이 자신을 떡하니 기다리고 있는데 못 들어갈 정도로 유현이 멍청한 선수가 아니라는 거였다.

정확한 타이밍에 2루 베이스를 훔친 유현은, 내친 김에 3루 베이스까지 훔치며 득점을 기대하고 있던 쿠어스 필드의 팬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슬쩍 마운드 쪽을 바라보았다.

같은 투수에게 안타를 허용한 걸로도 모자라 연속 도루까지 허용하며 1사 3루의 실점 위기가 만들어지고 말았다.

마운드 위의 투수가 흔들리고도 남을 만한 상황임이 분명했다.

‘제발 흔들려서 2점 정도만 허용해 주라. 안 되면 1점이라도 좋다. 내가 승리투수가 못 될 수도 있지만, 너도 승리투수가 못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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