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116화 (116/155)

116화 대기록 (3)

메이저리그에 처음 진출했을 때만 하더라도 봉식이는 유현의 머리 위에서 좀처럼 내려가지 않았다. 스칼렛과 함께 머리 위에 앉아 투구와 관련된 조언을 하거나, 잡담을 나누며 경기를 지켜봤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았다.

1회만 지켜보고 더그아웃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고, 최근에는 아예 경기가 시작할 때부터 더그아웃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시행착오가 있을 순 있다.

지난 경기처럼 방심으로 인해 백투백 홈런을 허용할 수도 있고 일순간의 컨디션 난조로 인해 대량 실점하는 경기가 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봉식이는 그 어떤 상황이 부딪히더라도 유현이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봤다. 잠깐의 시련이 있더라도 이겨 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컨디션이 좋을 때의 유현은 어떤 식으로도 공략이 불가능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9회 초.

선두타자를 상대로 마크 번칠은 유현에게 스플리터를 요구했고, 유현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스플리터를 던졌다.

“스윙 스트라이크!”

타자가 크게 헛스윙을 하며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는 데에 성공했다.

2구 또한 스플리터 사인이 나왔다.

딱!

이번에는 초구와 달리 배트에 맞추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파울이 되고 말았다.

순식간에 2스트라이크를 잡은 상황.

유현과 마크 번칠이 20번째 탈삼진을 잡기 위해 3구로 선택한 건 하이 패스트볼이었다.

스플리터를 2구 연속으로 던진 후 몸쪽 꽉 찬 하이 패스트볼을 던지는 건 뻔하디 뻔한 볼 배합 중 하나였다.

당연히 상대 타자 또한 하이 패스트볼이 들어올 거라 예상했지만…….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빠르고 무브먼트가 살아 있는 하이 패스트볼에 배트를 맞추지 못하며 헛스윙을 하고 말았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20번째 삼진을 허용한 타자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유현과 전광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투구 수가 110구를 넘긴 상황이다.

이미 힘이 빠질 대로 빠지고 정신력으로 던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90구 이후로는 투수의 평균 구속은 대체로 2마일 내외로 감속한다.

분명 구속이 감소해야 하는데, 지금쯤이면 최고 구속이 나오지 않아야 하는 게 맞는데…….

전광판에 찍힌 구속은 98마일이었다.

1회 초에 기록한 최고 구속을 9회 초에도 기록하는 미친 체력을 과시했다.

심지어 직전 이닝에서 3루타를 기록한 뒤 폭투가 나오자 홈으로 쇄도하며 두 차례나 전력질주 후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한 투수가 말이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단 말인가?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정도라는 게 있어야지, 이 정도면 그냥 안 지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오죽하면 금지약물을 복용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 정도로 유현의 체력은 엄청났다.

물론 유현은 금지약물 따위 손도 대지 않았고, 철저한 루틴과 자기관리를 통해 만들어 낸 강철 체력에 봉식이의 축복이 더해져 9회 초에도 강속구를 뻥뻥 뿌려 댈 수 있었던 것이다.

‘What the fuck! 저렇게 던지는데 어떻게 치라는 거야?’

98마일짜리 강속구를 던지는 메이저리거는 유현을 제외하고도 제법 많다.

하지만.

그 공을 완벽에 가깝게 제구하고, 9회에도 구속을 유지할 수 있는 투수는 거의 없다. 수십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재능이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공통점은, 한 시대의 풍비하고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던 괴물들이라는 것이다.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의 선수들은 유현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9회 초에도 전력투구를 하면서 몸쪽으로 완벽에 가까운 제구를 하는 한국인 투수를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두 번째 아웃카운트 또한 삼진으로 잡아낸 유현은, 아쉽게도 마지막 타자를 상대로는 포수 팝플라이로 아웃카운트를 잡아내며 삼진 하나를 더 추가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와아아아아아!

유현! 유현! 유현!

그럼에도 쿠어스 필드가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9회 초가 시작하면서 침묵에 잠겼던 덴버의 열정적인 야구팬들이 성대가 찢어져라 함성을 내지르며 유현의 이름을 연호했다.

9이닝 최다 탈삼진과 연속 타자 최다 탈삼진.

한 번의 등판으로 두 가지 기록을 갈아치운 선수에게 어찌 환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기가 끝난 뒤.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유현은 두 가지 기록의 경신했음에도 무덤덤하게 소감을 전했다.

“오늘 컨디션이 좋았고, 단 한 번도 고개를 흔들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마크 번칠의 사인이 좋았습니다. 최고의 호흡을 보여 준 마크 번칠이 아니었다면 신기록을 세우지 못했을 겁니다.”

“세간의 우려와 달리 메이저리그에 완벽하게 적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메이저리그에 순조롭게 적응한 비결이 있습니까?”

“단 하루도 빼먹지 않고 루틴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게 비결인 것 같습니다. 기술적인 면은 KBO리그에서 완성됐다 생각하고, 컨디션 관리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현재 메이저리그 전체 다승 1위, 방어율 1위, 최다이닝 1위로 콜로라도 로키스의 영입이 현명했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있습니다. 데뷔 후 11경기 동안 보여 줄 수 있는 모든 걸 보여 줬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메이저리그에서 달성하고 싶은 기록이 있습니까?”

“아직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쿠어스 필드에서의 퍼펙트게임을 달성하고 싶습니다.”

* * *

노히트 게임을 달성한 지 얼마나 됐다고, 연속 타자 탈삼진 기록과 9이닝 최다 탈삼진 기록을 모조리 갈아 치웠다.

그것도 쿠어스 필드에서 말이다.

77번을 달고 마운드에 오르는 한국인 투수의 맹활약에 콜로라도 로키스 팬들은 열광했다.

-오늘 경기 안 본 사람은 로키스 팬이라고 말하지 마라. 자격미달이다.

-세상에. 살다 살다 쿠어스 필드에서 포심 패스트볼을 자유자재로 제구하는 괴물을 보게 될 줄이야. 유현은 진짜 미쳤어. 난 내일 거실을 그의 유니폼으로 도배할 거야.

-다승 1위, 방어율 1위, 최다 이닝 1위, 탈삼진 4위야. 이게 쿠어스 필드를 홈으로 쓰는 투수의 성적이라는 게 믿겨져?

-혼자 0점대 방어율인 걸 빼먹으면 안 되지.

-미쳤어, 그냥. 핑퐁 타령하는 놈들 죄다 입 다물게 만드는 황홀한 피칭이었어. 로키스가 유현을 옵트아웃 후 재계약하지 않으면, 난 쿠어스 필드 마운드 위에서 똥을 쌀 거야.

-헤이 브라더. 같이 싸자.

-미친놈들. 둘이서 싸는 걸로 되겠어? 단체로 가서 싸줘야지 Fucking 프런트 놈들이 정신 차리고 제대로 일하지.

시즌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유현에 대한 언론과 대중의 시선은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메이저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여환진보다도 임팩트 있는 두 시즌을 보냈지만, 데뷔 시즌과 마지막 두 시즌을 제외하면 부상과 부진으로 허덕였던 것 또한 사실이다.

과연 유현이 메이저리그에서도 마지막 두 시즌과 같은 폭발적인 퍼포먼스를 보여 줄 수 있을까, 아니면 비정상적인 두 시즌을 보냈다는 걸 입증하고 로키스가 최악의 선택을 했다는 걸 보여 준 채 한국으로 돌아오게 될까.

일단 첫 11경기 동안 보여 준 퍼포먼스만 놓고 보면 당연히 전자였다.

11경기에서 91이닝을 투구해 11승 무패 방어율 방어율 0.59 95탈삼진.

정신 나간 탈삼진 페이스를 보여 주고 있지만 2018시즌처럼 승운이 따라 주지 않고 있는 뉴욕 메츠의 에이스에게 밀려 탈삼진만 2위일 뿐, 그 외에 대다수의 지표는 모두 1위를 차지하며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유현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던 언론들은 이젠 유현을 극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유현은 방심하지 않았다.

시즌 11승을 거두고 알리사 메켄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운전을 하며 유현은 봉식과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수고했다. 이제는 내 조언이 없더라도 알아서 잘하는 거 같은데? 지난 경기처럼 방심만 하지 않는다면 사이영 상이 문제가 아니라 메이저리그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시즌을 보낼 수 있을 거 같아.

“흐음. 사실 난 조금 아쉬워. 오늘 경기에서 잘하면 퍼펙트게임을 달성할 수 있을 거라고 봤거든. 공이 워낙 좋았잖아.”

-포심 패스트볼이 좋았지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가 좋았던 건 아니니까.

“그건 그렇지. 그래도 뭐…… 언젠가는 노히트 게임을 달성했을 때처럼 기회가 오지 않겠어?”

-너라면 분명 기회가 왔을 때 잡을 수 있을 거다. 위기만 극복한다면 말이야.

“슬슬 심층 분석이 끝날 때가 됐지?”

-6월부터는 아마 지금까지와는 다를 거다.

“예상 못 한 건 아니잖아.”

-계약하기 전부터 예상하고 있었지.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선수 중, 시즌 초에 메이저리그를 초토화시키는 수준의 활약을 한 이들은 더러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6월을 기점으로 성적이 곤두박질쳤고, 결국에는 언론에서 예상한 수준의 성적을 기록하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

이유는 명확했다.

사소한 루틴마저도 모조리 후벼 파는 메이저리그의 집요한 전력 분석을 이겨 내지 못한 것이다.

투타 모두 예외는 없었다. 전력분석을 이겨 내지 못한 선수는 빅리그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6월을 기점으로 유현에게도 집요한 전력 분석이 들어올 테고, 그것을 이겨내야 빅리그에 완벽히 적응했다고 말할 수 있다.

유현과 봉식은 직감했다.

시즌을 준비하며 갈고 닦은 비장의 무기를 슬슬 꺼낼 때가 다가온다는 걸 말이다.

* * *

시즌 11승을 거두고 이틀 후.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와의 홈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유현은 도핑 검사를 받아야 했다.

무작위 도핑 검사 대상이 된 건데, 일부 언론에서 유현의 도핑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시점에서 도핑 검사 대상이 된 거라 타이밍이 묘했다.

유현은 무덤덤하게 도핑 검사를 받았다.

혹여나 도핑에 걸릴 수도 있는 음식이나 건강보조식품은 아예 입에도 대지 않았기에 결과가 깨끗하게 나올 거라 자신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검사 결과에서는 그 어떠한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다.

도핑 테스트 결과가 깨끗하게 나오자 콜로라도 로키스 감독은 이례적으로 언론 인터뷰를 통해 불쾌한 심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자.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유현은 도핑 검사를 받았고 아무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어. 이제 그 빌어먹을 입 좀 닥칠 타이밍이지 않을까? 메이저리그 역사에 한 획을 긋고 있는 선수를 근거 없는 루머로 뒤흔들려고 한다면, 기자 생활 접을 각오해야 할 거야. 한 번은 넘어갔지만 그 이상은 넘어갈 생각이 없거든.”

개막전부터 그랬다.

유현이 호투하더라도 일부 언론에서는 악의적인 기사를 쏟아 냈고, 지속적으로 도핑 의혹을 제기하고 나섰다.

결국 시즌 11번째 등판에서 연속 타자 탈삼진과 9이닝 최다 탈삼진 기록을 동시에 갱신하자 도핑 의혹이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9회에도 98마일짜리 공을 던지는 게 정상적이지 않다는 게 그 이유였다.

검사 결과가 깨끗하게 나오자 그 동안 침묵하고 있던 콜로라도 로키스 감독이 지속적으로 선수를 흔드는 언론을 공개적으로 질타했고, 열정적인 로키스 팬들은 언론사에 시도 때도 없이 전화에 정상적으로 업무를 볼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결국 일부 언론들이 도핑 의혹을 제기한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나서야 유현의 도핑과 관련된 이슈가 조용해졌다.

물론 유현은 외부의 이슈에 신경 쓰지 않았다.

집에서는 알리사 메켄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틈나는 대로 부모님에게 전화하는 것도 잊지 않았으며, 경기장에서는 철저하게 루틴을 지키며 자기관리가 무엇인지 몸소 보여 줬다.

대기록 두 가지를 한 번에 갱신한 건 분명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시즌은 아직 반환점도 돌지 않았다.

앞으로 분석과 견제는 더욱 심해질 거고, 정규 시즌이 끝난 이후에는 포스트시즌 또한 기다리고 있다.

6월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여전히 메이저리그 전체 1위로 순항하고 있는 콜로라도 로키스는, 후반기에 급격한 추락을 겪지 않는 한 포스트시즌 진출이 확정적이라고 봐야 한다.

포스트시즌까지 감안한다면 긴장을 풀 여유 따윈 없었다. 철저하게 한 경기 한 경기 컨디션 관리에 전념하고 준비할 뿐이었다.

6월 3일.

뉴욕 메츠와의 홈 3연전을 앞두고 등판이 예고된 유현을 향해, 뉴욕 메츠의 감독이 자신만만하게 유현을 겨냥하고 인터뷰를 했다.

“내일, 유현은 승리투수가 되지 못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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