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대기록 (2)
10타자 연속 탈삼진.
연속 타자 탈삼진 타이기록을 달성한 상황에서 유현은 비교적 무덤덤했다.
탈삼진 관련 기록은 KBO리그에서도 갱신했고, 김정수에게 밀려 2위를 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300탈삼진 시즌을 만들어 내기도 했었다.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로 인해 그라운드 볼러라는 이미지가 커서 그렇지 유현은 결코 삼진을 못 잡는 투수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잘 잡는 편이라고 봐야 한다.
라이징성 무브먼트를 지닌 포심 패스트볼과 스트라이크 존에서 뚝 떨어지는 스플리터는 탈삼진에 최적화된 구종이니까.
쿠어스 필드의 특성상 포심 패스트볼이 말을 안 듣는 날이 많다 보니 유현은 땅볼 위주의 피칭을 주로 했고, 때문에 그라운드 볼러라는 이미지가 한층 강해지게 됐다.
원정에서는 종종 탈삼진도 잘 잡지만 쿠어스 필드에서만큼은 철저한 그라운드 볼러.
그것이 유현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었다.
그랬던 유현이 쿠어스 필드에서 10타자 연속 탈삼진을 잡아내자,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타자들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각오를 다졌다.
땅볼도 좋고 플라이 볼도 좋으니까 일단 맞추기만 하자, 연속 타자 탈삼진 신기록을 내주는 일만큼은 무조건 막자.
11타자 연속 탈삼진에 도전하는 유현이 2구 연속으로 존을 벗어나는 유인구를 던졌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스윙을 하기로 한 타자는 2구 연속 헛스윙을 했고, 유현의 빠른 공에 제대로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2스트라이크를 허무하게 내준 상황.
스플리터를 예상한 타자가 스윙을 한 번 참은 뒤 1볼 2스트라이크 상황에서 승부를 보겠다고 다짐했건만…….
“스트라이크 아웃!”
유현과 마크 번칠은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스트라이크 존 한복판으로 찔러 놓은 포심 패스트볼로 가뿐하게 루킹 삼진을 잡아냈다.
루킹 삼진을 잡은 뒤 유현은 머리 위로 손을 들어 올려 가볍게 박수를 쳤다.
KBO리그에서도 유현은 좋은 포수들과 호흡을 맞췄다. 차영석과 지석한 모두 유현에게 잘 맞춰줬고, 유현의 피칭 스타일을 제대로 이해하는 포수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마크 번칠과 비교할 순 없었다.
마크 번칠은 말하지 않아도 유현이 어떤 구종과 어떤 코스를 원하는지 꿰뚫어 보았고, 가려운 곳을 긁어 주듯이 시원시원한 볼 배합을 했다.
방금 전만 하더라도 그랬다.
유현이 한복판으로 포심 패스트볼을 찔러 넣어 루킹 삼진을 잡을 수 있다 확신했을 때, 마크 번칠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사인을 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지난 10경기.
10승을 거두는 동안 유현은 어째서 콜로라도 로키스가 타격이 기대 이하임에도 마크 번칠을 주전 포수로 낙점했는지 확실히 이해했다.
투수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볼 배합과 리그 최고 수준의 수비 실력을 지니고 있다. 타격을 포기하더라도 팀의 승리에 더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는 포수가 바로 마크 번칠이었다.
심지어 이제는 타격마저 잘한다.
정상급 타격 실력은 아니지만 포수로서는 충분한 2할 6푼 대의 타율을 기록하고 있으며, 나쁘지 않은 수준의 장타력 또한 보여 주고 있다.
그 덕분일까?
타격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주자 자신감이 붙었는지 마크 번칠은 투수 리드에서도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투수들은 마크 번칠의 의견에 거의 고개를 젓지 않았다.
결과와 무관하게 마크 번칠은 상황에 따른 최적의 사인을 냈고 투수들을 납득시켰으니까.
유현이 10타자를 넘어 11타자 연속 탈삼진을 잡을 수 있었던 건 마크 번칠의 도움 또한 컸다. 볼 배합을 신경 쓰지 않고 사인대로 투구만 하면 되니 집중하기가 편했다.
거기에 타자들 또한 유현이 마음껏 투구할 수 있도록 제대로 판을 깔아 줬다.
3회 말까지 도합 13득점.
타자들이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의 마운드를 완전히 박살내 준 덕분에 유현은 실점을 걱정하지 않고 투구에만 집중하는 게 가능했다.
실점을 하더라도 워낙 점수 차이가 많이 나다 보니 어느 정도 투구 수가 되기 전에는 교체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평범한 상황이라면 말이다.
유현은 오늘 경기에서 한계 투구 수가 될 때까지는 교체 당할 생각이 없었다. 최대한 긴 이닝을 소화하며, 이왕이면 마지막 아웃카운트까지 자신의 손으로 잡아내고 싶었다.
최대한 많은 탈삼진을 잡겠다는 목표로 마운드에 오른 이상 긴 이닝을 소화하는 건 필수였다.
11타자 연속 탈삼진으로 메이저리그 신기록을 갱신한 상황에서도 유현은 만족하지 못했다. 더 많은 탈삼진을 잡아 메이저리그 역사에 한 획을 긋고 싶었다.
유현은 잘 알고 있었다.
쿠어스 필드에서 포심 패스트볼의 무브먼트가 이렇게 좋은 날이 흔치 않다는 걸, 노히트 게임을 달성했을 때처럼 기회가 왔을 때 확실하게 잡아야 한다는 걸 말이다.
4회 초 2아웃 상황.
12타자 연속 탈삼진을 목표로 하는 상황에서, 마크 번칠은 유현에게 계속해서 3구 연속으로 포심 패스트볼을 요구했다.
하나는 바깥쪽 낮은 코스로,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몸쪽으로 하이 패스트볼을 요구했다.
초구와 2구에는 헛스윙을 유도했지만 3구는 파울이 되며 2스트라이크 상황이 됐다.
이어진 4구째.
당연히 스플리터가 들어올 거라고 예상한 타이밍에, 유현과 마크 번칠은 다시 한 번 몸쪽 하이 패스트볼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제대로 맞아 떨어졌다.
스플리터를 예상하고 있던 타자가 3구 연속으로 몸쪽 하이 패스트볼이 들어올 거라 예상하지 못한 채 크게 헛스윙을 하고 만 것이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1회부터 4회까지.
단 한 번의 출루로 허용하지 않은 채 모든 아웃카운트를 삼진으로만 잡아낸 유현이, 어퍼컷 세레모니를 하며 포효했다.
와아아아아!
그와 동시에 쿠어스 필드가 들썩였다.
팬들은 직감했다.
지금 마운드 위에 있는 투수가, 어퍼컷 세레모니를 하며 포효하고 있는 한국인 투수가 콜로라도 로키스에게 첫 월드 시리즈 우승을 안겨 줄 거라고 말이다.
* * *
유현의 정신 나간 호투에 쿠어스 필드가 들썩일 때, 봉식은 스칼렛과 함께 감독의 머리 위에서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건 스칼렛이었다.
유현의 호투에 연신 감탄하는 스칼렛을 바라보며 봉식은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봉식 씨의 축복 덕분인가요? 유현 씨의 컨디션이 장난 아니에요. 포심 패스트볼의 무브먼트가 저렇게 좋은 건 축복으로도 안 될 텐데…….
-절 만난 이후 단 하루도 악력 강화 훈련을 빠트리지 않고 시켰습니다. 나중에는 제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훈련하더군요. 그 효과를 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유현 씨가 이렇게 잘할 거라고 예상했나요? 솔직히 사이영 상 이야기를 할 땐 반신반의했는데, 지금까지 보여 준 걸 보면 사이영 상이 문제가 아닌 것 같네요.
-예상한 게 딱 이 정도였습니다. 피지컬을 이용하지 못했던 바보에게 자신의 몸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줬으니, 이 정도는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지역 정령들에게 올해는 로키스가 우승한다고 말하면 비웃음만 샀는데, 올해는 정말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제가 바라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좋은 피지컬을 가지고도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던 투수가, 이제는 그 어떤 투수보다 자신의 몸을 제대로 이용하고 활용할 줄 알게 됐다.
그 누가 예상했을까.
대한민국의 그저 그랬던 투수가 불과 2년 사이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메이저리그를 정복하고 있을 거라고 말이다.
메이저리그 데뷔 이후 유현은 줄곧 좋은 모습을 보여 줬다.
우려와 달리 메이저리그에서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며 콜로라도 로키스 팬들과 동료들의 마음을 제대로 사로잡았다.
물론 유현의 목표는, 그리고 봉식의 목표는 단순히 메이저리그에서 순항하는 게 아니었다.
메이저리그의 온갖 기록들을 죄다 갈아치우며 데뷔 시즌에 월드 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것.
그것이 두 사람의 목표였다.
오늘 이 경기에서, 봉식은 유현이 두 가지 기록을 갱신시킬 거라 확신했다.
오늘의 유현은 메이저리그의 내로라하는 강타자들이 모두 덤벼들더라도 막아내지 못할 정도로 완벽한 공을 던지고 있었으니까.
* * *
가뜩이나 최고 구속 98마일로 구속이 빠른데, 무브먼트까지 워낙 좋아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는 게 쉽지 않았다.
거기에 스트라이크 존에서 뚝 떨어지는 스플리터와, 몸쪽으로 바짝 붙는 하이 패스트볼을 완벽하게 제구하니 타자들의 입장에서는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더 열 받는 건, 두 가지 구종만 대놓고 던지는데도 심리전에서 말리며 삼진을 당하는 상황이 더러 나왔다는 거였다.
기껏 공략을 해내도 타구가 뻗어나가지 못하거나 파울이 되곤 했다.
12타자 연속 탈삼진이라는 메이저리그 신기록을 허용한 이후, 자존심이 단단히 상할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타자들이 이를 악물고 타석에 임했지만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5회 초에 나온 선두타자가 내야 안타를 기록하며 어렵사리 신기록 행진을 멈추게 만들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유현은 5회에도 두 개의 탈삼진을 추가했다.
6회에 2개 7회에 2개 8회에 1개.
8회 초까지 무려 19개의 탈삼진을 추가하며 정신 나간 탈삼진 페이스를 보여 줬다.
9이닝 최다 탈삼진 타이기록까지 탈삼진 1개, 신기록 갱신까지 2개를 남겨 둔 상황에서 남은 아웃카운트는 셋, 투구 수는 111구.
8회 말 공격을 지켜보고 있는 유현에게 투구코치가 다가가며 물었다.
“되도록 타석에서 타격하지 마. 네가 체력이 좋은 건 알겠지만, 지금은 조금이라도 체력을 아껴야 할 때인 것 같다.”
“으음, 네. 실투가 들어오는 게 아니면 스윙하지 않고 참을게요.”
투수 타석에서 대타를 쓰지 않겠다는 건, 유현을 9회 초에도 올리겠다는 뜻이었다.
투구 수가 111구로 많은 건 사실이지만 메이저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 신기록을 세울지도 모르는 상황이니만큼 교체 지시가 나오지 않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거였다.
이미 연속 타자 탈삼진 기록은 갱신한 상황.
과연 유현이 9이닝 최다 탈삼진 기록을 갱신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는 가운데, 유현이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2아웃에 타석에 들어섰다.
스코어는 이미 0대15까지 벌어진 상황에서, 9회 초 등판을 생각한다면 유현이 삼진을 당하고 들어오는 게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유현은 그러지 않았다.
초구와 2구를 그대로 지켜봤지만, 3구째로 들어온 제구 안 된 슬라이더에 망설이지 않고 과감하게 배트를 휘둘렀다.
중견수 키를 훌쩍 넘기는 큼지막한 장타를 만들어 낸 뒤, 유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3루를 향해 전력질주했다.
유현이 3루로 향하는 걸 확인한 중견수가 뒤늦게 총알 같은 송구를 했고, 3루수가 유현을 태그해 봤지만…….
결과는 세이프였다.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선택한 유현의 손이 베이스에 닿는 게 태그보다 조금 더 빨랐다.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측에서 비디오 판독을 요구해 봤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슬로우 비디오로 보더라도 유현의 손이 베이스에 닿는 것이 태그보다 빠른 게 명백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또한 그 점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비디오 판돈을 신청한 건, 0대15로 완벽하게 지는 경기에서 투수에게까지 3루타를 허용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한 번 정해진 결과가 바뀌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되도록 스윙하지 말라니까, 하여간 더럽게 말 안 들어요. 숨차서 제대로 투구나 할 수 있겠어?”
투구코치는 푸념을 늘어놓으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다른 투수들이라면 대기록에 도전하는 상황이다 보니 타석에서 루킹 삼진을 당하고 들어왔을 테지만, 유현은 장타를 만들어 낸 걸로도 모자라 전력질주와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통해 3루타를 만들어냈다.
그 모습에 쿠어스 필드가 들썩였다.
팬들이 유현에게 열광하는 건 투수로서 매 경기 호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타석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기록에 도전하고 있는 투수가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까지 하며 3루타를 만들어냈는데, 그 어떤 팬이 싫어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유현은 리드폭을 넓게 잡은 채 끊임없이 상대 배터리를 자극했고, 폭투가 나온 상황에서 다시 한 번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으로 홈을 파고들어 득점으로 연결시켰다.
참으로 유현다운 플레이였다.
매 경기, 모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투수. 유현은 이미 콜로라도 로키스 팬들의 마음에 확고한 에이스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어진 9회 초.
쿠어스 필드가 침묵에 잠긴 상황에서, 유현이 대기록에 도전하기 위해 마운드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