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대기록 (1)
콜로라도 로키스는 원정 9연전을 끝내고 홈으로 돌아와 치르게 된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와의 3연전 첫 경기에서 유현을 선발투수로 예고했다.
지난 경기에서 7이닝 2피안타 2피홈런 무사사구 5탈삼진 2실점으로 시즌 10승을 수확한 유현은, 경기 전 10구 정도 불펜 피칭을 하며 컨디션을 체크해 보았다.
불펜 피칭이 끝난 뒤.
유현은 연신 나이스를 외친 마크 번칠에게로 다가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공 좋은 거 같지?”
“네. 지난 등판에서 공을 많이 안 던져서 그런가? 확실히 오늘 공이 좋아요. 특히 포심 패스트볼의 무브먼트가…….”
“미쳤지?”
“그냥 라이징 패스트볼이에요. 볼 배합 복잡하게 갈 필요 없을 거 같은데요?”
“내 생각도 그래. 단순하게 가자.”
“네. 평소처럼 가요. 이러다 비장의 무기는 계속 안 써도 될 거 같은데요?”
“아마 6월에는 써야 할 거야. 레드삭스와의 인터리그에서 비장의 무기로 써먹어야지.”
“타자들 표정 볼만하겠는데요?”
“뭐 이런 미친놈이 있나 싶겠지. 오늘 나랑 상대할 브레이브스 선수들도 같은 생각일 거고.”
“차라리 벤치 클리어링 일으켜서 동반 퇴장당하고 싶을 걸요? 마운드에서 강제로 끌어내리는 게 유현 씨가 등판한 날 상대 팀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테니까요.”
“그럴지도 모르겠네.”
쿠어스 필드에서 포심 패스트볼이 말을 잘 듣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하지만, 유현처럼 라이징 패스트볼처럼 보일 만큼 수직 무브먼트가 좋은 경우는 보기 드물었다.
그리고 유현처럼 포심 패스트볼이 말을 잘 들을 때,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투수가 많지만 그렇지 못하는 투수들도 더러 있다.
공이 좋다는 걸 알고 과한 자신감이 생겨 정면 승부를 고집하다가 무너지는 투수들도 많다.
물론 유현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공이 좋다고 정면승부를 하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공격적인 투구는 똑같이 유지하되 철저하게 보더라인 위주의 피칭을 하며, 하이 패스트블과 스플리터로 타자들의 헛스윙을 유도할 계획이었다.
불펜 피칭이 끝난 뒤.
더그아웃으로 들어온 유현이 이온 음료를 꺼내 마시며 스칼렛과 오붓하게 해바라기 씨를 까먹고 있던 봉식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해?’
-포심 패스트볼 무브먼트 말하는 거지?
‘응. 메이저리그에 온 이후로 종종 무브먼트가 비정상적으로 좋은 날이 많은 거 같아서. 오늘만 봐도 그렇고. 쿠어스 필드에서 포심 패스트볼이 미쳐 날뛰는 게 정상은 아니잖아?’
-네가 한 단계 더 발전해서 그런 거다.
‘더 발전하기 힘들 거라고 하지 않았어? 그래서 제구를 더 가다듬은 거잖아.’
-더 발전하기 힘들 거라고 한 건 구속을 말한 거였지 구위를 말한 게 아니었어. 어쩌면 앞으로도 종종 지금처럼 포심 패스트볼의 무브먼트가 미쳐 날뛰는 날이 나올지도 몰라. 그리고…… 너 말이야, 나 만나고 나서 악력 강화 훈련 안 한 날이 며칠이나 돼?
‘단 하루도 빠트린 적 없지.’
-그 성과를 이제 보는 거라 생각해.
유현은 봉식을 만난 이후 단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악력 강화 훈련을 했다.
그리고 그 노력이 이제야 빛을 보는 거라면?
봉식이 말한 대로 간혹 무브먼트가 미쳐 날뛰는 날이 온다면, 그리고 그날이 중요한 경기라면…….
그 어떤 팀을 상대하더라도 실점을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
유현은 자신을 상대하게 될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의 타자들을 상대로 작정하고 탈삼진을 잡아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 * *
1회 초.
마운드에 오른 유현이 초구로 선택한 건 몸쪽으로 바짝 붙는 하이 패스트볼이었다.
팡!
“스트라이크!”
몸쪽 높은 코스를 날카롭게 파고 들어간 포심 패스트볼이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았다. 타자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고서 몸을 옆으로 뺐다.
제구가 안 된 포심 패스트볼이 자신의 머리 쪽으로 날아올 거라고 판단한 거였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수직 무브먼트가 너무 좋아 볼이 떠오르는 듯한 착시 효과가 생기다 보니 공이 머리 쪽으로 날아올 거라고 착각했다.
타자가 전광판을 슬쩍 바라보았다.
기록된 구속은 98마일, 유현의 포심 패스트볼이 기록할 수 있는 최고 구속이었다.
‘미친…… 무브먼트가 뭐 이래? 저 자식 진짜 라이징 패스트볼 던지는 거 아냐?’
공이 머리 쪽으로 날아온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포심 패스트볼의 무브먼트가 좋다.
라이징 패스트볼은 존재하지 않는다.
포심 패스트볼의 수직 무브먼트가 좋을 때 볼이 떠오르는 듯한 착시 현상이 생기고, 이걸 가지고 라이징 패스트볼이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착시 현상이든 아니든, 유현을 상대하고 있는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의 1번 타자 눈에는 98마일의 포심 패스트볼이 라이징 패스트볼로 보였다.
‘움찔했네.’
그리고 유현의 눈에는 몸쪽으로 바짝 붙은 포심 패스트볼에 움찔한 1번 타자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적어도 첫 타석에서만큼은 제대로 타격을 하지 못할 거라고 판단했다.
투수에게 있어 강속구는 최고의 무기다.
빠른 공이 몸쪽으로 붙어서 들어올 때, 타자는 위축되고 제대로 된 스윙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일부로 초구를 몸쪽 높은 코스로 던지는 투수마저 있을 정도니 말 다한 거 아니겠는가.
일단 한 번 몸을 빼고 움찔한 이상 정상적인 타격을 하는 게 쉽지 않다. 빠른 공에 맞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은 정신력으로 이겨 낼 수 있을 만한 수준이 아니다.
아, 물론.
유현은 지금까지 패스트볼을 몸쪽으로 붙여 던지면서 타자를 맞춘 적이 없다.
의도하고 제구가 안 된 척 위협구를 던진 적은 있긴 하지만, 제구가 안 돼서 타자를 맞춘 적은 지금껏 단 차례도 나오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의 1번 타자는 위축됐지만 말이다.
유현이 선택한 2구는 스플리터였다.
뚝 떨어지는 스플리터에 헛스윙 한 선두타자를 상대로, 3구는 다시 몸쪽 하이 패스트볼을 선택해서 던졌다.
다만 이전에는 보더라인에 정확히 걸치게 던졌다면, 이번에는 아주 살짝 빠지게 던졌다.
공 반 개 정도의 차이지만, 그 차이로 인해 타자가 느낄 위협감은 배 이상 커지게 된다.
선두타자가 몸쪽으로 파고드는 하이 패스트볼에 배트를 휘둘러봤지만…….
머리 쪽으로 98마일짜리 포심 패스트볼이 날아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위축됐고, 때문에 제대로 된 스윙을 하지 못했다.
하체가 살짝 무너진 상태에서 하게 된 스윙은 크게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헛스윙 삼진을 당한 타자가 유현과 전광판을 번갈아 쳐다보며 헛웃음을 내뱉은 채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동시에 동료들에게 자신이 겪은 바를 그대로 말해 주며 경고했다.
“오늘 경기, 좀 힘들 수도 있을 거 같아. 저 자식 포심 패스트볼이 미쳤어.”
“구속이 잘 나오기는 하던데, 그거 말고 특별한 게 있어?”
“직접 겪어 보면 알겠지만 무브먼트가 미쳤어. 저건 그냥 라이징 패스트볼이라고.”
“쿠어스 필드에서 라이징 패스트볼? 오버하는 거 아니야?”
“직접 겪어 봐라. 그런 말 안 나올 거다. 몸쪽 높은 코스에 걸치는 공이 머리에 날아올 것만 같은 느낌이라니까.”
타순이 한 바퀴 돌았을 때.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의 타자들은 선두타자가 어째서 그런 경고를 했는지 뼈저리게 실감했다.
오늘의 유현은 말 그대로 미친놈이었다.
* * *
유현이 세 타자를 모두 탈삼진으로 잡은 후 찾아온 1회 말, 원정을 끝내고 쿠어스 필드로 돌아온 타자들이 불방망이를 휘둘렀다.
헨리 곤잘레스와 랜디 오스틴의 연속 안타, 찰리 블랙몬과 놀란 아레나도의 백투백 홈런이 터지며 스코어가 순식간에 0대4가 됐다.
트레버 스토리가 7구까지 가는 승부 끝에 삼진으로 물러났고, 6번 타자 마크 번칠 또한 풀카운트 승부를 펼쳤지만 중견수 플라이로 허무하게 물러나고 말았다.
2아웃 상황.
7번 타자로 출장한 유현이 타석에 섰다.
딱!
초구부터 과감하게 배트를 휘둘렀다.
투수인 자신이 카운트를 길게 끌고 가서 좋을 게 없다 생각했고, 첫 타석에 주자가 없는 상황이니만큼 과감하게 게스 히팅을 해본 것이다.
그리고 그 게스 히팅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유현이 초구 투심 패스트볼을 받아쳐 내야 땅볼을 만들어냈고, 유격수 앞 땅볼이 됐어야 할 이 타구가 불규칙 바운드가 튀고 만 것이다.
유격수가 침착하게 타구를 잡아내긴 했지만, 바운드가 크게 튀면서 유현이 1루 베이스를 밟을 수 있는 시간이 만들어졌다.
유격수가 1루로 송구해 봤지만 유현의 발이 베이스를 밟는 게 훨씬 더 빨랐다.
결과는 내야 안타로 기록됐다.
불규칙 바운드만 튀지 않았어도 1루에서 승부를 해볼 수 있었겠지만, 불규칙 바운드가 튀어 버린 상황에서 발 빠른 유현이 1루 베이스를 밟는 건 사실상 예정된 수순이었다.
평범한 내야 땅볼이 불규칙 바운드로 인해 내야 안타로 탈바꿈한 순간.
유현은 확신했다.
아, 오늘은 뭘 해도 되는 날이구나.
그리고 8번 타자로 첫 타석에 선 이안 세비지는…….
딱!
유현과 마찬가지로 초구를 공략해서 그대로 펜스를 훌쩍 넘겨 버렸다.
가뿐하게 홈으로 들어온 유현은 홈런을 치고 돌아오는 이안 세비지와 가볍게 주먹을 맞댄 뒤 미소를 지었다.
“이제 마이너리그 내려갈 걱정 안 해도 되겠는데? 바뀐 타격 폼에 제법 익숙해졌나 봐?”
“이게 다 유현 씨 덕분이에요.”
“얘는 무슨 허구한 날 다 내 덕분이래. 네가 노력했으니까 타격 폼이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거야. 자신감을 좀 가져.”
“자신감…… 네. 명심할게요.”
“조언을 한 게 아니다만. 뭐, 네가 좋게 받아들였다면 그걸로 된 거겠지.”
스코어는 0대6.
1회 말부터 6득점을 지원받은 유현의 입장에서는 어깨가 한결 가벼워졌다.
보통 투수들은 득점이 많을 때와 적을 때 모두 경계한다. 득점이 많을 때는 긴장이 풀려서, 득점이 적을 때는 과도하게 긴장하는 게 문제가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때문에 딱 승리에 필요한 정도의 득점 지원을 받는 게 좋다고 말하는 투수들도 있다.
물론 오늘의 유현에게는 의미 없는 말이었다.
지난 등판에서 백투백 홈런을 맞은 충격 때문인지, 오늘의 유현은 등판에 임하는 각오부터가 남다른 상태였으니까.
1구 1구 최선을 다해 던진다.
단 하나의 실투도, 단 한 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고 완벽한 투구를 할 생각이었다.
때마침 컨디션 또한 좋다.
쿠어스 필드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포심 패스트볼의 무브먼트가 미쳐 날뛰는 날이니만큼,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타자들을 희생양 삼아 최고의 투구를 보여주고 싶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포심 패스트볼과 스플리터, 두 구종만 가지고도 타자들을 충분히 요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 판단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4회 초 1아웃까지.
10타자 연속으로 탈삼진을 잡아냈으니까.
덕분에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의 더그아웃은 난리가 났다.
포심 패스트볼과 스플리터.
오늘 유현은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를 배제한 채 철저하게 두 구종만을 던지고 있었다.
고작 두 가지 선택지다.
문제는 그 두 가지 선택지로 존 구석구석을 원하는 대로 찌를 수 있다는 것, 타자들이 제대로 타이밍을 맞추지 못한다는 거였다.
그 정도 유현의 공이 좋았다.
타순이 한 바퀴 돌고 아웃카운트를 추가로 하나 더 내준 4회 초 1아웃 상황.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타자들은 직감했다.
자신들이 대기록이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고, 4회에 유현을 공략해내지 못하면 오늘 경기에서 처참한 패배를 맛볼 거라는 걸 말이다.
“저 자식 공략할 수 있는 방법 아는 사람?”
“그게 있었다면 진작 했겠지.”
“……빌어먹을.”
반드시 4회 초에 공략을 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봤지만 마땅한 방법이 나오지 않았다.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타자들은 단두대로 끌려가는 기분을 느끼며 타석을 준비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