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113화 (113/155)

113화 무서울 게 없다 (2)

그동안 이안 세비지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는 크게 두 가지였다.

피지컬은 좋은 선수, 하지만 그 좋은 피지컬을 수비에만 사용할 줄 아는 선수.

호타준족으로 성공할 가능성을 지녔지만, 타고난 신체 능력을 타격에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며 좀처럼 빅리그에서 빛을 보지 못했다.

어퍼 스윙으로 바꾸려고 시도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 역시도 자신의 피지컬에 어퍼 스윙을 하면 위협적인 타격을 할 수 있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타격 폼 변화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엔 자신감마저 잃고 말았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타격 폼 변화가 어퍼 스윙과 더불어 오픈 스탠스를 취하고, 변화를 준 뒤에야 메이저리그 데뷔 첫 홈런을 기록할 수 있게 됐다.

물론 아직은 완성단계가 아니었다.

이제 겨우 홈런 하나를 친 게 전부다. 타격으로도 인정받는 선수가 되기 위해서는 첫 발을 내딛었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갈 길이 멀었다.

그럼에도 이안 세비지는 만족했다.

애초에 그의 목표는 원대하지 않았다. 트레버 스토리처럼 30-30을 할 생각도, 놀란 아레나도처럼 홈런왕을 할 생각도 없었다.

타율은 낮더라도 10홈런 이상을 기록하며 그럭저럭 괜찮은 장타력을 보여주는 것.

그 정도면 충분했다.

적어도 콜로라도 로키스에서는, 뛰어난 수비력을 지닌 중견수가 10홈런 이상을 기록한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그 시작을 그랜드 슬램으로 기록했으니 만족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유현은······.

딱! 딱!

-타구가 쭉쭉 뻗어 갑니다. 아, 이건 너무 큰데요? 넘어갑니다! 유현 선수가 시즌 두 번째 피홈런과 세 번째 피홈런을 연속으로 허용합니다.

-한가운데로 몰리는 실투가 연속해서 나오고 말았습니다. 이건 유현 선수가 아니라 그 어떤 선수라 하더라도 장타를 허용할 수밖에 없는 최악의 투구였습니다.

-컨디션에 문제가 있는 걸까요?

-그럴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유현 선수는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최다 이닝을 소화하고 있으니까요. 그게 아니라면 어쩌다 실투가 연속으로 나왔거나, 방심했겠죠.

-어떤 쪽이건 썩 좋진 않군요.

-한 가지 확실한 건 유현 선수가 여기서 더 이상 흔들려선 안 된다는 겁니다. 속된 말로 똥 밟았다 생각하고 멘탈을 다잡아야 합니다.

1회 말에 아웃카운트를 하나도 잡지 못한 채 백투백 홈런을 허용하고 말았다.

KBO리그에서도 허용한 적 없는 백투백 홈런을, 메이저리그 10번째 등판에서 허용한 것이다.

‘허허······.’

유현이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손에 쥐어진 공인구를 만지작거렸다.

백투백 홈런이라니.

쿠어스 필드도 아닌 원정에서, 그것도 대표적인 투수 친화형 구장 중 하나인 펫코 파크에서 백투백 홈런을 허용할 줄이야.

‘메이저리그는 다르다 이건가? KBO리그에서처럼 적당히 던졌다가는 혼쭐난다는 거군.’

사실 유현은 방심하고 있었다.

이전 9경기에서 전승을 기록했고, 이번 경기에서도 1회 초부터 대략 득점이 나오며 승리투수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으니까.

때문에 다소 긴장이 풀렸다.

가볍게 투구하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안타를 허용하더라도 웬만해서는 실점을 하지 않을 거란 자신감도 있었고, 말이 아닌 행동으로 계속해서 증명해 왔다.

지나칠 정도로 긴장이 풀렸고 메이저리그를 만만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정쩡하게 제구된 포심 패스트볼을 놓치지 않고 제대로 받아친 백투백 홈런이었다.

‘재밌네.’

유현은 기사의 헤드라인이 예상됐다.

[유현, 백투백 홈런 허용하며 무너져]

[메이저리그 구단들, 유현에 대한 분석 끝냈나?]

[파드리스가 보여준 유현 공략법.]

[백투백 홈런 허용한 유현, 앞으로가 더 문제다.]

백투백 홈런을 허용한 것만으로도 언론은 유현을 물어뜯을 것이다.

메이저리그 최다 이닝을 소화하며 최소 방어율을 기록하고 있는 선수가 백투백 홈런을 허용했다는 건, 자극적인 타이틀로 야구팬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소재이니까.

유현은 자극적인 기사를 원하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보여 주고 싶었다.

자신이 방심만 하지 않는다면, 작정하고 투구한다면 메이저리그에서도 웬만해선 공략당하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테이블 세터에게 백투백 홈런을 허용해서 흔들릴 법도 하건만, 유현은 클린업 트리오를 세 타자 연속 탈삼진으로 돌려세우며 이닝을 끝마쳤다.

세 타자 연속 탈삼진으로 이닝이 끝났음에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더그아웃의 분위기는 좋았다.

리그에서 유일하게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하고 있는 선발투수를 상대로 백투백 홈런을 쳤다. 더그아웃의 분위기가 살아나기엔 차고 넘치는 사건임이 분명했다.

“확실히 오늘 공은 지난번에 상대했을 때와는 전혀 달랐어. 구속은 엇비슷한데 무브먼트가 생각보다 별로였고, 제구도 안 되는 거 같던데?”

“삼진을 내주긴 했는데 포심보단 스플리터가 문제였던 거 같아. 오늘 스플리터가 기가 막히게 떨어지더라고.”

“그럼 스플리터만 조심하면 되는 건가?”

“일단은 그렇다고 봐야지.”

오늘 유현의 컨디션은 정상이 아니다. 스플리터만 조심하면 얼마든지 공략할 수 있다.

라고 생각했지만······.

이닝이 진행되면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타자들은 자신들이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2회부터 7회까지.

유현은 2회부터 7회까지 15개의 아웃카운트를 모두 땅볼로 잡아내는 기염을 토했으니까.

보더라인에 절묘하게 걸치는 투심 패스트볼과 커터에, 특히나 무브먼트가 정신 나간 투심 패스트볼에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타자들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투심 패스트볼은 특유의 지저분한 무브먼트로 인해 제구가 어려운 구종이라 알려져 있지만, 적어도 유현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보더라인에 정확하게 파고드는, 좀처럼 실투를 볼 수 없는 유현의 투심 패스트볼은 타자들에게는 거의 마구와도 같았다.

타구를 만드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무브먼트가 워낙 지저분하다 보니 정타가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유현이 던지는 투심 패스트볼의 구속은 평균 96마일이다. 제구까지 잘 되니 사실상 공략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구종이었다.

백투백 홈런을 기록하며 달아올랐던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더그아웃은, 유현의 투심 패스트볼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하자 빠르게 식었다.

그리고 이어진 8회 말.

유현은 마운드에 오르지 않았다.

투구 수는 69구에 불과할 정도로 관리를 잘했음에도 교체가 된 건, 유현이 더 이상 투구를 하는 게 승패에 영향을 끼치지 않기 때문이었다.

8회 초까지 콜로라도 로키스 타자들은 무려 21득점을 만들어냈다.

21대2.

선발투수가 굳이 완투를 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며, 유현은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최다 이닝을 기록하고 있는 투수다.

투구 수가 적다고 완투를 시키는 게 아니라 다음 경기를 위해 적절하게 관리를 해주자는 게 코칭스태프가 내린 결론이었다.

유현이 더그아웃으로 들어와 아이싱을 받으며 경기를 지켜보았다. 동시에 봉식이 유현의 머리 위로 올라타며 정수리를 꾹꾹 눌렀다.

-수고했다. 반성할 게 많아 보이긴 하지만.

‘으음. 역시 메이저리그는 쉽지 않은 거 같아. 긴장 좀 풀었다고 바로 백투백이라니, 역시 무서운 동네라니까.’

-긴장만 안 하면 된다는 뜻이기도 하지.

‘그래서 2회부터 7회까지 보여 줬잖아? 작정하고 삼진을 잡을까도 생각했는데, 오늘 포심의 무브먼트가 생각보다 별로라서 땅볼 유도 위주로 피칭했는데 잘 먹히더라고.’

-월드 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릴 때까지, 아니 은퇴식 날 마운드에 키스하는 그 날까지 절대로 방심하지 마. 그럼 넌 메이저리그 역사에 한 획을 긋는 투수가 될 테니까.

‘네네. 명심하겠습니다.’

-잔소리 들으면서 웃다니, 드디어 네가 미친 건가? 정신병원에 데려가야 하나?

‘재밌잖아.’

봉식이에게 잔소리를 듣는 와중에도 유현은 미소를 지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 미소는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이유는 명확했다.

이안 세비지.

자신에게 조언을 듣고 타격 폼을 뜯어 고친 중견수의 맹활약 때문이었다.

5타수 5안타 7타점 3득점.

8회 초까지 이안 세비지가 기록한 성적이다.

1회 초의 그랜드 슬램으로 자신감을 얻은 건지 타격에 눈을 뜬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매 타석 안타를 때려내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9회 초.

이안 세비지는 메이저리그 통산 2호 홈런을 3점 홈런으로 기록하며 팀의 25대2 승리에 엄청난 기여를 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6타수 6안타 2홈런 11타점 4득점.

2020시즌 선발로 출장한 앞선 14경기에서 기록한 안타보다 두 개 더 많이 하루에 기록하며 인생 경기를 만든 이안 세비지였다.

* * *

지난 두 시즌 동안 타격 지표가 아쉬웠던 콜로라도 로키스는, 헨리 곤잘레스와 랜디 오스틴의 메이저리그 콜업으로 고민거리를 덜게 됐다.

두 선수의 합류로 강력한 테이블 세터를 구축, 클린업 트리오를 득점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거기에 수비형 포수라는 평가를 받았던 마크 번칠이 5월 중순까지 타율 2할 6푼 5리 10홈런 24타점 13득점을 기록하며 타격에도 눈을 뜨자 타격에서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어졌다.

완벽하진 않았다.

하지만 팀 방어율 메이저리그 전체 1위를 기록하고 있는 강력한 투수력을 감안했을 때, 승리를 위한 득점을 만들어 내기엔 충분했다.

그래서 수비가 좋은 이안 세비지를 콜업해 중견수로 기용한 거였다.

타격에 더 신경을 쓰는 것보다, 고질적인 문제였던 외야 수비를 강화하는 게 팀의 승리에 더 보탬이 된다고 판단했으니까.

그랬는데······.

그런 이안 세비지가 타격에 눈을 떴다.

유현의 시즌 10번째 등판 경기에서 6타수 6안타 2홈런 11타점 4득점을 기록하더니, 이후 네 경기에서 9안타 2홈런 6타점 3득점을 추가하며 펄펄 난 것이다.

콜로라도 로키스 입장에서는 계획에도 없던 최고의 호재였다.

오로지 수비만을 보고 콜업한, 타격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타자가 타격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 줄 거라고 그 누가 예상했겠는가.

물론 콜로라도 로키스 코칭스태프는 섣부른 판단을 경계했다.

그들은 여전히 이안 세비지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이안 세비지의 상승세가 일시적일 수도 있기에 좀 더 지켜봐야 한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두 가지는 확실했다.

상승세가 끊기더라도 타격 폼의 변화로 시즌 10~20홈런 정도는 기록할 수 있는 타자로 변화했다는 것, 수비만을 보고 데려온 선수가 그 정도의 타격만 해주면 팀의 입장에서는 붙박이 주전으로 기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거였다.

유현의 11번째 등판을 앞두고, 콜로라도 로키스 감독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자신감을 드러냈다.

“메이저리그 방어율 1위 팀이, 5월 팀 타율 9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압도적인 투수력을 감안할 때 승리하기에 충분한 지표입니다. 이번 시즌, 로키스는 월드 시리즈 우승에 전력투구할 겁니다. 시즌이 모두 끝났을 때, 선수단의 손가락에는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가 끼워져 있을 겁니다.”

콜로라도 로키스의 젊은 감독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그런 그이기에 이번 인터뷰는 이례적이었다.

팬들은 감독의 인터뷰가 자신감의 표출이라 생각하며 기분 좋게 받아들었다.

방어율 1위인 팀이 타격 지표마저 조금씩 계선되고 있다. 투타의 불협화음이 사라지고 찰떡궁합을 과시하게 됐다.

막말로 무서울 게 없었다.

지금의 분위기라면 그 어떤 팀을 상대라도 다 이길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실제로 다 이기고 있기도 했고 말이다.

5월 중순이 됐음에도 메이저리그 전체 1위는 여전히 콜로라도 로키스였다.

그리고 이어진 시즌 11번째 등판.

이날 경기에서, 모든 메이저리그 팬들의 이목이 유현에게 집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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