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무서울 게 없다 (1)
쿠어스 필드.
메이저리그 최악의 타자 친화형 구장에서 가장 먼저 노히트 게임을 달성한 건 메이저리그 통산 123승을 기록한 노모 히데오였다.
노모 히데오 이후 완봉승을 한 투수는 여럿 있었지만 노히트 게임을 달성한 선수는 20년이 넘도록 나오지 않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퍼펙트게임을 달성한 투수 또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2020년이 돼서야 쿠어스 필드 역사상 두 번째로 노히트 게임이 나왔다.
주인공은 2020시즌을 앞두고 콜로라도 로키스가 전력 보강을 위해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서 영입한 유현이었다.
9회 초 1아웃 상황에서 헨리 곤잘레스의 실책이 나오는 게 아쉽긴 했지만, 유현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인터뷰에서 헨리 곤잘레스와 이안 세비지, 그리고 다들 야수들에게 고마움을 드러냈다.
“실책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 안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빗맞은 안타를 아웃카운트로 바꾼 수비, 1루와 2루 사이로 빠지는 안타를 동물적인 감각으로 잡아낸 다이빙 캐치, 펜스를 밟고 점프해서 2루타를 막아 준 미친 수비가 아니었다면 노히트 게임은 불가능했을 테니까요. 동료들의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들이 있기에 제가 매 경기 마음 편하게 투구할 수 있습니다.”
유현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동료들에게 어떻게 하면 노히트 게임에 대한 보답을 조금이라도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모처럼의 휴식일.
근사한 마당이 딸린 유현의 집에 콜로라도 로키스의 선수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유현이 노히트 게임을 달성한 기념으로 선수들을 집으로 초대해 파티를 벌이기로 한 것이다. 알리사 메켄과 함께 준비한 한국식 바비큐 파티에 많은 선수들이 좋아해 줬다.
혹시 몰라 와인과 맥주도 잔뜩 준비해 놨다.
하지만 그런 준비성이 무색하리만큼 의외로 콜로라도 로키스 선수들은 소주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물론 시즌 중이다 보니 대부분 술을 가볍게 맛만 보는 정도에서 그쳤지만, 일부 주당 선수들은 소주에 푹 빠져서 쉴 새 없이 잔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중.
두 차례의 호수비로 눈도장을 제대로 찍은 이안 세비지는 이틀이나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언론에서 종종 언급되고 있는 자신의 이름에 감동을 받은 상태였다.
감동이 좌절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언론에서 제 이름을 언급하는 게 너무 신기해요.”
“앞으로는 자주 보게 될 거야.”
“그럴까요? 그러면 소원이 없을 거 같아요. 그동안 전 마이너리그에서도 주목받지 못했던 그저 그런 선수 중 한 명이었어요.”
“수비만큼은 확실하게 인정받았잖아.”
“그 대신 타격이 쓰레기죠. 솔직히 말할까요? KBO리그에서 영입 제안이 여러 번 왔는데 결국 진출하지 못했어요. 제 타격 실력으로는 거기서도 살아남지 못할 테고, 그러면 제 커리어는 끝장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솔직히 두려웠어요. 얼떨결에 기회를 잡게 된 지금도 두렵고요.”
“네 자리가 없어질까 봐?”
“내일 당장 쫓겨난다 해도 이해할 수 있어요.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을 거고요. 제 타격 실력이 형편없는 건 제가 가장 잘 아니까요.”
“음…….”
유현은 이안 세비지의 말을 듣고서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부상으로 인한 기량 하락, 죽어라 노력해도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는 나날들, 부상과 부진의 반복으로 인해 지쳐가던 시간들.
그때의 유현은 마운드에 서는 걸 두려워했다. 마운드에 서는 게 고문을 받는 것만 같았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마운드에 오르는 게 너무 좋아 미칠 것 같았다.
언젠가는 은퇴를 하고 마운드를 떠나야 할 텐데, 그때가 되면 삶의 낙을 잃고 우울증에 걸릴까 봐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래서일까?
유현은 이안 세비지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이해하고,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진심 어린 조언을 할 수 있었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어.”
“유현 씨가요? 정말요?”
“첫 시즌 후에 부상과 부진을 계속 반복했거든. 내가 잘한 건 데뷔 시즌과 최근 두 시즌이 전부야. 그 외에는 모두 죽 썼고. 그때 내가 그랬어. 팀에 내 자리가 없다 생각했고, 마운드에 오르는 게 죽는 것보다 무서웠거든.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그런 감정들이 날 좀먹고 있더라고.”
“…….”
“타격코치님께 도와달라고 해 봐. 잘하고 싶다고 말씀드려 봐. 그럼 분명 도와주실 거야. 부정적인 생각을 할 시간에 죽어라 노력해.”
“그래도 안 되면 어떻게 하죠?”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지. 그래도 병신처럼 해 보지도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죽어라 노력해 보는 게 낫지 않겠어?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해.”
“……네.”
“내가 너라면, 어퍼 스윙을 할 거 같아. 레벨 스윙은 너무 생산성이 떨어져.”
“어퍼 스윙이라…… 참고할게요.”
그날.
유현의 진심 어린 조언은 수비는 잘하지만 타격에 재능이 없다고 평가받던, 평범한 마이너리거 중 한 명이었던 이안 세비지의 인생에 터닝 포인트가 됐다.
이안 세비지가 은퇴하는 날에도 이날의 대화를 입에 담을 정도로.
* * *
랜디 오스틴-헨리 곤잘레스-찰리 블랙몬-놀란 아레나도-트레버 스토리-마크 번칠로 이어지는 1~6번 타순의 완성도는 수준급이었다.
홈과 원정의 격차가 존재하긴 하지만, 원정에서 득점 지원력이 메이저리그 전체 최하위였던 지난 시즌과 달리 이번 시즌은 18위로 비교적 선방하고 있는 추세였다.
투수진이 확실하게 자리를 잡은 콜로라도 로키스 입장을 고려할 때, 기본적인 득점 지원만 해주더라도 승리 확률이 대폭 높아진다.
물론 아쉬움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1~6번 타순을 제외한 7~9번 타순은 여전히 답이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나마 타격에 재능이 있는 유현이 등판하는 날에는 괜찮았지만, 그 외에는 안정적인 득점을 기대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어느 선수를 가져다 놔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와중에…….
이안 세비지가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기 위해 타격코치의 조언을 받아 변화를 시작했다.
기존의 레벨 스윙을 어퍼 스윙으로 바꾸고 극단적인 오픈 스탠스를 취하는 등, 자신에게 가장 맞는 타격 폼을 찾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성과는 바로 나오지 않았다.
메이저리그에 올라오고 14경기 동안 이안 세비지가 기록한 안타는 단 네 개.
빠른 발을 이용한 넓은 수비 범위와 빠르고 정확한 타구 판단을 통해 중견수 수비를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긴 하지만, 타격에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콜로라도 로키스 팬들은 이안 세비지의 수비만으로도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었다.
수비와 타격 모두 기대 이하였던 기존의 선수들보다야 수비라도 잘하는 이안 세비지가 낫다는 게 그들의 판단이었다.
물론 이안 세비지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반쪽짜리 선수가 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야 팀에 도움이 되니까 별말이 안 나오는 거지, 결국은 기본 수준의 타격조차 하지 못한다면 어느 순간 자신의 자리가 사라질 거라는 걸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경기가 끝난 후에도 쿠어스 필드에 홀로 남아 가장 늦게까지 스윙 연습을 했으며, 원정에 갔을 때는 호텔 주차장에서 잠이 들기 직전까지 죽어라 스윙을 했다.
그 결과.
이안 세비지는 마침내 메이저리그에서 처음으로 수비가 아닌 타격으로 주목을 받게 됐다.
공교롭게도 그가 콜로라도 로키스 언론으로부터수비로 처음 주목을 받았던 유현의 등판 경기에서, 그것도 시즌 10승 달성이 걸린 경기에서 말이다.
시즌 7번째 등판에서 노히트 게임을 달성한 유현은, 8번째 등판과 8번째 등판에서 연속으로 9이닝 1실점 완투승을 거뒀다.
시즌 전승으로 9승을 달성했고 이제 10승 고지를 눈앞에 둔 상황, 유현은 열 번째 등판에서 메이저리그 전체 선수 중 가장 먼저 10승을 달성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리고 1회 초.
헨리 곤잘레스-랜디 오스틴-찰리 블랙몬-놀란 아레나도의 4연속 안타가 터지며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의 선발투수는 곤욕을 겪고 있었다.
2019시즌 8승 7패 방어율 3.55를 기록하며 잠재력을 드러냈고 이번 시즌에도 5승 3패 방어율 3.21로 순항하고 있었으나, 헨리 곤잘레스와 랜디 오스틴의 합류 이후 물이 오른 콜로라도 로키스의 타선을 막아 내지 못하고 있었다.
1실점을 하고서 무사 만루 상황.
투수가 이를 악물었다.
‘7번까지만 막아 내자. 막아 내면 한숨 돌릴 수 있어.’
그가 본 자료에선 중견수와 우익수의 타격은 별 볼 일 없었다.
일단 이번 위기를 벗어날 수만 있다면 이후로는 손쉽게 승부를 하는 게 가능하다.
자신의 시즌 실점 중 60퍼센트 가량이 1회에 몰려 있는 만큼, 1회만 넘긴다면 호투를 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을 내렸다.
무사 만루 상황에서 트레버 스토리-마크 번칠-유현을 차례대로 상대해야 하는 상황.
투수가 전력투구를 이어 나갔다.
트레버 스토리를 삼진으로 돌려세우긴 했지만 마크 번칠이 볼넷을 얻어 나가며 추가 실점, 1사 만루 상황에서 유현을 다시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어렵사리 아웃카운트 두 개를 만들어 냈다.
2점을 내줬지만 상대 타자가 이안 세비지라는 걸 확인한 순간 투수는 안도했다.
타격은 별 볼 일 없는, 수비만 뛰어난 선수이니만큼 자신의 주 무기인 고속 슬라이더를 이용해 삼진을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투수의 예상은…….
딱!
이안 세비지가 1볼 1스트라이크 카운트에서 몸쪽으로 꽉 찬 포심 패스트볼을 그대로 당겨 쳐 전광판을 직격하는 대형 홈런을 만들어 내는 순간 완전히 박살 났다.
-호오오오옴런! 이안 세비지가 자신의 메이저리그 데뷔 첫 홈런을 그랜드 슬램으로 장식합니다!
-누가 이 선수보고 타격 못 한다고 했습니까! 누가 이 선수에게 수비만 보고 쓴다고 했습니까! 이렇게 훌륭한 어퍼 스윙을 하는데 말이죠!
-어퍼 스윙과 극단적인 오프 스탠스를 취하며 변화를 시도한 게 좋은 결과로 나타난 것 같습니다. 메이저리그에 올라온 이후 살아남기 위해 노력한 게 빛을 보려는 것 같습니다.
-이제 겨우 홈런 하나일 뿐이지만, 분명 타구의 질이 좋았습니다. 어느 정도의 선구안만 갖춘다면 기본 수준의 타격은 할 거라고 봅니다.
-로키스는 이안 세비지 선수에게 많은 걸 바라지 않을 겁니다. 타율은 떨어지지만 언제든지 홈런를 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기만 해도 그를 계속 기용할 겁니다.
-그렇죠. 현재 트리플A에서는 이안 세비지 선수를 대체할 자원이 없고, 팀은 내년에 선발투수를 한 명 더 살 생각으로 허리를 쥐어짜고 있으니까요.
메이저리그 데뷔 첫 홈런을 만루홈런으로 기록한 이안 세비지는, 이온음료를 마시며 자신을 바라보지도 않는 유현에게 다가가 안겼다. 첫 홈런을 기록한 선수에게 하는 전통적인 세레모니조차 잊을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제가 해냈어요! 제가 그랜드 슬램을 쳤다고요!”
“타격 폼 바꾼 게 효과가 있나 보네.”
“이게 다 유현 씨 덕분이에요!”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그래. 타격코치님이 도와주시고, 네가 잠까지 줄여 가며 죽어라 노력한 게 빛을 보는 거지.”
“아니에요. 그날 유현 씨가 조언을 해주지 않았다면 전 노력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거예요. 패배의식에 젖어서 제 자리를 차지할 선수가 올 때까지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냈을 거예요. 유현 씨의 조언 덕분에 마음가짐을 다르게 먹을 수 있었던 거예요.”
타격코치의 조언과 잠까지 줄여가며 스윙 연습을 한 덕분에 바뀐 타격 폼에 조금씩 익숙해져가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 계기를 마련해 준 게 유현이었다.
유현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경험에서 우러난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더라면 변화의 계기를 마련하지도 못했으리라.
더그아웃에서 환호성을 내지르며 선수들과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이안 세비지를 바라보며, 봉식이 유현의 머리 위로 올라타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응? 뭘 어떻게 알아?’
-피지컬은 좋은데 사용법을 모르고 멘탈이 약한 저 중견수가 바뀔 수 있을 거라는 걸. 타격 폼을 바꾸면 좋은 타자가 될 거라고 생각해서 조언한 거 아냐?
‘그럴 리가 있나.’
-모르고 조언한 거라고? 정확하게 어퍼 스윙을 하라 말했잖아?
‘그건 그냥 피지컬이 아까워서 한 말이지. 보면 알잖아. 저 피지컬에 레벨 스윙을 하는 게 가당키나 하냐고.’
-음. 그렇긴 하지.
‘뭐…… 보아하니 조언이 제대로 먹힌 거 같네.’
별 생각 없이 한 조언이었다.
피지컬이 아까워서,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하는 거 같아 조언을 해본 거였다.
그 누가 예상했을까.
동질감을 느끼고 지나가듯이 했던 조언이 한 선수의 인생을 바꿔 놓을 거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