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 볼러-111화 (111/155)

111화 괴물들 (4)

8회 초.

포수 마크 번칠은 유현의 투구 패턴에 약간의 변화를 줬다. 삼진보다는 범타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리드를 하기로 결정했다.

대기록까지 아웃카운트 여섯 개를 남겨 둔 상황에서 무리하게 삼진을 잡으려 들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쿠어스 필드에서는 일단 외야로 타구가 뜨는 순간 불안한 게 사실이니까.

물론 상황에 따라 포심 패스트볼과 스플리터 또한 요구할 생각이었다. 상대가 뻔히 어떤 구종을 노리는지 보이고 삼진을 잡을 가능성이 높은데도 마냥 범타를 유도할 생각은 없었다.

커터를 던져 유격수 앞 땅볼을 유도하며 1아웃, 투심 패스트볼을 던져 투수 정면으로 오는 타구를 유도해 내며 손쉽게 2아웃.

3아웃을 만들기 위해 1볼 2스트라이크로 유리한 카운트를 잡은 상황에서, 마크 번칠은 과감한 사인을 냈다.

한가운데로 포심 패스트볼을 전력투구하라고 요구했다. 대놓고 스플리터를 노리는 상대 타자에게 헛스윙을 유도하기 위한 거였다.

다른 투수였다면 그런 포수의 주문에 고개를 저었겠지만 유현은 달랐다. 포수의 사인에 거의 고개를 젓지 않는 스타일이니만큼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이고서 과감하게 몸쪽으로 찔러 넣었다.

98마일.

유현이 던질 수 있는 최고 구속의 포심 패스트볼이 스트라이크 존 한가운데를 꿰뚫었다.

스플리터를 노리고 있던 타자는 라이징성 무브먼트를 보여 주는 유현의 포심 패스트볼에 크게 헛스윙을 하고 말았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결국 유현은 8회 초의 세 번째 아웃카운트를 헛스윙 삼진으로 깔끔하게 잡아냈다. 한복판으로 찔러 넣으라는 마크 번칠의 투수 리드가 제대로 먹혀든 것이다.

8회 말.

콜로라도 로키스에게 다시 한 번 공격 기회가 찾아왔고, 팬들은 타자들이 빅 이닝을 만들어 주기를 바랐다.

이미 스코어가 0대7까지 벌어졌음에도 빅 이닝을 바라는 건, 그래야지 유현이 다시 한 번 타석에 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유현이 히트 포 더 사이클을 기록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홈런을 칠 수 있냐 마냐의 문제가 아니다.

콜로라도 로키스가 리드를 잡은 상황에서, 동점을 허용하지 않는 한 공격 기회는 8회 말 한 차례밖에 남지 않았다.

7회 말에 타석에 섰던 유현이 다시 타석에 들어서려면 8회 말에 빅 이닝이 만들어져야 한다.

이미 대량 득점을 만들어 낸 상황에서 다시 한 번 빅 이닝을 만들기란 쉽지 않는 일이다.

실제로 8회 말.

콜로라도 로키스는 안타 하나를 치긴 했지만 더 이상의 출루를 만들어 내지 못하며 유현이 타석에 설 기회를 만들어 주지 못했다.

-아아. 결국 유현 선수가 타석에 들어서지 못한 채 8회 말이 종료됩니다.

-7득점을 하긴 했지만 출루 자체는 많지 않았습니다. 출루를 할 때마다 확실하게 득점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여서 스코어가 벌어진 거죠. 좀 더 출루를 많이 했으면 유현 선수에게 기회가 주어졌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유현 선수의 히트 포 더 사이클 도전은 이렇게 끝이 나게 될 걸로 보입니다.

-하지만 아직 한 가지 도전이 더 남아 있습니다.

-9회 초를 앞둔 상황에서 쿠어스 필드가 침묵에 잠깁니다. 로키스의 팬들에게 이런 조용한 모습을 보는 건 쉽지 않은데 말이죠.

-그만큼 중요한 상황이니까요.

관중들은 아쉬움을 삼켰다.

3루타-안타-2루타를 기록한 상황에서 투수가 히트 포 더 사이클을 기록하는 진귀한 기록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사로잡혀 있었으니까.

다만 아쉬움은 찰나에 그쳤다.

관중들은 순식간에 미련을 떨쳐냈다.

아쉬움 대신 기대감 가득한 눈빛으로 마운드 위에 올라가는 한국인 투수를 바라보았다.

8이닝 0피안타 무사사구 7탈삼진 무실점.

24개의 아웃카운트를 잡아내는 동안 한 명의 투수가 홀로 마운드를 지키며 단 한 번도 출루를 허용하지 않았다.

남은 아웃카운트는 세 개.

세 개의 아웃카운트만 더 잡는다면 쿠어스 필드 역사상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 퍼펙트게임을 달성할 수 있는 상황.

퍼펙트게임과 히트 포 더 사이클.

둘 중 뭐냐 좋냐고 물어본다면······.

당연히 전자였다.

투수가 히트 포 더 사이클을 기록하는 것도 진귀한 기록이지만, 쿠어스 필드에서의 퍼펙트게임과 비교할 수는 없는 기록이기도 했다.

최악의 타자 친화형 구장에서 팀의 에이스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투수가 퍼펙트게임을 기록하는 것만큼 의미 있는 기록이 또 있을까.

쿠어스 필드에서, 그리고 집에서 경기를 보고 있는 콜로라도 로키스의 팬들은 진심으로 바랐다.

유현이 남은 세 개의 아웃카운트를 잡아내는 동안 출루를 허용하지 않기를 말이다.

9회 초.

마운드에 오른 유현은 대기록을 앞둔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차분한 표정으로 피칭을 준비해 나갔다.

딱!

타자가 초구를 노려봤지만 내야에 타구가 떴다. 콜을 외친 트레버 스토리가 유현의 근처까지 내려오며 깔끔하게 타구를 처리해 줬다.

순식간에 1아웃.

아무래도 LA다저스 타자들은 유현을 상대로 적극적인 승부를 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지난 이닝부터 초구 타격을 하는 빈도가 눈에 띄게 늘어난 상태였다.

하기야.

카운트가 유리한 상황에서 타자의 심리를 제대로 읽고 허를 찌르는 유현의 성향을 생각해 볼 때, 오히려 초구 타격이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로 KBO리그에서 지난 두 시즌의 기록을 놓고 봤을 때, 유현 모든 카운트 중 초구에서 가장 높은 피안타율을 기록했다.

그마저도 워낙 낮긴 하지만 가장 확률이 높은 건 분명했다.

9회 초 1아웃 상황.

타석에 들어선 8번 타자 또한 유현을 상대로 과감한 초구 타격을 시도했다.

투심 패스트볼을 받아쳤지만 정타가 되지 못했고, 2루수 헨리 곤잘레스가 타구를 잡아 1루를 향해 깔끔하게 송구했다.

아니, 송구하려고 했다.

대기록을 앞둔 상황이라 긴장을 한 걸까, 아니면 경기가 막바지이다 보니 집중력이 흐트러진 걸까?

헨리 곤잘레스가 글러브에서 공을 빼내는 과정에서 두 차례 더듬고 말았다. 그사이 LA다저스의 8번 타자는 1루 베이스를 향해 전력질주를 하고 있었다.

다급하게 송구해 봤지만 송구가 크게 엇나갔다. 1루수 랜디 오스턴이 절대로 잡아낼 수 없는 방향으로 송구가 새어 버렸다.

다행히 타자주자가 2루까지 가지 못했지만, 손쉽게 잡아낼 수 있는 아웃카운트를 헨리 곤잘레스의 실책으로 인해 놓치고 말았다.

퍼펙트게임이 깨졌다.

아웃카운트 두 개를 남겨둔 채 말이다.

그 순간.

투수코치와 포수 마크 번칠이 마운드에 오르고, 내야수들이 마운드 근처로 모여들었다.

헨리 곤잘레스는 고개를 푹 숙였다.

손쉬운 타구를 실책했기에, 자신으로 인해 퍼펙트게임이 깨졌기에 차마 유현을 쳐다볼 면목이 없었다.

유현은 그런 헨리 곤잘레스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하며 미소를 지었다.

“월드 시리즈 7차전 끝내기 실책을 한 것도 아닌데 뭐 그렇게 풀이 죽어 있어?”

“죄송해요, 저 때문에 퍼펙트게임이 깨져서······.”

“너 때문은 무슨 너 때문이야. 네가 오늘 잡아준 아웃카운트가 몇 개인 줄 알아? 너 아니었으면 퍼펙트게임에 도전조차 못했어. 그리고 아직 기록이 완전히 깨진 건 아니잖아?”

“아······.”

그랬다.

퍼펙트게임은 깨졌지만 안타가 아니라 실책으로 인한 출루이기에 노히트 게임은 여전히 유효한 상황이었다.

쿠어스 필드 역사상 최초의 대기록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대기록은 대기록이다.

유현이 헨리 곤잘레스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한 번 실수한 거 가지고 위축되지 마. 노히트까지 깨져도 난 신경 안 쓰니까.”

“······네. 다음번에는 제가 꼭 호수비로 유현 선수를 도울게요.”

“그래. 부탁할게.”

헨리 곤잘레스는 약속을 지켰다.

대타로 타석에 선 타자가 1볼 1스트라이크 상황에서 커터를 받아쳐 1루수와 2루수 사이로 빠지는 안타를 만들어 낼 뻔했다.

헨리 곤잘레스가 동물적인 수비로 타구를 잡아내 1루로 송구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진짜 괴물은 괴물이라니까.’

유현이 헨리 곤잘레스의 수비에 혀를 내둘렀다.

방금 전 헨리 곤잘레스가 보여 준 수비는 죽어라 연습한다고, 냉정하게 판단한다고 해서 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동물적인 감각이 있어야 가능한 수비였다.

감각은 노력의 영역이 아닌 재능의 영역이다. 타고나지 못한 선수는 죽어라 노력해도 은퇴할 때까지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헨리 곤잘레스는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선수다.

상당수의 선수들이 가지지 못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만큼 유리한 고지에서 성공을 향해 도전하는 거라고 봐야 하니까.

게다가 헨리 곤잘레스는 멘탈 또한 좋았다.

자신의 실책으로 동료의 퍼펙트게임이 무산된 상황에서 과도한 긴장으로 몸이 굳을 법도 하건만, 유현이 괜찮다고 말 한 마디 해주자마자 귀신같이 안정감을 되찾으며 호수비를 보여 줬다.

‘덕분에 한숨 돌릴 수 있었어. 남은 아웃카운트는 하나······.’

퍼펙트게임은 무산됐다.

하지만.

출루를 허용하긴 했어도 안타는 여전히 허용하지 않은 상황, 아웃카운트 하나만 순조롭게 잡아낸다면 노히트 게임을 달성할 수 있다.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기 위해, 유현이 타자의 몸쪽으로 투심 패스트볼을 찔러 넣었다.

아니, 찔러 넣으려고 했다.

무브먼트가 밋밋하고 한가운데로 살짝 몰리면서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문제지.

이날, 유현의 유일한 실투가 하필이면 아웃카운트 하나를 남겨두고 나왔다.

딱!

대타로 타석에 선 살짝 밋밋하게 들어간 투심 패스트볼을 받아쳐 타구를 큼지막하게 띄우는 데에 성공했다.

타구는 중견수 방향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각도를 봤을 때는 홈런은 아니지만 펜스를 통타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유현은 진한 아쉬움을 느꼈다.

하필이면 이날 경기의 유일한 실투로 인해서 노히트 게임을 놓치게 된 게 안타까웠다.

경기를 지켜보는 관중들도, 더그아웃에 있는 콜로라도 로키스 선수단도 아웃카운트 하나를 남겨두고 노히트 게임이 깨질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수비 하나만으로 메이저리그에 올라온 중견수는, 어째서 자신이 수많은 마이너리거 중에서 코칭스태프의 선택을 받았는지를 제대로 보여 줬다.

타구의 체공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퍼올린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발사 각도가 좋고 타구 속도가 빨랐다.

그러나 이안 세비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타구가 뜨는 순간부터 지체하지 않고 펜스를 향해 내달렸고, 그 와중에도 시선은 공에서 떨어트리지 않은 채 낙구 지점을 끊임없이 체크했다.

이안 세비지가 펜스 근처에 도착했을 때, 타구 또한 펜스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펜스 상단을 맞추는 2루타가 될 가능성이 높은 타구를 걷어 내기 위해, 이안 세비지는 펜스를 지지대 삼아 점프하며 타구를 잡아내기 위해 팔을 내뻗었다.

2루타가 됐어야 할 타구가 글러브 속에 부드럽게 빨려 들어갔다.

낙법을 이용해 안정적으로 착지하며 한 바퀴 구른 이안 세비지는, 별일 없었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머리 위로 글러브를 들어 올렸다.

타구가 여전히 자신의 글러브 속에 있다는 걸 확인시켜 주기 위해 말이다.

-세상에! 지금 제가 뭘 본 겁니까! 이안 세비지가 대기록을 헌납하지 않기 위해 LA다저스의 마지막 일격을 물거품으로 만들었습니다!

-타구 속도가 워낙 빨라 2루타가 될 거라고 봤는데, 그걸 미친 듯이 쫓아가서 펜스를 밟고 뛰어 올라 잡아냈습니다! 말도 안 되는 플레이입니다! 빅리그에서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골든글러브 중 한 자리는 무조건 그의 차지일 겁니다!

-오늘 이안 세비지는 한 타석도 출루하지 못했지만, 그가 보여 준 두 번의 호수비는 안타 그 이상의 가치가 있었습니다.

와아아아아아아!

쿠어스 필드가 환호성으로 들썩였다.

선수단이 일제히 그라운드로 쏟아져 나오며 대기록을 세운 유현을 축하해 줬다.

쿠어스 필드 역사상 두 번째 노히트노런.

유현이 역사의 한 페이지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며 메이저리그에 확실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7경기 동안 57이닝을 소화하며 방어율 0.15.

넘쳐나는 괴물들 중에 자신이 최고라고, 이번 시즌 내셔널리그 사이영 상은 자신의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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